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택개방 등 달라진 정치스타일, 차기 대권 위한 '본격 행보' 관측

박근혜식 '스킨십' 정치실험
자택개방 등 달라진 정치스타일, 차기 대권 위한 '본격 행보' 관측

11월 22일 저녁,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2층 양옥주택이 문을 활짝 열고 오랜만에 손님들을 맞았다. 회색 투피스와 검은색 티셔츠 차림의 여주인은 “어서 오세요”라며 반갑게 손님들을 맞아들였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였다.

한 켠에 감나무가 서 있고 잔디가 깔린 조그만 정원을 낀 대지 120평, 건평 60평의 양옥 주택은 1970년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거실에는 고 육영수 여사의 흑백 사진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린 유화가 걸려 있었다. 육 여사가 놓았다는 무궁화 자수도 호기심 어린 눈빛의 손님들을 맞이했다.

2층에 놓인 스타인웨이 앤드 선스(Steinway & Sons) 피아노는 30년도 넘은 낡은 것이었으나 박 대표는 오랜 친구에게 다가가듯 앉아 ‘꽃노래’란 외국 연주곡의 앞부분을 연주해보였다. 지금까지 그곳은 ‘금남의 집’이자 굳게 닫힌 고성(古城)이었다. 98년 국회의원이 된 박 대표는 2002년 1월 기자들을 상대로 딱 한번 자택을 개방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엔 진영 비서실장조차 자택을 가본 적이 없었다. 지난 3월 박 대표가 한나라당 대표로 취임한 직후 4월 총선에서 비례대표 공천을 바라는 정치 지망생들이 물어 물어 자택을 찾았다가 굳게 닫힌 대문 앞에서 헛물만 켜고 돌아간 일도 있었다.

• 자택서 연쇄 만찬회동
그런 박 대표 자택의 문이 11월 14일 주요 당직자들에게 열리더니 17일(당 출입 지방기자단) 18일(당 출입 사진기자단) 21일(정조위원장 등 당직자) 22일(당 출입기자단) 연쇄 만찬 회동으로 활짝 열렸다. 집안으로 들어간 손님은 각기 달랐지만 만찬 분위기도 하나같이 화기애애했다고 한다. 혹자는 “고성에 살던 공주가 직접 문을 열고 나와 손님들을 불러들였다”고도 표현했다.

그간 우리 정치판에서 익숙한 풍경 하나는 거물급 정치인의 자택이 당직자는 물론이고, 기자들에게 거의 24시간 개방돼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안방정치’다.

하지만 박 대표는 그렇지 못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당내에서 “스킨십 좀 하세요”라고 지적하면 박 대표는 이렇게 받았었다. “제가 언제 안 만난 적 있나요. 언제든 (당사 대표실로) 찾아오세요.” 여성이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박 대표만큼 인간적 궁금증이 많은 정치인도 드물 것이다. 대표 취임후 “자문그룹이 누구인가”가 정치권 안팎의 최고 관심사지만 여전히 비밀이다.

측근들은 “가끔 전화하고 상의하는 분들은 있지만 그 쪽이나 대표님이 밝혀지기를 원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진 대중 정치인이다. 그는 항상 단정하고 원칙적이다. “얼굴엔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쉽게 접근하기엔 어려움이 느껴진다”고 동료의원들은 토로하곤 한다.

일정한 선을 그어놓고 그 이상으론 범접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공과 사의 구분도 분명하다. 정치입문 이후 그를 ‘그림자’ 수행해온 안봉근 비서관에게조차 그는 말을 놓지 않는다. 그를 부를 때 가장 하대(下待)가 “저기요”다. 측근들은 박 대표의 인간관계 형성 방식에 대해 “오랜 기간 관찰해 보고서야 신뢰를 준다”고 말한다.

현재 당내에서 그 선을 넘은 의원들은 손에 꼽힐 정도라고 한다. 이렇다 보니 아무리 넉살 좋은 의원들이라 해도 박 대표 옆에 서기가 힘들었다. “언제든 찾아오세요”라고 했지만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던 게다.

