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제 노역'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

2007년 당시 조세포탈과 업무상횡령 등의 혐의로 사전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은 뒤 광주지법을 나서고 있는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은 1990년대 초반부터 그룹 전체가 공중분해되기 전까지 전남지역을 이끌던 대표 기업인이었다. 그러나 모기업인 대주건설이 부도나면서 2010년 그룹 전체가 공중분해됐다. 동시에 허 전 회장의 존재도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그런 허 전 회장의 이름이 다시 회자된 건 일당 5억원의 노역장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허 전 회장이 탈세 등의 혐의로 254억원의 벌금형을 받은 점은 감안하면 49일만 수감되면 모든 빚이 탕감되는 셈이다. 일반인 노역 일당의 1만배에 달한다.

이런 '황제노역'에 국민들은 분노했다. 법조계과 시민단체도 일제히 비판에 나섰다. 여론이 들끓자 사정기관은 노역을 중단하고 수사에 나섰다. 그야말로 벼랑 끝에 몰린 '일당 5억원의 사나이' 허 전 회장. 그의 일대를 짚어봤다.

전남지역 대표 기업인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은 1942년 전라남도 광양에서 현직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주공업고등학교와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다양한 직장생활을 거쳤다. 이후 1981년 대주그룹의 모체인 대주종합건설을 설립하며 본격 사업에 뛰어들었다.

지난 26일 광주 동구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가‘허재호 전 회장 일당 5억원 판결’에 대한 규탄 대회를 하고 있다.
사업은 순조로웠다. IMF 경제위기도 무사히 넘겼다. 1995년 국내 경제 상황이 불투명하다는 판단에서 재무구조를 튼튼히 할 목적으로 광주방송과 '클럽900'골프장을 처분한 게 주효했다. 이때 확보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외환위기 이후인 1999년 허 전 회장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경기가 풀리면서 사업영역을 공격적으로 확장해 나갔다. 2000년 두림제지와 2001년 대한화재를 인수했다. 2005년엔 대한조선도 인수했다. 여기에 때마침 건설경기가 상승하면서 사업은 더욱 번창했다.

대주그룹의 성장세는 놀라웠다. 특히 대주건설은 한때 국내 100대 기업에 선정될 정도였다. 그런 대주그룹에 위기가 찾아온 건 대주건설이 흔들리면서다. 대주건설을 살리기 위해 계열사 전체의 주식을 담보로 제공하는 등 안간힘을 썼으나 결국 2010년 최종부도 처리됐다.

회사에 암운이 드리운 시기에 설상가상으로 허 전 회장의 탈세와 횡령 혐의가 불거졌다. 허 전 회장은 2007년 국세청의 특별세무조사 결과 508억원의 탈세와 회삿돈 100억원을 횡령한 혐의가 드러나 검찰에 기소됐다.

그리고 허 전 회장은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에서 징역 3년과 집행유예 5년에 벌금 508억 원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벌금 508억원을 내지 않을 경우 일당을 2억5,000만원으로 계산해 203일간 노역장 유치하도록 판결했다.

노역장 유치는 벌금이나 과태료를 내지 못한 사람에게 일정 기간 수감 상태로 일을 시키는 처분이다. 벌금형을 선고할 때 피고인의 하루 수입액과 범죄 경중 등을 고려한다. 통상 벌금이 1억원 수준이면 하루 10만원, 500만원 이하면 1만원의 노역금이 선고된다.

이후 2011년 말 광주고등법원에서 열린 2심에서 허 전 회장은 징역 2년6월과 집행유예 4년, 벌금 254억원으로 감형받았다. 논란이 되고 있는 일당 노역비도 5억원도 이때 책정됐다. 결국 49일만 유치장에서 보내면 254억원이 탕감되는 셈이었다.

역대 최고 수준 몸값 챙정

일반인이 벌금형을 받을 경우 노역 일당은 통상 5만원 수준이다. 법원이 허 전 회장에게 일당을 일반인보다 무려 1만배나 높게 계산한 셈이다. 당연히 일반인과 비교해 형평성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판결'이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이유다.

물론 그간 재벌 총수들의 노역 일당은 억대를 넘긴 사례가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실제 권혁 시도상선 회장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각각 3억원과 1억1,000만원의 노역 일당이 책정됐다.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도 1억원 수준에 달했다.

