동생 염수완·수의 신부도 사제의 길 한국교회 역사상 첫 '3형제 사제'서울대교구장 임명후 교황이 주목 후배들과 카카오톡 친화력 뛰어나

우리나라에 또 한 명의 추기경이 탄생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을 맡고 있던 염수정 전 대주교가 그 주인공이다. 고 김수환 추기경과 정진석 추기경에 이어 우리나라 출신의 세 번째 추기경이 된 염 추기경은 내달 22일 서임식을 갖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예정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2일 낮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삼종기도를 마친 후 염수정 추기경을 비롯한 19명의 새 추기경 명단을 공식 발표했다. 염 추기경을 서임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역사상 최초의 남미 출신 교황이다. 이에 교계 관계자들은 지난해 3월 즉위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처음으로 결정할 새 추기경의 경우 비유럽권 성직자들도 폭넓게 포함될 것이라 예측했다. 결과적으로 이번에 서임된 신임 추기경 명단에는 염 추기경을 비롯해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 부르키나파소, 중남미의 아이티, 칠레 등 다양한 지역 성직자들이 이름을 올렸다.

"분열과 갈등을 치료하는 교회가 되겠다."

염수정 전 대주교의 추기경 임명 소식을 들은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이튿날 바로 축하식을 열었다.

서울대교구청 주교관 앞에서 열린 축하식에서 염 추기경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느님과 교황님의 뜻에 순념한다"며 "서울대교구를 이끌어주신 고 김수환 추기경과 정진석 추기경의 노력에 존경을 표하며 저의 작은 힘을 보태고자 한다"고 입을 뗐다.

염수정 추기경이(오른쪽) 2012년 6월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팔리움 수여미사에서 당시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팔리움을 받고 있다.
보수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평을 듣는 염 추기경은 진보적 목소리를 내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보조를 맞출 것 또한 강조했다. 염 추기경은 "교황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아시아의 복음화와 북한 교회를 위해 도울 수 있는 방법과 화해의 길로 나아가는 노력을 다하겠다"며 "지금은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만연한 시대이고 이럴 때일수록 교회가 더욱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염 추기경은 "우리 사회의 만연한 분열과 갈등을 치료하는 교회가 되는데 힘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며 "이 시대의 징표가 무엇이고 어떻게 복음의 빛으로 밝혀야 할지를 끊임없이 찾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지혜와 용기를 청한다"고 전했다. 보수적ㆍ원칙적 색채를 띠던 염 추기경의 서임에 우려를 표하던 천주교 일각 또한 지금까지의 행보와는 사뭇 다른 그의 다짐에 좀 더 지켜보자는 모양새다.

6대째 믿음 지켜온 순교자집안

염수정 추기경은 1943년 12월5일 경기도 안성군 삼죽면에 자리잡아온 가톨릭 집안의 5남3녀 가운데 여섯째(3남)로 태어났다. 염 추기경의 동생인 염수완, 염수의 신부도 사제의 길을 선택, 각각 문정동본당과 잠원동본당에서 주임사제로 사목 중이다. 한국교회 역사상 3형제 사제는 염 추기경 형제가 처음이다.

염 추기경 형제들이 사제의 삶을 선택한 것은 염씨 일가 내에 오래도록 전해져오는 순교자의 피 덕분으로 보인다. 염 추기경의 집안은 한국 교회 초기 무렵부터 가톨릭 신앙을 지켜오는 등 교계에서도 손꼽히는 믿음의 집안이다. 염 추기경 4대조인 염석태 공은 충북 진천에서 옹기를 굽는 '사기장골'에 거주, 아내 김 마리아와 함께 수계생활을 하며 박해를 견뎌내다 1850년 5월에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고 김수환 전 추기경과 함께 있는 염수정 추기경(오른쪽).
염 추기경의 모친 또한 염 추기경을 임신한 순간부터 "아들이면 사제가, 딸이면 수녀가 되도록 성모님께 바치겠다"고 남몰래 기도했다고 한다. 가풍과 어머니의 기도 덕분일까. 동성중학교 재학 시절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다 '경향잡지'에 소개된 소신학교 입학 안내문을 본 염 추기경은 사제가 되기로 결심, 성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염 추기경의 학교생활에 대해서는 특별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고등학교 시절 동기생들이 '대침묵' 시간을 어기고 식당에서 먹고 마시다 들통난 순간에도 홀로 대침묵을 지키는 등 원칙만은 지키는 학생이었다고 전해진다.

