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한국 붙잡고 美화 협상' 포석6자회담 복귀 신호, 한·미 정상 '굳건한 동맹' 확인도 자극됐을 것

김정일 위원장, 정동영 장관 전격 면담
北 '한국 붙잡고 美화 협상' 포석
6자회담 복귀 신호, 한·미 정상 '굳건한 동맹' 확인도 자극됐을 것


정동영(왼쪽 두번째) 통일부 장관이 16일 밤 평양시 목란관에서 김영남(오른쪽 두번째)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위원장 주최 만찬에서 건배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17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전격 단독 면담했다. 우리측 현직 통일부 장관이 김 위원장과 독대한 것은 2000년 9월 박재규 당시 장관 이후 5년 만으로 1년 가까이 표류 중인 북핵 6자 회담과 남북관계에 돌파구가 마련될 지 주목된다. 면담은 6ㆍ15 남북공동성명 5주년 기념행사 방북단이 서울로 출발하기 직전 성사됐다. 이날 만남은 오전 11시께 시작, 오찬을 함께 하며 5시간 넘게 진행됐다. 이날 단독 면담은 정 장관이 10일(미국 시각) 한미정상 회담 결과와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 메시지를 전달하고, 김 위원장은 주로 듣는 형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화 모양새로 '대미 시간벌기'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면 체제안전을 보장하고 북ㆍ미간 ‘보다 정상적인 관계(more normal relations)’를 추진한다는 한ㆍ미 정상회담의 합의 사항과 우리측이 구상하는 ‘중요한 제안’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이뤄졌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정 장관은 김 위원장에 노 대통령이 한ㆍ미 정상회담서 확인한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부시 대통령 발언의 진정성을 중점적으로 설명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번 한ㆍ미 정상회담에서는 북핵 관련 새로운 제안보다는 한국과 미국의 의도를 서로 확인하는 데 무게를 뒀기 때문이다. 한편 김 위원장이 전격적으로 면담에 나선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국정부 붙들기’와 ‘대미 시간벌기’ 의도로 분석한다. 최근 들어 북한은 국제적인 고립 위기에 빠졌다. 한ㆍ미 정상회담 이후 한국 정부마저 미국 쪽으로 급선회한다면 김 위원장으로선 최악의 상황을 맞는 셈이다. 한국 정부와 대화하는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우리가 북으로부터 크게 멀어지는 상황을 막아보겠다는 행보로 해석된다.

또 이번 면담은 6자 회담에 나오기 위한 시그널로 점 처지기도 한다. 마냥 버티기에는 현재 상황이 북한에 결코 유리한 국면이 아니라는 판단에 일단 회담에 복귀, 상황을 반전시킬 시간벌기 전술을 구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여하튼 이번 면담은 북핵과 남북관계 교착 상황에 희망적인 변화를 부를 사건으로 보여진다.

한편 이에 앞서 10일 있은 한ㆍ미 정상회담은 한미 동맹의 균열 논란을 잠재운 점을 최대 성과로 평가한다. 당초 한ㆍ미 공조를 통한 북핵 공조가 최대 현안이었지만 실제로는 동맹관계 재확인에 초점을 맞췄다는 설명이다.

한국 정부가 이렇게 한ㆍ미 정상회담을 풀어 간 이유는 동맹관계가 굳건해야 북핵 문제도 풀릴 수 있으며, 지금처럼 동맹에 대한 우려가 큰 상황에서는 효과적인 북핵 공조가 불가능하다는 상황 판단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정부는 이런 입장을 정상회담 전에 콘돌리사 라이스 미 국무장관 등 미국측 실무진에 전달하고 조율했다고 밝혔다.

이 결과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회담 후 가진 짤막한 기자회견에서 한국과 미국은 “같은 목표를 갖고 있다”와 “한 목소리”라는 표현을 다섯 차례나 사용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한두가지 작은 문제들이 남아 있으나 중요한 문제는 다 해결됐다”고 답했다. 한두가지 작은 문제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북한 붕괴 시 한국과 미국의 대응 조치를 담은 ‘작전계획(개념계획) 5029’인 것으로 확인됐다. 회담에서 노 대통령은 우리의 입장을 설명했고 부시 대통령은 경청했다는 후문이다.

