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급 '박정희 현판·비각' 총 35곳 42개, '흔적 지우기' 도마 위에

'朴통 친필' 어찌하오리까?
문화재급 '박정희 현판·비각' 총 35곳 42개, '흔적 지우기' 도마 위에

독립기념관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이 부서진 충의사 현판을 들고 있다.

“건축가 김수근은 박정희 시대의 모든 기념적 건축을 ‘박조건축(朴朝建築)’이라 불렀다. 지독한 냉소였다. ‘한국적’ 건축을 하기 위해 콘크리트로 짓지만 기와를 올려야 했으며 하나같이 계란 색으로 칠해야 했다. 그 기능과 목적을 가릴 것 없이…. 제왕이었던 박 대통령의 글씨로 쓰여진 이들 건축의 머릿돌과 현판들은 박조건축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던 것이다.”

광화문 현판 교체 논란이 빚어지고 있는 가운데, 건축가 승효상씨 (이로재 대표)가 운을 뗐다.박정희 전 대통령 치하에서 일그러진 문화 형식을 두고 김수근의 ‘박조건축’이란 조어(造語)로서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박 전 대통령의 문화 안목이나 글씨는 김수근이 냉소했던 당대의 공공 건축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 문화재의 속살 깊숙이 파고 들어 가 오늘의 논쟁으로 되살아 났다.

집권 18년 동안 1200여 점의 글씨 남겨
문화재청이 실사에 들어가 국회에 제출한 문화재별 ‘전직 대통령 필적 현판 등 현황’에 따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 담긴 현판 등은 총 35곳에 42개(표 참조). 전체 전직 대통령 친필 현판의 75%다.

이 중 근래에 교체ㆍ철거 되었거나 교체 예정인 된 현판은 최근 부쩍 세간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 ‘광화문 한글 현판’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 탑골공원에 걸렸으나 지난 2001년 시민단체(한국민족정기소생회)에 의해 훼손 철거된 ‘삼일문 현판’, 지난 3ㆍ1절에 무단 철거돼 세 동강난 매헌 윤봉길의사 사당에 걸렸던 ‘충의사 현판’을 비롯해 ‘수원 운한각 현판’과 ‘도갑사 해탈문 현판’ 등이 있다.

국보 제50호인 전남 영암군 월출산에 있는 도갑사 해탈문에 박 전 대통령이 남긴 친필 한자 현판은 2003년 범각 전 주지가 문화재청의 심의 없이 조선 후기의 명필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의 글씨로 교체했다. 또한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동오 신흥식 선생 묘비(충북 청원군) 역시 박 전 대통령의 친필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 밖에 임진왜란 관련 문화재에 있는 박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은 아산 현충사ㆍ충의문ㆍ충무문 현판, 부산 충렬사 사당현판, 행주산성의 충장사 현판, 해남 충무사, 남해 이락사 외삼문 현판ㆍ대성운해 비각 등 5곳에서 8개의 현판, 비각이 있다.

특히 이들 중에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 단체에서 문제 삼은 곳은 삼일문, 충의사와 같은 항일 운동 인물을 기리는 사당 등에 걸린 박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이다. 그런 곳에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이 버티고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이 역사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비판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경부고속도나 통일로 등지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 친필 기념비문과 같은 것이야 문제될 것 없지만, 그의 과거 행적을 볼 때 적어도 항일 독립운동을 기리는 상징물에 그의 친필 현판은 상식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방 사무국장은 최근 박 전 대통령 친필 논란이 임진왜란과 관련된 유적지인, 현충사나 행주산성 충장사 등지에 있는 그의 현판까지 확대되는 것에는 보다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박 전 대통령은 집권 18년 동안 전국 각지에 하사한 구호성 친필을 포함해 글씨 1,200여 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방문하는 곳 마다 ‘메모식 구호’ 등을 남겼고, 계산하면 매주 1점 이상을 쓴 셈이다.

박 전 대통령의 이 수많은 필적은 절대 권력자의 취미를 넘어 그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는 긴요한 도구였다. 그가 붓을 든 모습은 쿠데타 군인 출신의 이미지를 탈색시키는 역할도 했다. 또한 당시 국무위원, 국회의원뿐 아니라 일반 공무원에 까지 불어닥친 서예 바람에 한몫 단단히 했다. 유신 시절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전원에게 봉황무늬와 함께 유신이라는 친필이 새겨진 벼루를 선물했는데, 이름하여 ‘유신 벼루’.

과거사 청산과 맞물려
박 전 대통령의 서예 취미는 대구사범학교 시절에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서예 선생은 전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씨 부친인 김용하씨 였다. 대통령이 된 후 소전 손재형(1981년 작고) 굳萱?지도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예계에서 박 전 대통령의 글씨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다. 대체로 서예가 수준은 아니지만, 그의 주관과 강한 개성이 묻어난 글씨로 평가된다. 혹자는 “글씨에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살기까지 풍긴다”며 ‘사령관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한다. 박 전 대통령 글씨의 품격이 어떠하던 간에, 당시 제왕적 독재자의 권위에 힘입어 전국 곳곳의 문화재급 상징물에 하사(?)한 그의 친필은 현재 확인된 것만 35곳 42건이다.

사실 문화재의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 현판은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 단체 일각에서 오래 전부터 지적해 온,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문제였다. 그러나 최근 광화문 현판 교체 추진과 3ㆍ1절 충의사 사당 현판 철거ㆍ훼손 사건은 ‘박정희 글씨’를 본격적으로 여론의 도마에 올려 놓았다. 풍랑속의 ‘박정희 글씨’ 는 이제 과거사법 제정과 맞물려 이래저래 홍역을 치르게 될 전망이다.

조신 차장


입력시간 : 2005-03-09 16:22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