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팡질팡 행보로 신뢰 상실, 이명박 승부수로 위기 가속화 전망

밑천 드러난 박근혜 리더십
갈팡질팡 행보로 신뢰 상실, 이명박 승부수로 위기 가속화 전망

상종가를 구가하던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취임 이후 최대의 ‘리더십 위기’에 봉착했다. 정치권 양대 현안인 행정수도 이전 문제와 국가보안법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실패한 결과다. ‘밑천’이 드러났다는 말이 당 안팎에 나돈다. “내가 얼굴 마담이냐”(9월23일 기자 간담회)며 리더십 부재를 파고 드는 비토 세력에 일침을 놨지만, 평소의 그답지 않은 직설 화법은 오히려 흔들림의 징후로 여겨졌다.

위기는 국가보안법 문제에 대한 박 대표의 갈팡질팡한 입장이 자초했다. “체제를 지키는데 지장이 없다면, 정부 참칭 조항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보법 명칭도 바꿀 수 있다”(9월20일 동아일보 인터뷰)던 박 대표의 입장은 단 이틀 만에 “폐지는 안되고, 개정은 논의할 수 있다”로 멀찍이 후퇴했다.

후퇴의 과정에는 이회창 전 총재가 큰 작용을 했다. 그는 “국가보안법은 아직 폐기할 때가 아니다. 한나라당 의원 121명 전원이 의원직을 사퇴한다는 결연한 의지를 지녀야 한다”고 주문했고, 영남권 보수파와 비주류의 전폭적인 호응을 얻었다.

이들의 비토에 지도부와 주류측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보수파의 반발이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에서 대표가 사전 조율도 없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개인 견해를 불쑥 꺼내든 데 대한 난감함만 엿보였다. 상임중앙위원, 주요 당직자들에게서조차 “도대체 박 대표가 누구하고 의논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불만이 나왔다. 결국 비주류의 공세와 주류측의 수수방관 속에 한나라당은 정국 주도권은 물론 국민적 신뢰마저 상실하는 결과를 맞았다. 화살은 이를 자초한 박 대표에게 집중적으로 꽂혔다.


- 잠룡 3인방 회동, 세 갈래 길 확인

박 대표의 입장에서 답이 안나오기는 행정수도 이전 문제가 더 심각해 보인다. 10월1일, 박 대표는 이명박 서울시장, 손학규 경기지사, 안상수 인천시장 등 수도권단체장 3인방을 국회로 불러 모았다. 행정수도 이전 문제로 불거진 ‘갈등설’을 진화하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1시간에 걸친 비공개 회동 후 전여옥 대변인은 “박 대표는 (당 정책위의 방안인)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천도(遷都) 반대 ▲지역균형과 지방분권 대책 마련 ▲충청도를 위한 대책 마련 등을 당의 입장으로 제시했고, 세 단체장도 동의했다”고 간략히 전했다. 요컨대 ‘갈등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 대변인의 전언은 얼마 못 가 효력을 상실했다. 이 시장과 손 지사의 얘기는 사뭇 달랐다. 이 시장은 “정책위가 마련한 충청권 행정특별시 대안은 국가 경영의 이중화를 초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박 대표의 ‘절충안’을 거부했다. 이 시장은 “충청권 표만 의식해 임시 방편적인 정책을 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당에 전했다”고 덧붙였다.

손 지사측도 “국민에게 수도이전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대안을 찾다가 당론 자체가 흐지부지 돼선 안된다”고 선을 그었다. 결국 이날 잠룡 3인방의 회동은 ‘천도 수준의 이전 반대’라는 총론만 확인했을 뿐, 박 대표는 충청권을 달랠만한 ‘대안’에, 이 시장은 ‘무조건 반대’에, 손 지사는 ‘국민투표’에 방점을 찍고 각자 갈 길을 간 꼴이 됐다.


- 승부 거는 이명박 시장

주목할 대목은 박 대표의 리더십 위기를 파고 드는 이 시장의 행보다. 박 대표가 수도 이전 문제에서 ‘어정쩡한’ 태도로 일관하는 사이, 구도는 어느새 ‘노무현 대 이명박’ 대결로 좁혀졌다. 이 시장은 여권이 국정감사에서 벼르고 있는 ‘관제 데모’ 집중포화도 오히려 반전의 기회로 삼을 듯한 태세다. 그는 “국정 감사 출연 요청이 쇄도하고 있는 만큼 (수도이전 반대) 의견을 제대로 피력하겠다”고 정면 돌파를 선언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수도권 시도지사 간담회에서 손학규 경기지사, 김덕룡 원내대표, 이명박 서울시장, 안상수 인천시장(왼쪽부터)과 손을 잡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종원 기자

이 시장의 강경론은 각종 여론 조사에서 수도권 민심이 압도적인 수도 이전 반대 여론으로 나타난 객관적 지표에 근거해 “승부를 걸어도 된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노 대통령과의 수도 이전 승부인 동시에 박 대표와의 대권 경쟁 승부다. 전자가 대중 교통 체계 문제로 실추됐던 자신의 대중적 정치력을 회복하기 위함이라면, 후자는 총선 이후 지속돼 온 박근혜 독주 구도를 일거에 제압할 ‘내부용’이다.

이 시장이 던진 승부수의 성패를 떠나, 그가 정치 무대의 중앙에 등장한 자체로 박 대표의 리더십 위기는 가속화될 공산이 크다. 여권이 “지금 한나라당은 이명박 - 박근혜의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고 긁어 대는 노림수도 이와 무관치 않다.

따라서 박 대표로서는 대표 취임 이후 3개월이 지나는 동안 당내 어떤 세력도 우군화 시키지 못한 지지기반의 취약을 극복하는 게 우선과제다. 승승장구할 때만해도 ‘고독한 카리스마’로 평가됐던 박 대표의 리더십은 벌써부터 ‘전략 부재’, ‘대안 부재’, ‘포용력 부재’ 등 야당 지도자에겐 치명적 결함으로 뒤바뀌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더십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박 대표는 자신의 참 뜻을 몰라주는 의원들에게 상당한 야속함을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렇다면 계보 정치를 하라는 것이냐”는 식으로 반박한다. 또는 “정치 문화를 바꾸는 과정이다.

대표 눈에 잘 보여 공천 받는 것도 아니고, 대표가 돈이 많아 나눠주는 것도 아니다. 누구 눈치 보는 시대가 아니다”고 말한다. 지당한 말이지만 당내 반응은 시큰둥하다. 한 상임중앙위원은 “박 대표가 문제의 본질을 비껴가고 있다. 계보 정치를 하라는 게 아니고 구멍 난 당내 의사 결정 시스템을 재구축하라는 것이다”고 지적했다.


- 박대표, 이미지 쇄신에 안간힘

물론 박 대표의 태도에도 변화는 엿보인다. 추석 연휴부터 영남권 의원들을 시작으로 당 소속 의원들과의 집단 만남을 시작했다. 기자들과의 간담회도 월 1~2차례 정례화했다. ‘스킨십 부족’이라는 당내 눈총을 극복하고, 언론과의 상호 소통을 일상화시켜 ‘돌출적’ 발언도 자제하겠다는 뜻이다. 자신의 리더십 위기를 현실로 느끼고 있다는 징표이기는 하지만, 국보법과 행정 수도 이전이라는 샌드위치 압박에 대한 명쾌한 해답으로 이어질 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임경구 프레시안 기자


입력시간 : 2004-10-06 14:52


임경구 프레시안 기자 hifidelit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