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이슈 장기화땐 각국 '한반도 전략' 노골화 가능성

'6자 게임' 미-중 파열음
북핵 이슈 장기화땐 각국 '한반도 전략' 노골화 가능성

송민순(가운데)외교통상부 차관보와 크리스토퍼 힐(오른쪽) 주한 미대사, 시사에 겐이치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 대양주 국장이 26일 오전 서울 세종로 외교부청사에서 북핵관련 3자 고위급 협의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6자 회담 당사국들의 분주한 물밑 행보에도 불구하고 북핵 이슈가 답보 상태다.

2월 10일 북한 외무성의 핵무기 보유와 6자 회담 무기한 중단 선언이 있은 지 한 달이 지나도록 국면 전환을 위한 새로운 시그널은 잡히지 않고 있다. 미 - 중, 북 - 중, 북 - 러 간에 한 달여 동안 물밑 접촉이 있었지만, 북한 압박을 위한 한 목소리 보다는 파열음이 점점 커져 가며 복잡한 ‘6자 역학 구도’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우선 북한은 2ㆍ10 성명 이후 김정일 - 왕자루이 면담을 통해 회담 재개를 위해서는 ‘명분과 조건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달했고, 지난 2일에는 1만 1,000여자에 달하는 외무성 비망록 공개를 통해 ‘명분과 조건’의 내용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즉 평양 당국은 6자 회담이 재개되려면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철회해야 하는 ‘조건’과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겨냥한 폭정의 종식 발언에 대한 해명하는 ‘명분’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첫 단계조치로 미국이 제안해 놓고 깨버린, 3차 6자 회담에서 논의된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의 기본 정신과 함께 ‘동결 대 보상’의 원칙을 회복해야 한다는 점을 짚고 나왔다.

북한의 이러한 행보는 미국을 겨냥하기 보다 중국이나 한국의 대북 압력 명분을 약화시키기 위한 포석으로 분석된다. 즉 미 - 중, 한 - 미 공동 전선에 대한 이간 전략의 성격이 짙다. 북한은 동시에 “미사일 문제에서도 어떠한 구속을 받는 것이 없다”면서 새로운 아젠다를 하나 더 던지는 격으로 미사일 실험 발사 재개라는 카드를 만지락 거리기 시작했다. 북한의 ‘협박성’ 미사일 발언은 미국의 무반응 탓에 꺼낸 측면도 있겠으나, ‘현 상황의 칼자루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의 과시로도 읽을 수 있다.

북-미 팽팽한 줄다리기 계속
반면 미국은 대북 무시 전략으로 일관하고 있다. ‘조건 없이 테이블로 나오라’며 무반응에 가까운 메시지만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크리스토퍼 힐 주한 미대사는 지난 3월 9일 “우리가 북한에 요구하는 것은 플로노늄 핵 프로그램 동결이 아니라 모든 핵 프로그램의 완전한 철폐이며, 북한이 어떤 전술적 동결이 아닌 근본적 선택을 하길 원한다”고 밝히면서 고농축우라늄(HEU)을 포함한 ‘선 핵포기’ 원칙을 거듭 확인했다. 또 뉴욕타임스가 6일자 사설에서 “미국 행정부가 북한 등을 겨냥한 벙커 파괴용 소형 핵무기 ‘벙커 버스터’ 연구 재개를 추진하고 민주, 공화 양당 의원 일부가 이에 동조하고 나선 것은 위험한 조짐”이라고 지적했듯 미국 행정부는 모든 옵션을 다 고려하고 있다.

북핵문제 협의를 위해 베이징을 방문한 북핵 6자회담 우리측 수석대표 송민순 외교부 차관보가 리자오싱 중국 외교부장과 회담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부시 대통령은 ‘대북 냉담’에 그치지 않고 백악관 성명을 통해 “핵확산금지조약(NPT)의 기본 역할인 세계 안보 강화를 훼손하면서까지 국제 사회에 도전하는 불량 국가(rogue state)들을 묵인해서는 안 된다”며 평양당국에 직격탄을 날렸다. 결과적으로 2ㆍ10 성명 이후 북 - 미 양측은 되려 강경 입장의 명분만 굳혀나가는 모양새로 팽팽한 줄다리기를 펼치고 있다.

