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압박카드 실패, 좀더 유연한 정책으로 선회 가능성

꼬이는 북핵, 딜레마에 빠진 미국
대북 압박카드 실패, 좀더 유연한 정책으로 선회 가능성

6월 시한설 까지 흘리며 ‘조건 없이 6자 회담에 복귀하라’는 미국의 대북 압력카드가 일단 실패로 끝난 듯 하다. 이에 따라 미국이 전략을 수정, 좀더 완화된 대북 정책을 쓸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박봉주 내각총리와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을 잇달아 베이징에 보낸 북한은 미국이 기대했던 중국의 설득에 대해 ‘노’라고 밝힘으로써, 후진타오 주석 4월 방북설 등이 뒷받침하던 ‘6자 회담 6월 복귀 전망’을 무산시켰다. 나아가 북한은 지난달 31일 외무성 담화를 통해 “북한이 핵 보유국이 된 만큼 6자 회담은 군축회담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6자 회담의 틀 변화를 시도, 북한 핵 이슈의 희석화 전략을 구사하고 나섰다.

북한의 거부가 평양 당국의 벼랑 끝 전술인지, 아니면 베이징의 전략적 방조에 따른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여하튼 이제 미국은 새로운 카드의 검토가 불가피한 국면을 맞았음은 확실하다. 다시 말해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정책이 1차적으로 실패했다는 평가와 함께 실패에 따른 전략 수정, 즉 완화된 카드를 검토하게 되는 상황에 왔다는 것이다.

워싱턴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데빈 스튜와트(한-일 연구그룹 공동의장)가 현재 미국의 대북정책의 근본적 방향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것은 특히 주목된다.

그는 ‘6자 회담에서 신뢰성 위기에 빠진 미국’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현 상황은 김정일이 핵 개발과 협상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할 필요가 없이, 이 둘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 이유로 평양 당국이 언제든 진심으로 나올 경우, 미국은 회담 복귀를 거부할 수 없는 형국이라는 것. 또한 이것을 잘 아는 평양은 ‘꽃놀이 패’를 쥔 격이며, 현재로는 핵 위기를 해소하는 데 별 관심이 없는 것은 당연지사라는 분석이다.

또한 그에 따르면 미국이 북한을 압박할 현실적인 수단들도 마땅치 않다.

먼저 확산방지구상(PSI) 프로그램을 통한 대북 제재를 구상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북 제재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주변 5개국의 협력이 절대적인데 현재론 쉽지 않다는 점이다. 우선 한국과 중국, 러시아가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오랜 고립을 경험한 북한의 생존능력을 무시 못한다는 측면도 있다.

다른 선택은 북한이 원하는 북-미 양자 협상의 수용이다. 그러나 양자 회담을 수용하는 것은 부시 대통령이 지난 대선 때 케리 후보와 정책 논쟁에서 분명히 거부한 사안을 번복하는 것으로 정치적으로 너무 큰 부담이다.

마지막으로 유엔안보리 회부. 그러나 북한이 2003년 1월 핵확산방지조약(NPT)을 탈퇴한 상태에서 핵무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 국제법 위반이라고 볼 수 있나 하는 회의론이 엄존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올해 초 부시 행정부는 한, 중, 일 등에 북한이 리비아에 6불화 우라늄을 판매했다는, 즉 북한이 소위 ‘레드 라인’을 넘었다는 정보를 전달했다. 그러나 이 정보는 최근 워싱턴포스트의 문제제기로 그 사실성이 논란에 휩싸였다.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북한이 우라늄을 판 곳은 리비아가 아닌, 파키스탄이라는 것이며, 북한과 파키스탄의 거래는 이미 알려진 국가간 정상 거래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우라늄을 리비아에 팔았다는 첫 보도를 한 뉴욕타임스까지 지난 31일 당초 단정적 논조에서 한발 빼는 보도로 부시 행정부를 흔들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의도를 의심 받을 만한 정보를 동북아 협력국에 제공함으로써 이라크 대량살상무기(WMD)를 연상시키는 신뢰의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이 CSIS의 결론이다. 그리고 스튜와트는 나아가 한반도가 동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을 결정할 것은 분명한 정황이며, 부시 행정부가 이 점을 긍정적으로 주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결국 미국은 동북아 재편의 핵심적 기제인 6자 회담의 토대를 스스로 무너뜨릴 수 없는 상황이고, 이를 위해 5개국이 한목소리로 평양 당국을 압박할 수 있도록 기존입장에서 보다 한발 물러선 카드를 제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최근 부시 2기 행정부의 이러한 신뢰성 위기는 미-일 간 2+2 워싱턴 안보동맹을 배경으로 한 일본의 돌출 행동과 더불어 동북아에서 미국의 입지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미국이 瞿뼈?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한 입장을 돌연 수정한 것도 예상을 넘어선 동북아 정세 변화에 대한 반응으로 평가된다.