하지만 어느 순간엔가 사정이 달라졌다. 자택개방 만이 아니라 최근 들어 박 대표는 예정 없이 의원회관으로 의원들을 찾아가는 일이 잦아졌다. 선수(選數)별, 각종 모임별로 의원들과 잦은 점심ㆍ저녁 자리를 가지면서 ‘식사정치’란 말도 나왔다. 일련의 흐름은 박대표의 스킨십 정치가 본격 시작됐음을 알리고 있다.

• 당 안팎 상황에 따른 변화

박 대표에게 ‘스킨십’은 한나라당의 수장이 된 이후 당 안팎의 꾸준한 요구 사항이었다. 그래서 늦은 감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왜 지금 ‘스킨십 정치’인가. 추석연휴 전후의 9월 상황을 복기해 보자. 당시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와 행정수도 이전 대안 당론 결정을 놓고 한나라당은 상당히 어수선했다. 박 대표, 김덕룡 원내대표, 소장파 들로 꾸려진 한나라당의 주류는 심하게 흔들렸다.

분권과 역할 분담을 통해 당을 이끌겠다고 박 대표는 공언해 왔지만 주류 내부는 손발이 맞지 않았다. 김 원내대표는 팔짱을 끼고 있었고 소장파는 다른 소리를 해댔다. 결국 비주류 보수파들의 공격 과녁은 항상 박 대표였다. 박 대표는 기자들과의 오찬자리에서 당시의 심정을 절절히 대변하는 한마디를 던졌다. “나는 얼굴마담이 아니다.”(9월 23일)

하지만 이후에도 사정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국회 대정부 질문 과정에서 이해찬 총리의 한나라당 모독 발언을 원내대표단이 미숙하게 대응, 또다시 보수파들의 강한 반발을 불렀다. 원희룡 의원으로 대표되는 소장파도 계속 엇나가기 시작했다. 박 대표의 리더십 위기를 거론하는 목소리는 계속 고조됐다. 박 대표로선 ‘더 이상 놔둘 수 없다.

내가 직접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음 직하다. 차기 대권과 연관지은 해석도 당 안팎에선 풍성하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행정수도 건설 특별법 위헌 판결 이후 대중적 지지도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강력한 대권 도전자로 떠올랐다. 손학규 경기지사의 행보도 빨라지고 있다. 이회창 전 총재도 최근 개인 사무실을 따로 내는 등 부활의 사인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당 안팎에서 강재섭 의원 등 군소후보들의 “나도 있다”는 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당 안팎의 상황이 이젠 박 대표가 직접 나서 의원들을 다독이고 챙겨야 할 상황이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 '깊이'에선 별다른 변화 못느껴
하지만 그의 스킨십 정치는 여전히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자택에서 밥을 먹고 나온 한 의원이 내뱉은 “밥만 먹으면 뭐하냐”는 말에 그 한계가 함축돼 있다.

의원들과의 접촉면은 상대적으로 넓어 졌지만 깊이에선 별다른 변화가 없다는 얘기다. 이것은 그의 정치관과 연관된 문제이기도 한다. 그는 기존 정치인과 달리 “돈과 계보의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해 왔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기존 정치판의 ‘스킨십’이 사실 인간적인 살가움의 문제가 아니라 돈으로 내 사람을 만들어 공천을 챙겨주면 복종으로 화답하는 계보정치를 의미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박 대표는 앞으로도 그런 정치를 할 뜻이 없어 보인다. “내 원칙대로 가니 따라 올려면 오라”고 요구할 것이다. 내심 박 대표계로 분류되고 싶은 의원들은 많지만 박 대표가 그어놓은 선 앞에서 돌아서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이른바 ‘박 대표계’를 앞으로도 만들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박 대표식(式) 스킨십 정치가 얼마나 먹힐지는 미지수다. 결국 박 대표의 스킨십 정치가 통할 것이냐는 향후 한나라당의 대권구도, 나아가 우리 정치판의 풍토 변화의 가능성도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인 셈이다.

이동훈 정치부 기자


입력시간 : 2004-12-02 17:59


이동훈 정치부 기자 dh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