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쟁정치로 치닫는 17대 국회, 여야 사사건건 발목잡기

여의도에 상생은 없다
상쟁정치로 치닫는 17대 국회, 여야 사사건건 발목잡기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이 친일반민족 특별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 이종철 기자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 했으나 이제 지키지 못하겠다. 개인적으로 천정배 원내대표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존경할 게 하나도 없는 협상의 기계적 카운터파트로만 생각할 것이다. 여야간 협상은 앞으로 지극히 난관에 빠지고 상생의 정치는 어려워질 것이다.”

17대 개원국회 마감을 하루 앞둔 7월 14일 한나라당 남경필 원내수석부대표는 기자들 앞에서 본격적인 ‘상쟁(相爭)’을 예감케 하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 같은 분위기는 열린우리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목희 의원은 의원 총회에서 “야당의 당리당략도 대화와 타협을 할 수 있지만 국민과 국가를 위한 일을 못하도록 한다면 상생은 없다”면서 “한나라당이 몰상식한 태도를 견지한다면 우리당은 앞만 보고 원칙과 정도를 지켜야 한다”고 지도부에 주문했다. 모두 예결특위의 일반상임위화 문제를 둘러싸고 나온 말들이었다.

여야간 개원협상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이 문제는 지난한 협상에도 한치의 접점을 찾지 못한 채 개원국회 마지막 날 여야간 표 대결 직전까지 치달았다. 한나라당은 예결위의 상임위화는 거여(巨與) 견제를 위한 필수 장치로, 7월15일까지로 시한을 정한 약속을 열린우리당이 깼다고 주장했다. 반면 열린우리당은 그런 약속은 한 적이 없으며, 정부의 고유 권한인 재정 편성권을 장악하려는 한나라당의 권력분점 야욕이라고 비난했다. 세간에 정치싸움으로 비쳐지자 여야는 “표 대결이라도 하자”는 당내 요구를 간신히 무마시키고 9월 초 정기국회로 공을 다시 넘겼지만 타협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지난 5월 초, 당시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맺은 ‘상생 협약’은 효력의 지속성에 대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개원협상과 첫 국회를 관통한 여야간의 금도였다. 그러나 2개월을 채 못 가 폭발하는 바람에 상생이란 말은 이제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옭아매기 위한 상쟁의 수사(修辭)로 활용될 뿐이다. 더욱이 전운은 다른 여러 곳에서 감지되기에 봉합의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인다.


- 행정수도 이전 문제 등 무한의 정치싸움

행정수도 이전 논란도 그 중심에 있다.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은 이 문제에 관한 한 “행정수도 이전 반대는 대통령 퇴진운동”이라며 한나라당과 조선, 동아일보를 적으로 상정한지 오래다. 한나라당은 명확한 입장 부재라는 여론의 질타에도 행정수도 이전 강행을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오기의 정치”로 보는 시각에서 한치의 물러섬이 없다. 끝내 노 대통령은 “싸울 수밖에 없는 조건이 만들어져 있는데 서로 만족하고 협력하라고 할 수는 없다”고 직접 전황을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이 논란이 적어도 2007년 대통령 선거까지 이어지리라는 관측에선 이견이 없다. 문제는 정책적 ‘갑론을박’보다는 양측의 무한 정치싸움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최근 청와대 홈페이지에 게재된 ‘박근혜 패러디’ 사건에서 분명하게 입증된다. 행정수도 이전 문제에 대해 일부 언론과 한나라당의 ‘부적절한 동거’를 묘사한 이 저급한 패러디물은 행정수도 이전 논란이 얼마나 다양하고 돌출적인 정치적 사태를 야기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줬다.

청와대는 안영배 국정홍보비서관과 업무처리 실무자를 직위해제하는 조치를 단행함으로써 이번 사태를 매듭지었으나, 한나라당은 거듭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등 수긍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렇듯 행정수도 이전 논란은 당장의 갑론을박은 물론이고 정책추진의 단계마다 양측의 사활을 건 싸움이 벌어질 게 불보듯 훤하다.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들 모임 소속 국회의원들이 국회 귀빈식당에서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 개정안을 공동 발의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이종철 기자

7월 14일 열린우리당의 주도하에 국회에 제출된 친일진상규명특별법 개정안도 여야간 첨예한 ‘상쟁’이 불가피한 현안이다. 무엇보다 개정안이 친일 대상자의 적용범위를 크게 확대, 박근혜 대표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창업주도 포함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군인의 경우 조사대상을 ‘중좌’ 이상에서 ‘소위’ 이상으로 강화시킨 대목을 두고 한나라당은 일본군 중위 출신인 박 전 대통령을 포함시키려는 정략적 의도가 깔린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이와 함께 한나라당은 개정안의 발의 시점이 한나라당 전당대회를 전후해 2기 박근혜 대표체제가 출범하는 때와 맞물린 점에서 시기상의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 청와대 홈페이지 패러디 사건, 친일규명법 발의 등이 여권의 ‘박근혜 때리기’를 위한 계획된 프로그램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 정책 입법 놓고 극단적 정치공방 예고

물론 열린우리당은 적극 반박한다. 김희선 의원은 친일규명법은 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 박정희 전대통령을 겨냥한 게 결코 아니기 때문에 한나라당의 접근이 오히려 정략적”이라고 비판했다. 여권은 또 “16대에서 친일규명법이 누더기가 되기 전 시민단체가 만든 원안은 조사대상을 소위 이상으로 규정했던 만큼 개정안에선 그 취지를 살리자는 차원이지 특정인과 특정 언론을 끼워 넣으려는 게 아니다”고 반박했다. 다만 신기남 의장이 개원국회를 평가하면서 “반부패입법에 대한 로드맵을 제시하고 친일규명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다”고 말한 대목에서 엿볼 수 있듯, 여권은 국민적 다수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한 이 문제를 지지율 반등의 계기로 기대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여권의 법안 처리 목표시점인 9월 정기국회까지 여야의 극한 대립이 불가피하다.

어렵사리 개원국회를 마친 국회는 일단 휴지기에 접어들었지만, 향후 정치일정은 사안마다 본격적인 상쟁정국을 예고하고 있다. 당장 7월 20일께 시작되는 김선일씨 피살사건 국정조사는 외교정책라인의 무능과 정권차원의 음모론을 집요하게 추궁할 한나라당의 대대적 공세가 예정돼 있다. 여권은 언론개혁법안, 국가보안법 개폐 논의를 화두로 부각시키며 한나라당의 약점을 파고들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과정에서 정책적 본질과는 동떨어진 양측의 극단적 정치공방은 티끌만한 계기만으로도 폭발할 개연성이 대단히 크다. 위태로운 과반의 열린우리당과 권력 소외감이 팽배한 한나라당이 대치한 17대 국회의 기본적인 정치지형도를 보면 ‘상생’은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임경구 프레시안 기자


입력시간 : 2004-07-21 13:31


임경구 프레시안 기자 hifidelit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