성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톨릭대학교 신학과와 연구과를 각각 졸업한 염 추기경은 1970년 12월8일 사제품을 받은 뒤 본격적으로 사제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엘리트코스로 착착

1970년 사제품을 받은 염수정 추기경은 이듬해 불광동 성당 보좌신부를 맡았고 1973년부터는 모교인 성신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77년부터 1987년까지 이태원본당, 장위동본당, 영등포본당 주임신부를 거친 염 추기경은 이후 가톨릭대학교 서신교정 사무처장과 서울대교구 15지구장 겸 목동성당 주임신부로 재직하다 2002년 1월 주교로 서품됐다.

주교가 된 이후 염 추기경은 생명위원장, 매스컴위원장 등 서울대교구의 주요직을 거치며 교구의 사정을 익혔다. 그 과정에서 염수정 추기경은 그동안 서울가톨릭청소년회 이사장,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이사장,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이사장, 평화신문ㆍ평화방송 이사장도 지냈다. 그밖에 생명문화운동에도 관심이 많은 염 추기경은 2005년부터 현재까지 고 김수환 추기경의 유지를 잇는 옹기장학회와 재단법인 바보의나눔 이사장도 맡고 있다.

염 추기경의 추기경 서임이 가시화된 것은 2012년 5월 정진석 전 추기경의 뒤를 이어 제14대 서울대교구장 겸 평양교구장 서리에 임명되면서부터다. 229개 성당과 140만명의 신자가 속해있어 가톨릭의 수백개 교구 중에서도 규모 면에서 손꼽히는 서울대교구의 수장으로 선임되며 전세계 천주교 내에서 위상을 확인한 셈이다. 같은 해 6월 착좌식을 가진 염 추기경은 당시 교황이던 베네딕토 13세로부터 직접 견대를 받으며 주목받았다.

보수에서 진보로 돌아설까

염수정 추기경은 교계 내에서도 친화력이 뛰어나고 행동력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주교가 된 이후에도 사제수품 동기인 최창화 몬시뇰 등과 격이 없이 어울리는가 하면, 후배 사제들과도 '카카오톡'을 하며 지내는 것도 염 추기경의 친화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이에 대해 서울대교구 대변인을 맡으며 그동안 염 추기경을 가까이서 보좌해온 허영엽 신부는 "800명 가까운 서울대교구 사제의 이름과 얼굴, 주요 경력을 두루 꿸 정도로 꼼꼼하고 친화력이 좋으신 분"이라 평가했다.

친화력을 토대로 한 행동력은 염 추기경의 최대 업적으로 꼽히는 서소문성지 개발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평소 친분을 유지하던 관할구청장은 물론 서울시의원 및 교수, 건축가 등 100여 명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결국 성지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고 김수환 추기경, 정진석 추기경
원칙을 강조하기에 보수 성향을 띠게 되는 것은 염 추기경이 향후 고쳐나가야 할 바이다. 염 추기경은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2005년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개발을 강도 높게 비판한 바 있다. 2012년 용산참사 유가족들이 구속자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8.15 특별사면 결정을 기다리며 면담을 요청하자 "전임 정진석 교구장이 만나지 않았는데 후임인 내가 만나는 것은 어렵다"는 이유로 거절하기도 했다.

