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달구는 박정희 논쟁, "차기 구도 겨냥한 시나리오" 주장도박근혜 대표에겐 정치적 자산이자 부채, 한나라당 내 논란도 큰 부담

'박정희 지우기' 노림수 있나?
정치권 달구는 박정희 논쟁, "차기 구도 겨냥한 시나리오" 주장도
박근혜 대표에겐 정치적 자산이자 부채, 한나라당 내 논란도 큰 부담


한일협정 외교문서, 문세광 사건 관련 문서 등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시대의 '과거사' 관련 문건이 잇따라 공개되고 있는 가운데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20일 오전 국회 의원총회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역사학자 크로체의 표현을 실감나게 하듯 새해 벽두부터 ‘박정희 논쟁’이 뜨겁다. 죽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2005년 현대사의 한 복판을 가로지르며 정치권을 요동치게 하고 있는 것이다.

1월초 국가정보원의 과거사진상규명위가 박정희 정권 시절의 의혹 사건을 조사하기로 잠정 결정한데 이어, 17일에는 한일협정 문서와 육영수 여사 시해 사건(문세광 저격 사건) 문서가 공개돼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24일엔 박 전 대통령의 외아들 지만씨가 상영 금지 가처분 신청을 한 ‘그 때 그 사람들’시사회가 열렸고, 박 전 대통령의 글씨가 새겨진 광화문 현판을 교체한다는 계획이 공개돼 찬반 여론이 비등했다.

대부분 박 전 대통령의 어두운 그림자와 관계 있는 것들로 항간에서는 ‘박정희 지우기(때리기)’가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특히 박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한나라당에게는 초미의 문제였다. 박 대표는 1월 19일 신년 기자 회견에서 “과거의 진실 규명은 역사 학자들에게 맡겨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데 이어 다음날인 20일엔 “내가 누구의 딸인지 잊어 달라”며 불편한 속내를 내비쳤다.

한나라당은 “적법 절차에 따른 공개”라는 정부측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표와 한나라당의 정체성에 흠집을 내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며 반발했다. 전여옥 대변인은 25일 “박정희 정권 당시의 사안이 잇따라 터져 나오는 배경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박근혜 대표를 겨냥한 정교한 시나리오가 있다는 느낌을 지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대선까지 '살아있는 박정희' 될 것"
정치권에서는 ‘박정희 지우기’에 대한 여야의 공방을 떠나 결국 박 대표와 한나라당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정치평론가이자 여론 분석 전문가인 이흥철 박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더 이상 역사적 인물이 아니다. 2007년 대선까지 그는 ‘살아 있는 박정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대표가 유력한 차기 주자로 남는 한 박 전 대통령을 매개로 한 정체성 논란과 역사의 진실 공방은 계속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여권은 지난해 7월 19일 박 대표가 전당 대회를 통해 명실상부한 야당 대표이자 대권 주자로 우뚝 선 뒤 국가 정체성을 이유로 대여 전면전을 경고하자 박 전 대통령의 ‘유신 독재’를 내세워 반격했다. 나아가 친일 시비까지 거론하며 박 대표를 ‘아버지의 그늘’에 묶어 두려 했다.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까지 정체성 논쟁의 정면에 나서 7월 29일 “지금 정치 전선은 유신이냐, 미래냐의 기로에 서있다”며 박 대표를 유신으로 대변되는 수구 기득권 세력으로 몰았다. 아버지와 딸이라는 ‘숙명적인 관계’를 앞세워 박 대표를 집요하게 공격한 것이다.

