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국보법 폐지' 주창에 박근혜 대표 '수호' 올인국보법 전선확대는 정국주도권·2007 대선지형 선점 포석

盧·朴, 사상전선서 맞짱 뜨다
노무현 대통령 '국보법 폐지' 주창에 박근혜 대표 '수호' 올인
국보법 전선확대는 정국주도권·2007 대선지형 선점 포석


노무현대통령이 MBC<시사메거진 2580> 500회 특집기념 대담을 하고 있다.

이번엔 국가보안법(이하 국보법)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맞붙은 새 ‘전면전’의 테마다. 두 수장의 ‘맞짱’에 정기 국회는 빛을 발하고 일시에 ‘국보법 정국’로 급변했다.

전선의 화두는 노 대통령이 먼저 꺼냈다. 지난 9월 5일, 노 대통령은 MBC ‘ 시사매거진 2580’의 500회 특집 기념 대담에서 “ 국가보안법을 너무 법리적으로 볼 게 아니라 역사의 결단으로 봐야 한다”며 “ 독재 시대의 낡은 유물인 보안법은 폐기하는 게 좋겠다”고 밝혔다.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국보법 폐지를 주창한 ‘일대 사건'을 으킨 것이다.

시발탄의 파장이 컸던 만큼 박근혜 대표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염창동 당사에서 특별 기자 회견을 갖기 전날인 8일 밤, 박 대표는 ‘모든 것 건다’는 문구를 놓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한 측근이 ‘최병렬식 도박’이라며 삭제를 건의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다음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지키는 마지막 안전 장치인 국보법을 폐지하는 것은 저의 모든 것을 걸고 막아 내겠다"며 국보법 수호에 대표직은 물론 정치 생명까지 걸겠다는 결연함을 보였다. 이후 여권과 한나라당은 국보법 존폐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고 상생과 민생국회는 무대뒤로 밀려났다.

노 대통령과 박 대표의 정면 대결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신호탄은 박 대표가 7월 19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명실상부한 수장이 되고 나서 이틀만에 ‘국가 정체성’ 문제를 내세워 대여 전면전을 선포하면서 쏘아 올려졌다. 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NLL) 월선과 군의 허위보고, 의문사위 논란, 친일진상규명법 개정 등 현안과 관련, “정부가 국가 정체성을 흔드는 상황이 계속되면 전면전을 선포해야 할 시기가 올 것”이라며 노 대통령과 현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했던 것.

그러자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의 산발적인 대응을 제껴두고 직접 나서서 박 대표를 겨냥했다. 노 대통령은 제 59주년 광복절 기념 경축식에서 축사를 통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분열과 반목은 굴절된 역사에서 비롯됐으며,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면서 “반민족 친일 행위만이 아니라 과거 국가 권력이 저지른 인권 침해와 불법 행위에 대한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의혹과 유신시대의 부담을 안고 있는 박 대표를 압박했다.


- 여야 대치정국, 전면전으로 확전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당직자들이 국가수호비상대책위원회 현판식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 이종철 기자

노무현 - 박근혜의 대립은 곧 바로 여야의 대치 정국을 불러와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정책 대결은 온 데 간 데 없고 ‘ 사상전’이 전선을 지배하는 가운데 주력군은 올인(all-in)적 습성을 띤 야전군으로 변신, 비등점을 향해 치달았다. 이번 노 대통령과 박 대표의 국보법 시비는 앞서의 ‘정체성’과 ‘과거사’ 전쟁의 연장선에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이 9월 5일 ‘국보법 정국’의 단초를 연 데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당시 국보법에 대해서는 폐지보다 개정 여론이 높았고,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개정론이 힘을 얻어 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노 대통령을 잘 아는 측근 인사들은 “바로 이점이 노무현 다운 면”이라고 말한다.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한 386 초선 의원은 “위기 때 노 대통령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면서 “국보법 폐지 언급은 시기적절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노 대통령의 국보법 폐지 주장은 단순히 국보법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나아가 미래(2007년 대선)의 정국 지형을 선점해 가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설명이다. 즉 정국을 여권이 주도해 궁극적으로 재집권을 위한 기반을 마련해 간다는 구상의 일부라는 것이다.

실제로 노 대통령이 국보법 폐지를 주장한 시점은 여권이 여론과 ‘사상전’에서 야당에 밀리고 열린우리당조차 국보법 문제에서 중심을 잡지 못해 정국의 주도권이 야당쪽으로 기울던 상황이었다. 먼저 헌법재판소가 8월 26일 국보법의 대표적 독소 조항인 제7조 1항(찬양ㆍ고무죄)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어 9월 2일 대법원 1부(주심 이영우 대법관)가 ‘찬양ㆍ고무죄와 이적표현물 소지’ 등으로 기소된 한총련 대의원 2명에 대한 상고를 기각하고 징역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 것은 정치권과 여론에 국보법 존치론자들에 결정적으로 힘을 실어 주었다.

