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내 민주화·달라진 민심으로 '공천=당선' 등식 사라져탈 지역주의 투표땐 한나라·우리당 '양강구도' 전망

깃발정치, 텃밭서 찢기나?
당내 민주화·달라진 민심으로 '공천=당선' 등식 사라져
탈 지역주의 투표땐 한나라·우리당 '양강구도' 전망


3김 시대의 ‘깃발정치’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4ㆍ15 총선을 앞두고 각 당이 ‘물갈이’와 ‘지역구 대이동’열풍에 휩쓸리고, 집권여당의 ‘올인’ 전략에 따라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민련 등 기존 정당의 ‘텃밭’이 무너지고 있다. 이에 따라 특정지역에서 ‘공천=당선’이라는 이른바 ‘막대 정치’ ‘깃발 정치’가 이번 총선에서 종언을 고할 것이라는 성급한 관측마저 나오고 있다. 설연휴 후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 결과 3김의 ‘텃밭’이 돼온 영남·호남·충청 지역 유권자의 60~70%가 “현역의원을 찍지 않겠다”고 밝힌 것도 주목을 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선거전문가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지난해 10월30일 실시된 재보선 결과. 10ㆍ30 재보선은 신 4당체제 출범후 처음 치러진 선거였다. 당시 경남 통영시장 선거, 대구시 광역의원 선거, 광주시 시의원 선거에서는 의외로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고, 충북 음성 군수, 계룡시장, 충남 증평군수 선거에서는 자민련 후보가 2개 지역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통영시장의 경우 열린우리당(이하 우리당)의 지원을 받은 무소속 후보가, 광주에서는 당선된 시의원 2명 모두 우리당 의원 지역구에서 배출됐다는 점에서 10ㆍ30 재보선은 영ㆍ호남의 달라진 민심을 반영했다.

따라서 이번 총선은 10ㆍ30 재보선의 뒤를 이어 3김 정치의 막을 완전히 내리게 하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특히 3김 정치의 폐해가운데 1인 보스정치와 금권 정치는 이미 당내 민주화와 제도적인 규제 등으로 영향력이 상당 부분 감쇄된 상황이어서 지역주의의 향배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와 관련, 한국사회여론연구소 김헌태 소장은 “17대 총선은 전통적 지역주의의 강세 여부에 따라 각 당의 의석수가 결정될 것” 이라며 “‘지역주의 투표’가 불변할 경우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영·호남에서 선전하고 수도권에서는 민주당과 우리당의 표 분산으로 한나라당이 압승하겠지만, ‘탈 지역주의 투표’가 돼 열린우리당이 수도권과 충청권 및 영·호남 일부 의석을 확보하고 한나라당이 영남 연고 및 보수 성향 중심의 고정표를 확보할 경우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양강구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 영·호남, 충청 '텃밭' 균열 조짐

△ 대구 출마를 선언한 조순형 민주당 대표가 대구 두류공원 2·28 기념탑을 참배한 뒤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지역에 기반한 3김식 ‘깃발정치’는 올해 들어 정치권 중진들의 잇따른 불출마 ‘폭탄 선언’과 세대교체를 요구하는 ‘물갈이’ 열풍으로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됐다. 최근 민주당 조순형 대표의 대구 출마 선언은 ‘깃발정치’에 대한 가장 분명한 도전인 셈. 조 대표는 1월19일 민주당 창당 4주년 기념식에서 “(민주당의) 정치적 불모지에 민주당의 깃발을 당당히 꽂을 것이며 ‘생즉사(生卽死)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지역주의 벽을 깨고 반드시 승리하겠다”고 강조했다.

조 대표가 무난히 6선 고지에 오를 서울의 ‘텃밭’ 지역구를 포기하고 적지에 뛰어든 것은 우리당의 ‘올인 전략’과 ‘정동영 효과’로 인해 위기에 빠진 민주당을 구하기 위한 배수진이었다. 하지만 단기필마의 도전이 박정희 전 대통령 이후 지역주의의 아성이 돼온 대구의 민심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여기에 지난해부터 영남을 총선의 승부처로 삼고 ‘올인 전략’에 나선 우리당의 공략으로 한나라당의 ‘텃밭’인 영남은 표의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지난 총선과 마찬가지로 ‘싹쓸이’는 하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도 이 때문이다.

최근 우리당의 정동영 체제 출범 이후 실시한 일부 여론조사에서 대구영남(TK)에서 우리당이 한나라당을 앞선 것으로 나타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노무현 대통령의 복심(腹心)으로 영남지역 총선을 지휘하고 있는 이강철 우리당 영입추진단장은 “TK지역에서 우리당이 1위라는 것은 현실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며 “좋은 인물을 내세울 경우 10석 이상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도 우리당이 장·차관 출신과 지자체장 등 경쟁력 있는 후보를 내세울 경우 한나라당 ‘텃밭’이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한다. 대구 출마가 예상되는 이강철 단장(대구 동구), 윤덕홍 전 교육부총리, 김정호 전 농림차관과 이영탁 국무조정실장(경북 영주), 권기홍 노동장관(경산, 청도) 등이 지역구도를 무너뜨릴 대표적인 주자들로 평가받고 있다.