박 대표에게 박 전 대통령은 역사적 자산인 동시에 부채이기도 한 ‘양날의 칼’이다. 박 대표는 20여년의 은둔 생활을 깨고 정치권에 첫 발을 내디딘 98년 대구 달성 보궐 선거에서 당선 된 뒤 “아버지가 못 다 이룬 뜻을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박 대표의 정치 입문에서 성장, 당 대표에 이르기까지 박 전 대통령의 후광은 절대적이었다. 박 대표가 지난해 17대 총선(4월 15일)【?난파 직전의 한나라당을 구하고, 6ㆍ5 재보선 압승, 7ㆍ19 전대에서 압도적 표차로 대표에 재선출된 데는 박 전 대통령 덕이 컸다.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 문서의 일부 문서가 공개된 17일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 회원들이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마친후 외교통상부로 행진을 하면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왕태석 기자

그러나 아버지의 후광이 강하면 강할수록 어두운 그림자도 큰 법. 여권 일각에서 박 전 대통령의 부정적 전력과 암울한 시대를 강조하는 것은 박 대표의 최대 무기인 ‘박정희 향수’를 무력화 하는 동시에 아버지의 부정적 유산을 부메랑 작용화하려는 계산에서다. 한나라당에서 ‘박정희 부채’를 털어 내야 한다는 주장은 그래서 나온다. 자칫 ‘박정희 덫’이 박 대표 개인 뿐만 아니라 당의 운신과 2006년 지방 선거, 2007년 대선 등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홍준표 의원이 1월 23일 “차기 정권을 향한 대선 레이스는 과거사 들추기와 과거 역사 부정 하기의 작업에서부터 이미 시작됐다”면서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 박 대표 스스로 앞장 서서 박정희 대통령 그늘에서 벗어나 홀로서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박정희 유산과 한나라당의 득실
정치 전문가들은 박 전 대통령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이 다양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으며 여야의 정치 지형을 비롯해 차기 대선 등 향후 정치 전반에 깊숙이 투영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박정희 논쟁’의 중심에 있는 박근혜 대표가 당 안팎의 도전에 시달리면서 당내 역학구도와 대권 레이스에 변화 조짐을 보이는 것은 대표적인 예다.

한일협정에 항거한 ‘6ㆍ3 동지회’의 이재오 회장(한나라당 의원), 이명박 서울시장, 김덕룡 한나라당 원내대표 등이 1월 19일 모임을 갖고 한일협정 관련 의혹들을 철저히 밝힐 것을 촉구한 것이나, 같은 날 한나라당 소장 개혁파 의원 모임인 ‘수요 모임’에서 한일협정 재협상을 촉구하고 국회 특별위원회 구성과 국정 조사를 통한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한 것은 박 대표를 압박한 측면이 없지 않다.

한일협정 문서 공개 이후 열린우리당이 한일협정 후속 대책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과거 청산에 나선 것이나, 시민 단체를 비롯해 박정희 시대의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 등은 장차 박 대표와 한나라당에 역풍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나라당이 박정희 논란을 여권의 정권 재창출 프로그램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나, 홍준표 의원 등이 과거사 청산을 여권의 주류 세력 교체 시도로 규정하는 것은 그러한 반기류를 경계한 까닭이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사회여론연구소 김헌태 소장이 “박근혜 대표에서 상징되는 박정희 향수는 경제 부흥을 제1의 가치로 여겼던 산업화 시대에 맥이 닿아 있다”면서 “산업화 세대는 보수 성향으로 친한나라당 경향을 보이는데 박정희 시대의 부정적인 면이 누적돼 간다면 지지를 철회할 수도 있다”고 분석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 소장은 “1월 26일 자체 여론조사결과 박 전 대통령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80%를 넘을 정도로 ‘박정희 향수’가 여전히 강력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유권자 구도를 분석할 때, 박정희 지지 성향이 강한 산업화 세대는 점차 줄어 들고 젊은 층이 늘어 나는 추세”라며 “한나라당이 ‘박정희 유산’에 과잉 기대를 할 경우 위험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진행 중인 박정희 시대의 평가와 이른바 ‘박정희 논란’은 박 전 대통령 개인의 과거사에 머물지 않고 현실 정치와 차기 대선 레이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연 박정희 시대의 유산을 어떻게 분배하고 활용할 지 박 대표와 한나라당, 여권의 선택이 주목된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5-02-01 16:18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