염 추기경의 보수성향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상황은 지난해 말 박창선 전주교구 원로사제의 "이번 대선은 부정선거, 이명박 전 대통령은 구속 수사하고 박근혜 대통령 퇴진하라"는 발언에 대해 "정치구조나 사회생활 조직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교회 사목자가 아닌 평신도의 소명"이라고 발언하며 논란이 된 것이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밀양 송전탑 문제, 용산참사 등의 현장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서온 가톨릭행동은 교황 프란치스코에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될 수 있는 사목자, 어려운 시기의 지도자를 선택해줄 것'을 청원하는 서명운동을 벌인 것이나 결국 서임된 염 추기경의 이후 행보에 대해 우려를 표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염 추기경의 보수 성향에 대해 이견을 표명하고 있다. 한 천주교 서울대교구 관계자는 "염 추기경은 원칙을 강조하긴 하지만 알려진 것만큼 보수적이거나 고루하지는 않다"며 "이제 추기경이 된 만큼 프란치스코 교황의 뜻과 맞춰나가지 않겠냐"고 해석했다. 실제로 최근 이어진 미사들에서 염 추기경은 "세상의 부조리와 불평등을 바꾸는 데 주저하지 말라", "사회에 대한 우리 교회의 책임도 결코 적지 않다" 등 진보적 메시지를 전해 눈길을 끈 바 있다.

막대한 권한 생겨

우리나라 출신의 세 번째 추기경이라는 영예를 안게 된 염수정 추기경은 이번 서임으로 어떤 것들이 바뀔까.

추기경은 가톨릭 교회에서 교황을 보좌하는 최측근 협력자이며 최고위의 성직자를 뜻한다. 염 추기경은 이제 교황이 선임하는 최고 고문으로서 교황청의 각 성성(聖省), 관청의 장관 등의 요직을 맡아보며, 추기경단 특별법에 따라 교황선거권을 포함한 모든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된다. 바티칸의 시민권을 가지며 국제 관례상으로 귀빈급의 의전을 받고 유럽 지역의 천주교계 국가들로부터는 국가 원수 다음 급의 의전을 받게 되는 것이다.

자신만의 문장도 생긴다. 염 추기경의 문장은 'Amen. Veni, Domine Jesu!(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이다. 염 대주교는 사제가 된 이후부터 이 기도문(마라나타)을 사제 생활의 모토로 삼은 바 있다.

● 국내 추기경, 누가 있었나?
故 김수환 추기경 1969년 첫 서임… 정진석 추기경 2006년에



염수정 추기경의 서임으로 고 김수환 추기경과 정진석 추기경 등 전임자들의 걸어온 길까지 덩달아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추기경이라는 영예를 지니고 있는 김 추기경은 한국 천주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을 넘어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남아 있다. 1922년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난 김 추기경은 일본 죠치대학 철학과 유학시절, 조선인임에도 자신을 차별하지 않은 독일인 신부 테오도르 게페르트에게 감명받아 사제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1951년 사제품을 받았고 1956년 독일 뮌스터 대학 유학을 거쳐 1966년 초대 마산교구장에 올랐다. 2년 뒤, 대주교로 승품한 뒤 서울대교구장 겸 평양교구장 서리에 오른 김 추기경은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1969년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서임 당시 추기경 136명 중 최연소여서 전세계적으로도 유명세를 탔다.

김 추기경은 1971년 성탄 자정 미사에서 장기집권으로 향해가는 박정희 정권의 공포 정치를 비판하는 강론을 한 것을 시작으로 유신독재와 싸웠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정권에 맞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권력에 맞서 싸우는 마지막 보루로 명동성당을 지켜내는 등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 2009년 서울성모병원에서 향년 87세로 선종한 김 추기경이 두 눈의 각막을 기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한동안 장기기증 단체가 기증자들로 북적였을 정도로 마지막 순간까지 사회의 모범이 됐다.

우리나라 두번째 추기경인 정 추기경은 1931년 경기도 경성부 수표정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1950년 서울대학교 화공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중퇴, 신학교에 입학했고 1961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1970년 청주교구 제2대 교구장 주교가 됐고, 1998년 서울대교구장이었던 김 추기경의 후임 교구장으로 임명돼 착좌했다. 김 추기경이 서임된 지 37년 만인 지난 2006년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정 추기경은 김 추기경보다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된다. 2010년 4대강 발언이 문제가 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원로 사제들이 추기경의 용퇴를 촉구하는 등 한바탕 홍역을 치른 바 있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