반면 조 대표의 대구 출마는 시간이 지나면서 신선함이 퇴색하고 오히려 TK의 반 민주당 정서를 자극, 지역감정이 되살아나 한나라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또 TK지역에서 우리당의 지지도가 상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견고한 지역 장벽을 넘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찮다.

▼ PK 한나라 아성 심각한 균열

△ 한나라당 김문수 공천심사위원장이 심사위원들과 공천중간결과와 진행사항을 설명하고 있다. 이종철 기자

부산ㆍ경남(PK)지역에서는 이미 한나라당 아성이 무너진 상태라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한나라당이 ‘차떼기당’으로 낙인찍힌 데다 김혁규 전 경남지사를 포함해 상당수 지자체장이 우리당에 입당하면서 총선 지형을 바꿔놨다는 것이다. 지난해말 국제신문과 부산일보가 부산·울산·경남 지역 유권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결과 우리당이 의석을 확보할 것으로 보는 응답이 각각 88.8%와 66.5%.로 나타났다. 우리당 부산시지부측도 “총선이 다가오면서 ‘노풍’(盧風)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고, 김혁규 전 경남지사가 입당하면서 여론이 확연히 달라졌다”며 “잘하면 40% 이상 당선될 수도 있다”고 자신했다.

부산의 한 중견 언론인은 “선거 지형이 16대와 달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당=노무현당’이라는 인식과 노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지지가 30%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려할 때 대선자금 수사, 지역경제 회복에 대한 노 대통령의 비전, 후보의 경쟁력 여부에 따라 총선 결과가 달라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민주당의 ‘텃밭’인 호남지역도 민주당이 분당되고 우리당이 호남 출신의 정동영 체제로 출범하면서 지각변동이 시작되고 있다. 여기에 호남을 상징하는 한 축인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영향력이 급격히 감소히면서 ‘막대만 꽂으면 된다’는 식의 지역 프리미엄은 더 이상 맥을 못 추고 있는 실정이다.

호남은 전남과 전북, 광주가 지역 내부의 변수들로 균열 각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비교적 민주당 아성이 견고한 전남은 호남의 간판격인 한화갑 전 대표가 지역구(무안 신안)를 포기하고 수도권 출마를 강행하면서 민심의 동요가 눈에 띈다. 특히 ‘물갈이’ 바람이 몰아치면서 그동안 터줏대감 노릇을 해온 중진들이 안절부절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설 연휴 직후 실시한 여론조사결과 호남지역에서 민주당과 우리당은 호각세를 이루거나 일부 지역에서 우리당이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1월24일 KBS-미디어리서치, 1월25일 MBC-코리아리서치 여론조사결과 민주당 대 우리당의 지지율이 각각 30.4% 대 31.3%, 31.4% 대 29.2%로 나타났고, 1월26일 한국일보-미디어리서치 여론조사에선 전남·북에서는 민주당이, 광주에서는 우리당이 각각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 호남지역, 민주ㆍ우리당 호각제

△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이 김혁규(오른쪽) 전 경남지사 등 당직자들과 함께 김해 화훼단지를 방문, 출입구 벽에 꽃을 꽂고 있다.

‘리틀 DJ’로 불리는 한 전 대표가 지역을 떠나고 비록 김홍일 의원이 탈당을 번복했지만 전남에서는 3김 시대 이후 처음으로 민심이 ‘김심’(金心)에서 자유로워졌다는 관측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당 대신 ‘인물 선거’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당 이강철 단장은 “호남은 굉장히 전략적인 사고를 하고 정치의식이 높기 때문에 전국정당이라는 역사적인 대의와 지역 실리를 얻기 위해 여당인 우리당을 선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호남의 중심부인 광주는 예측불허 상황. 우리당 전당대회 이후 일부 여론조사에서 우리당의 지지율이 민주당을 앞선 것으로 드러나면서 양당의 ‘서바이벌 게임’이 치열하다.

전북에서는 ?피? ‘정동영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총선을 4차례 치렀다는 박양수 사무처장은 “정동영 의장이 당 얼굴로 나서고 강현욱 전북지사 등 지자셈葯湧?속속 입당하면서 이곳에서는 90% 이상 승리도 예상한다”고 말했다.

3김 가운데 유일한 현역인 김종필(JP) 자민련 총재가 버티고 있는 충청권은 우리당의 도전이 거세다. 설 연휴 직후 실시한 KBS· MBC·한국일보 여론조사에서 우리당은 당 지지율에서 자민련을 훨씬 앞서 모두 1위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충청권이 더 이상 자민련의 텃밭이 될 수 없음을 예고했고, JP의 영향력은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러나 총선 승리를 향한 각 당의 맹목적 ‘제1당 주의’는 여전히 기존의 ‘깃발’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DJ에 대한 우리당과 민주당의 러브콜, 자민련의 JP 눈치보기, 각 당의 지역맹주 공천 등이 그것이다. ‘깃발’은 4ㆍ15 총선으로 끝날 것인가? 총선을 보는 흥미 있는 관전법의 하나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4-02-03 17:21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