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분사태 수습 가닥최병렬 대표 사퇴 표명으로 일단 봉합, 당권다툼·공천갈등 땐 파국

한나라, 불은 껐지만 불씨는 여전
내분사태 수습 가닥
최병렬 대표 사퇴 표명으로 일단 봉합, 당권다툼·공천갈등 땐 파국


‘이제 좀 정신을 차릴까?’

최근 안팎에서 연이어 터져 나온 대형 악재로 침몰 위기에 몰렸던 한나라당이 간신히 방향 감각을 되찾았다. 선장 격인 최병렬 대표가 장고 끝에 사퇴 의사를 표명함으로써, 격렬한 내분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가닥을 잡았다. 17대 총선을 40여일 앞두고 한나라당은 또 다시 중대 기로에 서게 된 셈이다. 한 당직자는 “바닥을 치고 반등하느냐, 아니면 계속 뒷걸음을 질 것이냐의 갈림길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한나라당이 곧장 정상 궤도를 찾을 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우선 최 대표가 보기에 따라서는 어정쩡한 카드를 제시한 탓에, 내분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불씨가 생겨날 소지가 다분하다. 특히 후임 대표 선출 과정에서 당권싸움으로 난장판을 벌일 개연성도 없지 않다. 불법 대선자금에 대한 검찰수사라는 거대한 외부의 암초도 여전히 엄존하고 있다. 최 대표의 사퇴의사 표명으로 당장의 파국은 모면했다고 볼 수 있지만 당 안팎에 드리워진 어둠의 그림자는 여전히 걷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 최틀러 항복?

2월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 기자실. 당내 각 정파로부터 강력한 사퇴 압력을 받아온 ‘최틀러’(최 대표의 별명)가 2박3일간의 ‘결심 잠행’을 마치고 기자들, 아니 국민들 앞에 섰다. 얼굴에 살이 빠진 것을 느낄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었다. 최 대표로서는 20여년간의 정치인생에서 가장 참담한 시간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후임 대표를 선출하는 전당대회를 열어 새 대표에게 대표직을 이양하고 백의종군 하겠다.” 그 동안 당내 소장ㆍ개혁파 의원들로 구성된 ‘구당모임’을 비롯한 각 정파로부터 강한 퇴진요구를 받아 온 최 대표가 사실상의 ‘항복선언’을 한 것이다.

최 대표가 당내분 수습책으로 ‘전당대회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은 퇴진 요구를 나름대로 수용하면서, 당원 23만명의 직선 대표로서 자존심과 명예를 지키겠다는 포석으로 해석된다. 그가 “최근 당내에서 벌어지는 일의 해결책의 일환으로 이런 얘기(대표직 사퇴)를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못박았듯이, 소장파들의 퇴진 요구에 떠밀려 물러나는 인상을 주지 않겠다는 의미다.

아울러 그는 후임 대표를 선출하는 임시 전대 때까지 공천 작업을 마무리하는 등 최소한의 선에서 당무를 챙긴 뒤 물러나겠다는 의사도 분명히 했다. 이와 관련, 홍사덕 원내총무 등 당3역이 기자회견에 앞서 최 대표를 만나 대표직 즉각 사퇴와 대표 권한의 이양을 요구했으나 최 대표가 이를 거부했다는 후문이다.

20일까지만 해도 퇴진불가 입장을 강하게 시사했던 최 대표가 사퇴 쪽으로 심경을 바꾼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어 보인다. 최 대표 측근들에 따르면, 퇴진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배경은 당의 지지율 급락이었다고 한다. 당 지지도가 지난 대선 당시의 반토막 이하로 추락해 바닥을 기고 있는 상황에서, 당 대표로서 이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얘기다. 임태희 대표 비서실장은 “우세를 낙관한 영남권과 수도권 일부 지역에서조차 열세 현상이 나타나면서 대표가 비상한 방법을 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최 대표로서는 ‘당을 살리기 위한 희생’의 차원에서 불가피하게 사퇴한다는 생각을 했을 법하다. 임 실장은 “최 대표가 (기자회견 전에) ‘뉴 한나라당’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겠다는 뜻을 역설했다”면서 “뉴 한나라당이 된다면 나를 밟고 가도 좋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 이제는 제대로 굴러 갈까