특히 미국은 자신들은 아무런 구체 카드를 강구하지 못 한 상황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계속해서 ‘중국이 나서 해결하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지난 8일에도 부시 대통령은 홍석현 주미 대사의 신임장을 받는 자리에서 “중국이 대북 지렛대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으므로 중국이 나서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북핵 이슈로 북한과 중국을 한 ?묶어 압박하려는 태도다.

그러나 중국측에서 봤을 때, 미국의 이러한 태도는 일종의 ‘협박’으로 받아 들여질 여지가 있다. 즉 동북아 전략 구도상 미국이 은연중에 대만 문제와 연계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은 북핵 파문 이후 대만 등을 염두에 둔 미 - 일 안보동맹이 급속히 강화되고 있는 점을 현재로선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더욱이 중국은 미국의 요구와는 달리 평양을 완전히 컨트롤할 수 없는 형편이기도 하다. 북한에 대해 무리하게 종용한다면 평양 당국이 중국에 대해 회의할 지도 모를 위험마저 있다. 특히 최근 북한이 핵 문제에 가장 관대한 입장을 보여 온 러시아와 밀착한다는 설은 이러한 우려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이래 저래 중국의 계산은 복잡해 질 수밖에 없게 됐고, 베이징 당국의 대미 태도는 시간이 갈수록 거칠어 지고 있다.

중국 미국이 직접 대화하라
리자오싱 중국 외교부장은 지난 6일 “6자 회담은 각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현실적인 선택으로 계속돼야 한다”는 전제 아래 미국이 북한과 직접 대화에 나서라고 되받아 쳤다. 그는 또 미국의 북핵 관련 정보의 질에 의구심을 제기하며 미국의 대처 방식을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물론 중국이 미국의 정보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한 것은 다분히 외교적 수사일 가능성이 크다. 중국은 설령 북한이 핵을 가졌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해도 외교적으로는 부인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대미 협상의 여지도 생기고 동시에 대북 영향력을 발휘할 시간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입장에선 중국의 이러한 반응은 바라던 바다. 평양 당국은 5일 노동신문을 통해 “미국의 동북아 냉전 구도 유지 전략이 6자 회담을 파탄시키고 조선반도 비핵화 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근본 요인”이라고 주장하며 베이징의 고민에 맞장구쳤다. 미국이 한 - 일과의 3각 군사 동맹을 바탕으로 미사일방어(MD)체계 구축을 통해 대북 선제 공격 뿐 아니라, 중국의 군사 무력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북한을 방문한 왕자루이 부장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건배하고 있다.

6자 회담의 한 축인 중국이 복잡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은 결과적으로 미국의 정책 실패가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마이클 아머코스트 미 전 국무부 차관은 최근 신문 칼럼에서 “6자 회담의 조속한 재개에 모든 외교력을 집중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전제한 뒤 “최우선 과제는 5개국 간의 전략적 합의가 있어야 북한과 성공적으로 협상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지 않다면 회담을 해 봐야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았던 게 북한과의 협상 경험이라는 요지다. 다시 말해 5개국이 ‘북한이 핵을 가지면 생존 기반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한목소리로 북한에 전달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는 평가다.

사실 리자오싱 중국 외교부장이 언급한 ‘각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6자 회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6자 회담에 임하는 각국이 벌이는 소위 ‘6자 게임’은 북핵 문제가 어떻게 결론이 나든 간에 결국은 자국의 이익에 부합되게 하고, 최종의 승리자가 되기 위한 행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핵 이슈가 끝난 후의 한반도가 어떻게 구상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선 북한이 생각하는 최상의 시나리오는 핵을 미스터리로 남긴 채 미국과 관계 정상화를 얻어내 정권을 유지하는 것일 터이고, 반면 미국은 리비아식 해법으로 핵 이슈를 제거하고 북한을 미국에 영향권 내 두는 형태일 것이다. 중국이 승리자가 되는 방식은 자신들의 적절한 개입으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장기적으로 북한에 친중(親中) 지도부가 구성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러시아의 입장도 중국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6자 게임’은 지금 북핵 이슈를 뛰어넘어 복잡한 계산 속에서 한창 진행중이다.

6자 회담이 추구하는 공식 구도는 한반도 비핵화를 통한 평화 정착이다. 그러나 북핵 이슈가 장기화할수록 6자 회담은 북핵을 지렛대 삼아 21세기 동북아 재편을 염두에 둔, 6자의 각축 게임으로 노골화할 가능성이 크다.

조신 차장


입력챨?: 2005-03-17 17:18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