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극동지역 에너지·산업관련 조직, 북한 지원 나서며 영향력 커져

[단독보도] 북핵 해법의 열쇠, '라손'이 뜬다
러시아 극동지역 에너지·산업관련 조직, 북한 지원 나서며 영향력 커져

중국을 방문한 박봉주 북한 총리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회담하고 있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TㆍS 엘리엇의 시 ‘황무지(荒蕪地)’의 첫 구절은 그대로 북한에 적용된다. 북한에서 4월은 1년 중 가장 배고픈 춘궁기(春窮期)에 해당한다. 또한 파종을 위해 트랙터를 움직일 기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다.

북한이 매년 4월께 최고위 각료가 중국을 방문하는 것은 춘궁기를 넘길 기름과 식량을 지원 받기 위해서다. 2003년엔 홍성남 전 정무원 총리가, 작년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중국을 방문했다. 당시 중국 지도부는 김 위원장에게 ‘북핵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에너지와 식량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경고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은 북핵 자체 문제보다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에 따라 대만을 복속시키려는 계획을 강도 높게 추진하는 데 북핵이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중국은 대만이 핵을 보유할 경우 복속은 커녕 중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북핵은 대만이 핵을 보유할 수 있는 가장 큰 빌미를 제공하고 있어 중국 입장에선 ‘눈에 가시 같은’ 존재다.

중국은 3월 14일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에서 대만 독립을 저지하기 위한 반국가분열법안을 압도적인 지지로 표결 통과시켜 대만 복속을 현실화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대만이 2기 천수이벤(陳水扁) 체제 출범 이후 대만 독립을 노골화하는 것에 따른 조치다.

이에 앞서 중국은 북한에게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일체의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입장을 전했다. 대만을 복속하는데 장애가 되는 뇌관을 사전에 제거하겠다는 메시지였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일 위원장과 북한 군부는 중국의 요구에 상당한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은 더 이상 ‘착한 흥부’ 역을 맡지 않기로 했다. 지난해 4월 중국 방문 때 뺨에 붙은 밥풀을 떼 먹어야 하는 흥부의 수모를 뼛속 깊이 절감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대북압박카드 무력화
2월 10일, 북한은 ‘6자회담 무기한 불참과 핵무기 보유 선언’이라는 초강수를 던졌다. 미국은 가장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한편으론 중국에 대한 일격에 미소를 지었다. 북한이 중국과 맞설 경우 대만 – 한국 - 일본을 자연스럽게 미국의 영향권 아래 둘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예상 밖의 충격을 받은 중국은 “북한이 6자 회담에 복귀하기 바란다”는 의례적인 성명을 냈다. 또 왕자루이(王家瑞) 대외 연락 부장을 대표로 한 중국공산당 대표단이 2월19일 평양을 방문한 데 이어 3월 23일엔 리자오싱(李肇星) 외교부장이 김정일 위원장과 면담을 갖고 북한 달래기에 나섰다.

박봉주 북한 내각 총리의 중국 방문은 북한과 중국의 힘겨루기의 결정판인 셈이다. 박 총리는 콘돌리사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아시아 순방을 마치고 중국을 떠난 바로 다음 날인 3월 22일 베이징에 도착, 중국의 지도자들과 연쇄 회담을 가졌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 주석은 박 총리와 면담하고 5월 초 북한을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너지와 식량을 무기로 북핵을 제거하려던 중국의 의도는 북한의 강수에 밀린 꼴이 됐다. 북한이 이렇게 나온 데는 국제 역학 관계를 간파한 심모원려(深謀遠慮)와, 무엇보다 러시아의 힘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러시아가 북한에 에너지를 지원하겠다고 나서면서 중국의 북한 압박 카드는 사실상 무력화됐다. 게다가 북한이 역으로 “대만에 핵을 지원 할 수도 있다”며 공세를 취하자 중국이 유화 분위기로 돌아섰다는 분석도 있다. 북한과 러시아와의 관계가 급격히 진전된 것은 2003년 홍순남 전 정무원 총리가 에너지와 식량 문제로 두 차례나 중국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홀대를 받은 게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는 전언이다.

북한과 러시아는 2000년 7월 김정일-푸틴 정상회담에서 초안을 마련한 뒤 2003년 극동 러시아를 중심으로 경제 교류와 에너지 산업 문제를 해결해 나가자며 ‘라손’이라는 조직을 출범시켰다. 라손은 콘스탄틴 폴리코프스키 러시아 극동지역 대통령 전권대표를 위원장으로 산하에 농업, 수산, 광업, 에너지 등 7개 부서를 두고 있다. 북한에서는 평양에서 파견된 차관급 인사와 극동 지역 고려인이 북한을 대신해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목되는 것은 라손에 한국 담당 부서를 따로 두고 한국 사정에 정통한 러시아인 V씨를 임명했다는 점이다.

라손에 관여하고 있는 러시아 관계자에 따르면 러시아는 북한의 춘궁기에 해당하는 4~6월에 걸쳐 두만강 인근 북ㆍ러 국경 지대를 통해 트랙터용 기름을 북한에 전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으로서는 6자 회담에 복귀하라는 중국ㆍ미국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숨통이 트인 셈이다. 러시아 관계자는 북한의 6자 회담 복귀와 관련,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제 2차 세계 대전 승전 60주년’ 기념 행사 참석 이후인 6월 전후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러 관계가 6자 회담 변수될 수도
북한은 최근 모스크바 승전 60주년 행사에 김정일 위원장이 참석할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쳐 의도적으로 중국을 자극, 시험대에 들게 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모스크바행은 그 동안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국쪽에 기울었던 북한이 러시아를 선택할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북ㆍ러 관계가 긴밀해짐에 따라 중국은 다각적인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지만 대만 문제에 발목이 잡힌데다 미국과 일본이 연대를 통한 압박 수위를 높여가고 있어 진퇴양란에 놓인 상황이다. 한국과 북한으로서는 6자 회담을 둘러싼 국제무대에서 활동과 교류의 폭이 넓어진 셈이다.특히 라손의 위원장인 폴리코프스키는 지난해 11월 노무현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남북 정상회담에 러시아의 건설적인 역할을 언급한 바 있다. 또 여건이 갖춰지면 극동러시아에서 정상회담이 개최될 가능성이 있다고 해 눈길을 끌었다.

참여정부가 북핵 해법의 방안으로 거론하고 있는 ‘시베리아 프로젝트’ ‘사할린 프로젝트’의 골자는 극동러시아의 에너지를 북한에 공급해 비핵화를 유도하자는 것이다. ‘강한 러시아’를 표방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극동 러시아를 개발, 중국과 일본을 견제하고 에너지 자원을 확보한다는 ‘2010 극동ㆍ시베리아 개발 계획’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러시아는 이 과정에 남북한이 함께 참여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북한은 에너지와 식량 문제 해결의 창구로 러시아의 비중을 높여가고 있다. 한국 역시 러시아를 매개로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고 남북관계를 개선한다는 계획을 추진 중에 있다.

‘라손’은 최근 남북한과 러시아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새롭게 주목받는 중이다. 그 동안 라손의 활동이 북한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진행돼온 데 반해 점차 한국의 역할이 증대되는 까닭이다. 라손의 존재가 부각되면서 한반도의 4월은 결코 잔인한 달이 아니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5-04-07 17:20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