부시 2기 출범 이후 한국 입지 약회
한편 부시 2기 정부의 대북 정책 실패는 한국의 대북 정책의 실패로도 이어졌다. 한국 정부의 대북 정책은 낙관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우울하다.

통일연구원 박형중 박사는 현 상황은 한국정부의 대북정책 기조가 유지되기 힘든 정세로 평가한다. 박 박사는 대북정책 기조인 핵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 동시추진, 접촉과 지원을 통한 북한 변화 유도, 대북 지원 및 경협 확대로 남북관계 유지와 그 전망에 대한 낙관론, 핵 이슈에서 대북 압력 거부, 핵 문제 해결에 있어 한미일 협조체제(TCOG)를 토대로 한 중국 활용 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부시 2기에 들어서면서, 6자 회담 참가국 사이의 갈등 증가로 자칫 6자 회담의 토대가 붕괴될 수 있는 상황이 형성됐다는 것이 일반적 진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입지가 약화된 국가가 한국 정부일 수도 있다. 즉 미-일과 북-중이 각각 가까워졌으나, 한국은 그 어느 나라와도 의견일치의 폭과 협력을 확대하는데 실패했다는 진단이다. 이러한 상황 판단이 노 무현 대통령의 베를린 발언의 배경일 수 있는 대목이다.

독일을 방문한 노 대통령은 ‘베를린 선언’에서 전향적 내용이 기대됐던 것과 달리, 조목조목 북한을 비판하는 ‘쓴소리’를 했다. 이는 북한에 대해서는 김정일 위원장의 결단을, 미국에 대해서는 한국에 대한 우려를 완화시키려는 중층적 의도로 보인다. 사실 노 대통령은 북한과 미국에 동시에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그러면서도 독일 일간지 ‘디 벨트’와 인터뷰에서 대북 압박에 대해선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북핵이 꼬이는 현 상황에서 평양과 워싱턴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말이다.

결국 북한의 완강한 버티기로 어차피 공은 미국으로 다시 넘어갔다. 또한 갈수록 꼬이는 동북아 정세는 미국의 전향적인 변화를 불가피하게 만드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박형중 박사는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북핵 해결을 위한 현실적 카드로 플루토늄과 우라늄 문제의 분리 접근을 검토해 볼 수 있다고 전망한다. 만약 미국이 6자 회담의 틀을 스스로 깼다는 비판을 면하려면 마지막으로 북한에 최후 통첩식 카드를 제시하는 성의를 보여야 하고, 이는 나머지 5개국이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 사실상 북한 전역의 시설을 뒤져서 확인해야 하는 우라늄 농축 문제는 상대방이 두 손 들기 전에는 대화 테이블에 올리기 힘든다는 설명이다. 또한 우선 플루토늄 재처리 문제만을 이슈로 삼을 땐 북한 핵 문제는 ‘2ㆍ10 핵보유 선언’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게 되는 셈이다.

최근 워싱턴포스트 보도, CSIS 보고서 등 미국 내 분위기조차 부시 행정부의 입장 변화를 압박하는 추세인 것은 분명하다. 부시 행정부의 유연성의 한계가 주목되는 시점이다.

조신 차장


입력시간 : 2005-04-21 17:06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