개혁 입법의 상징성을 띤 국보법 폐지의 좌절은 곧 참여 정부의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선 배경이 되기도 한다. 또 다른 일각에선 노 대통령이 국보법 폐지 발언을 한 데에 국보법 논란이 비등한 8월말께 노 대통령과 그의 정신적 사부인 송기인 신부와의 청와대 오찬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있다. 송 신부는 1981년 최대의 국가보안법 사건인 부림(釜林)사건을 당시 조세전문 변호사였던 노 대통령에게 의뢰, 노 대통령이 세상에 눈을 떠 인권 변호사의 길로 들어서게 하고 이후 정치에 입문해 대통령에 이르게 한 장본인.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송 신부는 2시간에 걸친 노 대통령과 오찬에서 정치 개혁쪽 얘기를 많이 하고 ‘시대 정신’을 강조했다고 하는데 두 사람을 잘 아는 한 인사는 “ 오찬 만남이 이었다면 노 대통령이 국보법 폐지 발언을 강행하는데 적지않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 與 전열정비, 野는 신무기 부재로 고민

정가에서는 노 대통령의 국보법 폐지 발언 이후 여야 간에 개혁 입법을 비롯해 정치 현안을 놓고 그야말로 ‘전면전’이 전개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노 대통령이 국보법을 개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을 수 있었음에도 한나라당과 보수 진영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폐기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은 전면전을 위한 전열정비이면서 동시에 향후 국정 운영의 방향을 암시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노 대통령의 핵심 참모인 이광재 의원은 “노 대통령의 국보법 폐지 발언으로 그 동안 흐릿했던 여야 대치 전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면서 "여권은 앞으로 개혁의 힘과 실체를 확실히 보여주는 국정 운영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고 말해 그 같은 전망을 뒷받침했다.

정가에서는 노 대통령이 6ㆍ30 개각에서 개혁성이 강한 이해찬 의원을 총리로 임명한 것을 ‘강행 국정’의 확실한 징표로 보고 있다. 그 동안 노 대통령을 대신해 대야 공격에 앞장섰던 이 총리는 지난 8월 24일 이부영 열린우리당 의장과의 오찬 자리에서 국보법 개정쪽으로 가닥을 잡았다가 노 대통령의 폐지 발언 이후 정부를 대변하는 폐지론자로 돌변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 보안법 문제는 대통령이 입장을 밝혔는데 이것이 정부의 입장이다”는 말로, 김근태 복지부 장관은 박 대표의 노 대통령에 대한 국보법 폐지 발언 철회 요구에 대해 “역사인식의 난센스”라는 비판으로 노 대통령의 뒤를 따랐다. 열린우리당도 안영근ㆍ유재건 의원 등 국보법 개정파 의원들이 개정론을 철회하고 대체 입법을 수용하겠다고 물러섬에 따라 ‘국보법 폐지’는 당론으로 확정됐다. 한마디로 여권 당ㆍ정ㆍ청이 노 대통령의 국보법 폐지 발언을 계기로 대야 전선을 빠르게 정비한 것이다.

비상시국선언에 참석한 각계원로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있다. 왼쪽부터 유치송, 이철승씨와 강영훈, 현승종, 이영덕 전총리. / 고영권 기자

이에 반해 한나라당은 박 대표가 국보법 수호를 위해 ‘올인’ 승부에 나선 가운데 외견상 대여투쟁에 일사분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 대표에 줄곧 각을 세워왔던 영남 중진들이 국보법 수호에 앞장서는 것이나 비주류의 목소리가 잦아든 것은 두드러진 변화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여론조사기관인 TNS에 의뢰, 전국의 성인남녀 700명을 대상으로 9월 8일 실시한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국보법 중 문제있는 조항만 개정하자는 한나라당 주장에 공감한다’는 응답이 61.1%로 나타나는 등 여론도 우호적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대여 전선은 여권만큼 견고하지 못하다. 배일도 의원은 유일하게 열린우리당 국보법 폐지 서명운동에 동참한 상태고, 이재오, 김문수, 박계동, 고진화 의원 등은 기본적으로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재오 의원은 “ 국보법이 한 시대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結逾?만큼, 폐지하고 대체 입법을 하거나 시대 흐름에 맞게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고진화 의원은 “국보법은 폐지하고 우려되는 일부 조항은 형법을 보완하는 게 타당하다”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거대 여권에 맞설 수 있는 현대식 무기, 즉 ‘대여(對與) 콘텐츠’가 부족한 게 한나라당의 치명적인 약점이란 분석이다. 특히 대여 전선의 선봉에 나선 박 대표가 높은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여권에 타격을 줄 ‘새로운 무기’가 없고, 투쟁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같은 당의 한 재선 의원은 “ 행정 수도 이전이나 과거사 청산, 국보법 폐지 논란에 이르기까지 박 대표가 주도적으로 이슈를 선점한 적이 없다”면서 “먼저 문제 제기를 했던 ‘정체성’ 시비에서도 구체적 내용이 모호해 당에선 전략을 세우지 못하고 국민의 지지도 얻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수도권의 한 중진은 “당이 박 대표 개인의 인기에만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면서 “과거 이회창 총재 때처럼 언로가 막히고 박 대표만 독주하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 정가, 여권 재집권 프로젝트 연계 해석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한귀영 실장은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도가 30%미만으로 답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그 동안 주도적으로 이슈를 제공하지 못해 지지층 공략에 실패했기 때문”이라면서 “과거사 정국이나 국보법 정국에서 여권의 지지 세력은 결집하는데 반해 한나라당은 자기 판으로 이끌지 못해 보수 지지층을 제대로 결집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정가에서는 노 대통령이 잇달아 제기하는 과거사ㆍ국보법 폐지 발언이 정국 지형에 미치는 파장을 주목, 여권의 재집권 프로그램과 연계 해석하기도 한다. 한나라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의 부소장을 맡고 있는 박형준 의원은 “노 대통령의 과거사ㆍ국보법 발언은 재집권을 위한 중장기 플랜에 따라 이뤄지는 측면이 있다”면서 “장기 전략을 연구하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노무현식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진군의 나팔이 우렁찬 가운데 과연 한나라당이 어떻게 대응해 나올 지 귀추가 주목되는 요즘이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4-09-15 16:07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