최 대표가 제시한 수습안은 소장파를 비롯한 당내 모든 정파로부터 일단 환영을 받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한시적인 대표직 유지와 공천 문제를 둘러싸고는 정파별로 미묘한 시각차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갈등의 소지가 여전하다는 분석도 있다. 곳곳에 지뢰밭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최 대표가 “공천작업을 마무리한 뒤 새 후보들을 중심으로 전당대회를 열겠다”는 대목과 관련漫??정치적 노림수를 의심하는 기류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이 같은 연장선상에서 최 대표가 내심 권토중래를 염두에 두고, 당장의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매모호하게 임시 방편적인 해법을 내놓았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특히 공천문제는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시한 폭탄이 아닐 수 없다. 공천작업 마무리 과정에서 ‘반최(反崔)’ 진영에 서 있는 의원들이 대거 탈락할 경우 최 대표를 비롯한 주류측과의 극한 대립에 나설 수도 있다. 더욱이 ‘반최’ 진영은 공천과정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내분 수습과정에서 적극적인 목소리를 낼 것이 분명하다.

당의 개혁수위를 놓고도 소장파와 영남권 중진들이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일 게 뻔하다. 영남권 중진들은 “총선을 코앞에 두고 있는 만큼 당을 소폭으로 리모델링 하자”는 분위기인 반면,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들은 당의 환골탈태를 거듭 요구하고 있다. 자칫 양 진영의 세 대결 양상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 구당모임 측은 “당의 틀을 통째로 뜯어고치는 등 전국 정당이라는 추세를 거스른다면 제2의 자민련 꼴이 될 것”이라고 연일 경고음을 보내고 있다.

어쨌든 한나라당은 당장 전당대회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임 실장은 “총선일정 등을 감안하면 후임 대표를 선출하는 임시 전당대회는 3월 15~20일께 공천자대회로 치러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이 변했다’는 제2 창당의 모습을 보여, 총선 이벤트 효과를 극대화하는 무대로 삼겠다는 설명이다.

- 포스트 최’는 누구?

문제는 최 대표의 후임으로 누가 당의 총선 간판으로 나서느냐 하는 점이다. 새로 선출되는 대표는 여권의 ‘올인 전략’에 맞서 당의 명운이 걸린 4ㆍ15총선에서 승리해야 할 책임이 부여된다. 게다가 당헌에 따라 최 대표의 잔여임기만 맡게 돼, 총선 후 전당대회(6월15일 이전) 때까지 90여일 밖에 안 되는 최단명 과도 대표이다. 그만큼 부담이 많은 대표직이다.

이런 가운데 당내에서는 한나라당을 구할 대표 주자로 박근혜 의원이 급부상하고 있다. 박 의원은 내홍이 불거졌을 때부터 초ㆍ재선, 중진, 영남ㆍ충청권 의원 등 당내 여러 그룹으로부터 ‘총선용으로 무난한 얼굴’이라는 평가를 골고루 받아왔다. 차기 대권 주자군에 속하는 강재섭 의원과 이명박 서울시장, 손학규 경기지사 등은 일찌감치 뜻을 접었다.

박 의원이 최 대표의 대안으로 집중 거론되는 것은, 한나라당의 전통적인 지지층인 보수 성향의 유권자를 결집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게다가 그가 비교적 깨끗하고 개혁적인 노선을 걸어온 데다 52세의 젊은 여성 야당 대표라는 상품성이 한나라당의 노쇠한 이미지를 바꿀 수 있다는 점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박 의원은 “내가 희생해야 한다면 희생할 것”이라고 밝혀 대표직을 맡을 뜻이 있음을 시사했다.

이와 별도로 일부 소장파들은 지난달 총선 불출마 선언으로 신선한 충격을 던진 오세훈 의원 징발론을 편다. 원희룡 의원은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살아 남으려면 오 의원과 같은 깨끗한 이미지의 인물이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오 의원은 “정치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한 내가 선대위원장을 맡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손사래를 치고 있다.

한 당직자는 후임 대표 문제와 관련, “최 대표가 물러난다고 해서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가 살아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면서 “국민이 원하는 철저한 자기반성과 환골탈태의 변화 노력이 있어야 하는 데 잘 될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총선을 코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전당대회가 당권싸움으로 얼룩지고 공천갈등이 심화하면 한나라당은 회복불능의 수렁으로 빠질 수 있다는 우려이다.

김성호기자


입력시간 : 2004-02-24 21:44


김성호기자 shki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