그러나 이와 비교해서도 허 전 회장은 훨씬 높은 '몸값'을 기록했다. 노역 일당 5억원은 지금까지 나온 법원 판결 중 최고 액수다. 이미 기업인으로서 수명이 끝난 허 전 회장의 하루 노역 가치가 일반인의 1만배나 높게 나온 건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처럼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졌지만 벌금형은 판결 이후 2년 넘게 집행되지 않았다. 허 전 회장이 2010년 항소심 재판 선고가 이뤄진 하루 뒤에 뉴질랜드로 출국했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상 도피성 외유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가운데 최근 허 전 회장이 귀국해 구치소에서 노역을 통해 벌금 미납액을 해결하겠다는 입장이 언론을 통해 전달됐다. 그리고 허 전 회장은 지난 3월22일 귀국했다. 그날로 구치소에 수감돼 종이가방에 풀을 붙이는 등의 노역을 하며 하루 5억원씩을 탕감받았다.

허 전 회장의 '황제 노역'은 국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허 전 회장은 '거액의 벌금을 낼 형편이 안 돼 노역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허 전 회장이 뉴질랜드에서 호화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는 평가다.

실제 허 전 회장은 뉴질랜드 오클랜드 시내의 최고급 팬트하우스에 거주하며 현지에서 왕성한 기업활동을 벌이고 있다. 현지 한인 사회에서 그는 부동산 재벌로 통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카지노 VIP존을 출입하며 도박을 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각계각층 비난 줄이어

이를 두고 각계각층의 비판이 이어졌다. 먼저 법조계가 나섰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지난 3월24일 "매일 5억원씩 벌금을 공제받는 건 헌법상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며 "노역장 유치 제도 자체를 개선하는 동시에 향판 제도의 문제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은 "1일 환산액을 2,500만원에서 1억원으로 산정했다면 유치기간이 254일에서 1,016일까지도 가능한 재량범위를 제쳐놓고 50일로 줄인 것은 대표적인 헌법 위반 사유인 자의적 차별"이라고 비판했다.

민변은 이어 "재판 확정 후 벌금을 냈다면 뉴질랜드에서 호화생활을 하고 대주그룹 후신을 현지에서 운영한다는 의혹이 있더라도 시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도피성 출국으로 소나기를 피한 뒤 벌금을 내지 않고 '배째라'는 식으로 버티는 행태에 국민은 분노한다"고 비난했다.

지역 시민단체도 가세했다. 광주시민단체협의회와 광주진보연대는 지난 3월26일 "사법부가 벌금을 대폭 감면하고 사상 최고액인 일당 5억원으로 '황제노역'을 판결했다"며 "이는 법치주의의 기본원칙인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절대적 준칙을 깨뜨린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들 시민단체는 "헌법상 평등의 원칙에 위반되는 양형과 형집행에 대해 사법부를 강력히 규탄한다"며 "노역장 유치제도 자체의 개선작업을 즉각 시작하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모든 편파적 관행을 즉시 개선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광주ㆍ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도 이날 "노역 일당 5억은 국내는 물론 세계에도 전례가 없는 전대미문의 최고금액의 노역장 유치 환산금액"이라며 "허 전 회장이 숨긴 모든 재산을 낱낱이 추적해 환수하고 당시 판결을 내린 장병우 광주지법원장은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여론이 가열되자 결국 검찰도 움직였다. 허 전 회장의 노역장 유치를 중단시키고 해외 재산 조사에 착수한 것이다. 검찰은 허 전 회장의 재산을 파악한 뒤 압류 등 조치를 통해 공매절차를 밟을 수 있는지 여부 등 다양한 방법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법원도 환형유치 제도의 개선에 양팔을 걷어붙였다. 대법원은 전국수석부장회의에서 환형유치 제도의 운영에 관한 적정한 기준 마련에 대해 논의를 거쳐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개선책을 마련할 예정이라는 입장이다.

허 전 회장은 궁지에 몰린 상황이다. 현재 허 전 회장의 벌금은 총 254억원에서 6일치 노역비 30억원이 탕감돼 현재 224억원이 남아 있다. 해외에서 자금이 발견될 경우 이 수준의 벌금이 고스란히 환수될 수밖에 없다. 허 전 회장의 초라한 말년이 점쳐지는 이유다.



송응철기자 sec@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