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 평양 기념행사 대표단 축소 요구, 남북관계 속도조절 속셈방북 계기로 '대권주자 위상강화' 계획에 찬물, 딜레마 속으로

정동영 "북한이 안 도와주네"
6·15 평양 기념행사 대표단 축소 요구, 남북관계 속도조절 속셈
방북 계기로 '대권주자 위상강화' 계획에 찬물, 딜레마 속으로


남북 차관급 회담이 열린 5월16일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남북대화사무국에서 북측으로 떠나는 남측 대표단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

‘산 넘어 산’, 정동영 통일부장관의 요즘 처지다. 북한이 1일 6ㆍ15 공동선언 5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는 남측 대표단 규모의 대폭적인 축소를 요구하면서 정 장관의 ‘평양행’에 먹구름이 끼었다.

북한은 1일 오전 대남 전화통지문에서 “미국이 최근 핵문제와 관련, 우리 체제를 압박,비난하는 등 축전 개최에 새로운 난관이 조성되고 있다”며 “당국 대표단의 규모를 70명에서 30명으로 줄여달라”고 요구했다. 이와 함께 615명으로 합의했던 민간대표단도 190명 수준으로 축소할 계획임을 알려왔다.

북한의 6ㆍ15 통일대축전 방북단 축소 요구는 미국의 대북 압박론을 구실로 이른바 민족공조 공세를 강화하는 한편, 10개월 만의 당국회담으로 비료 20만 톤을 받아낸 만큼 핵문제나 6자회담 복귀 등이 결론나지 않은 상태에서 남북관계의 속도조절에 나서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허를 찔린 정부는 적절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통일부는 “남북 간 합의사항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며 원칙론을 되내이고 있지만 전체 판을 깰 수 없는 상황이어서 결국 북측의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정 장관에게 취임 10개월 만에 열린 평양행은 북측 당국자들과 북핵 문제와 남북관계 정상화 등 현안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기회이면서 차기 대선 후보로서의 위상을 강화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아왔다. 정 장관이 행사 준비를 진두지휘하며 삼청동 남북대화사무국에서 북한 문제에 대해 ‘과외 공부’를 하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면담 가능성에도 대비한 것은 그러한 배경에서다.

그러나 북한이 10일 한ㆍ미 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후속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있고 6ㆍ15 민족행사에 미국이 방해를 하고 있다는 식의 공세를 취하고 있어 정 장관이 김 위원장을 면담할 가능성은 희박하고 행사기간 중 있을 남북 당국자 간 접촉도 의례적인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냐는 ‘회의론’이 만만찮다.

북한, 정 장관에 차가운 시선
북한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은 “북한은 정 장관이 취임한 이후 북측에 보인 강경 태도에 분개하고 있다”면서 부정적 시각에 무게를 뒀다. 소식통은 북한이 정 장관을 비난하는 배경으로 △김일성 주석 조문 불허 파동 △탈북자 집단 입국 △북핵 문제와 관련한 대북 압박 등을 대표적인 예로 꼽았다.

정 장관이 지난해 7월 박용길 장로를 비롯한 민간단체 인사가 김일성 주석 10주기 조문을 위해 거듭 방북을 요청했으나 허가하지 않았고, 북한이 ‘체제전복 음모’라고 비난하는 탈북자 640여명을 집단 입국시켰을 뿐만 아니라 북핵 해결에 있어서 미국 등 주변국의 ‘압력행사’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그러한 정 장관을 맹비난하면서 지난해 8월 예정되었던 15차 장관급 회담을 전격 취소하고 남측과의 채널을 단절했다. 또한 정 장관이 역점사업으로 여긴 개성공단 준공식에서는 부국장급만 나오고 내빈석도 없는데다 정 장관이 인사말을 할 때는 자리를 뜨는 등 철저하게 ‘홀대’했다. 그리고 11월에는 “역사상으로 남쪽의 통일부 장관 가운데서 북측 땅을 밟아 보지 못하고 끝날 가능성이 있는 장관이 될 것”이라고 정 장관에게 대놓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핵 문제를 둘러싼 북한과 중국과의 갈등으로 중국이 지난해 11월부터 대북 기름 공급을 중단, 최악의 에너지난에다 춘궁기까지 겹치면서 정 장관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북한이 파종기에 필요?비료를 위해 우리측에 긴급지원을 요청, 굳게 닫혔던 남북대화의 문이 열리면서 정 장관이 전면에 나서게 된 것.

지난달 개성에서 나흘간 진행된 남북 당국자 회담이 19일 밤 극적으로 타결, 정 장관은 평양에서 개최되는 6ㆍ15 행사와 이달 말 서울서 열리는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우리측 대표로 나서게 됐다. 이것이 현실화되고 일정한 성과를 거둘 경우 정 장관은 국내외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고 대권 행보에도 힘이 붙게 된다.

5월16일 개성에서 열린 남북차관급 회담에서 이봉조 남측단장(오른쪽)과 김만길 북측수석대표가 회담을 시작하기전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그러나 북한이 6ㆍ15 행사를 불과 10여 일 앞두고 느닷없이 방북단 규모 축소 요구를 들고 나오면서 정 장관의 ‘기대’는 ‘우려’로 급변했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은 “북한이 방북단 문제를 들고 나온 데는 정치적으로 미국과 한국을 동시에 겨냥한 측면 외에 1,000여명의 방북단을 한꺼번에 수용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면이 있지만 남측 대표로 나서는 정 장관을 압박 내지 교체하려는 노림수도 숨어 있다”고 말했다. 개성에서 열린 비료회담이나 6ㆍ15 행사와 관련한 실무자급 회담이 몇차례 연기된 배경에도 김일성 주석 조문 파동 등 북한과 정 장관의 ‘악연’이 작용했다는 게 소식통의 전언이다. 정 장관이 남북 관련 행사를 순수하게‘민족’을 위해서라기보다 대권 행보와 연계시키려는 것으로 보고 브레이크를 걸었다는 것.

실제 지난해 국내와 중국 정보통 사이에서는 김하중 주중 대사가 정 장관을 위해 중국에서 북측 인사들과 접촉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북한 주재 유럽의 한 국가 대사가 정 장관의 대북 창구 역할을 했다는 말들이 흘러나오면서 정 장관이 “평양행에 올인(all in)하고 있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정 장관이 임기 중에 남북관계에 실적을 남겨 대선 후보로서의 입지를 굳히려 한다는 것이다.

'기회''추락' 갈림길에 놓여
정치권 일각에서도 통일부가 ‘개성 회담’에서 북핵 문제를 제외하고 합의문을 이끌어 내 ‘절반의 성공’ ‘알맹이가 빠진 합의’수준에 머문 것은 정 장관이 대권행보에 따라 업적주의에 치중한 결과라는 지적이 있다.

이런 점에서 정 장관의 평양행은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정 장관이 거론하려는 북핵과 6자회담을 북한은 북ㆍ미 간의 문제로 보고 우리측의 관여를 차단하는 입장이고 정 장관에 대한 불신도 크다. 북한 최고위층과 선이 닿아 있는 중국 동포 K씨는 “정 장관이 남북대화 재개를 위해 전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은 그의 전력(?) 때문에 여전히 불신하고 있다”면서 “정 장관이 6ㆍ15 행사 때 평양을 방문하더라도 환대받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K씨는 “북한이 정 장관을 남측 대표로 인정한 것은 오로지 경제문제 때문으로 북핵은 대화 대상이 아니다”면서 “한국에서 김정일 위원장과의 면담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지만 놀랄만한 선물이 없는 한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했다.

6ㆍ15 행사와 장관급 회담을 앞둔 정 장관은 ‘기회’와 ‘추락’이라는 양날의 칼 위에 서있다. 남북대화의 물꼬를 열고 남북관계 발전에 공을 세운다면 대권 행보가 한층 탄력을 받겠지만 북측의 홀대로 성과없는 일회성 행사로 끝난다면 장관직이 흔들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열린우리당 내에서 4ㆍ30 재보선 패배 후 흐트러진 당을 다잡고 내년 지방선거, 나아가 2007년 대선을 위해 정 장관이 조기에 복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도 정 장관의 거취를 압박하고 있다.

6ㆍ15 기념행사와 장관급 회담과 관련한 ‘북한 딜레마’는 이미 정 장관을 시험대에 올려 놓은 상태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5-06-09 18:21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