북핵과 관련해서는 예상대로 두 정상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 불용과 북핵 문제의 외교적 해결 원칙을 강조했다. 회담 전부터 추측이 무성했던 문제, 즉 북핵 해결을 위한 외교적 방법이 완전히 소진했을 경우 대북 대응전략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언급된 게 없다. 다만 노 대통령은 귀국 후 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바둑을 둘 때 상대방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 대응한다. 처음부터 어떻게 미리 예상하고 할 수 있겠느냐”며 상황이 발생하면 그 때 논의한다는 원칙을 밝혔다. 노 대통령은 일단 북핵 대응에 대한 가정법에 선을 戮?것으로 보인다.

미국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이 6월11일 백악관에서 부시 미국대통령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

그러나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북핵 해결을 위한 획기적 제안은 없었다. 다만 두 정상은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면 체제안전을 보장하고 북ㆍ미간 ‘보다 정상적인 관계’를 추진할 것을 합의했다. 또한 부시 대통령은 북한 핵문제에 ‘선(先) 핵포기’ 원칙은 불변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우리는 향후 방향에 대해 지난해 6월에 제안했다. 그것은 합리적인 제안이며 우리는 아직도 그 제안에 대한 북한 측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새로운 대북 제안이 없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즉 평양 당국이 6자회담 복귀를 위해 내건 전제조건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라는 메시지인 셈이다.

이와 관련 노 대통령이 미국 측에 다른 제안을 했다는 얘기는 아직 없다. 그 동안 간접화법으로나 우리 정부는 북핵 문제의 교착 원인이 실질적인 협상 분위기 조성에 소극적인 미국에도 책임이 있다는 점을 표시해 왔다. 그러나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우리 정부는 미국을 설득하는 것 보다 북한을 설득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란 판단을 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대북식량·비료지원 문제가 실험대
당장 올 가을 있을 대북 식량과 비료지원 문제가 실험대다. 지난해 세계식량계획(WFP)은 36.6만 톤의 식량을 북한에 지원하면서 총 4,800회의 모니터링(현장 조사)을 한 반면, 우리는 50만 톤을 지원하면서 10회의 모니터링을 했다. 백악관 스콧 매클렐렌 대변인은 정상회담 직후 브리핑에서 “부시 대통령은 식량을 외교무기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항상 분명히 해왔다”면서도 “다만 식량을 필요한 사람들이 배급 받도록 확실히 해야 하는데, 북한엔 그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우리 정부의 무조건에 가까운 식량과 비료 지원에 재고를 요구한 것으로 해석된다. 미국은 WFP를 통해 1999년 50만 톤, 지난해에는 5만 톤의 식량을 지원했지만 올해에는 아직 지원계획을 내놓고 있지 않는 것도 대북 식량지원에 대한 미국 측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다른 한편 북한 인권문제과 관련 미 행정부의 행보가 새로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부시 미 대통령은 13일(미국 시각) 북한 강제수용소에서 10년간 지낸 체험을 쓴 ‘평양의 어항’ 저자 강철환(37) 조선일보 기자를 백악관으로 초청, 40분간 만났다. 노 대통령과 회담한 지 3일 만이다. 6자 회담과 인권은 별개의 문제라는 논리다.

김정일 위원장은 최근의 한·미 상황을 고려해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전격 면담한 것으로 판단된다. 연합

부시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거론하면서 “그가 만일 내가 당신을 만난 것을 안다면, 그가 싫어하지 않을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번 만남이 북한의 6자 회담 복귀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대목이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도 14일(미국 시각) 미 상원 외교위 청문회에서 “미국은 북한 인권 문제에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같은 자리에서 조셉 디트러니 6자 회담 미국측 차석대표는 북한의 인권문제 등 다른 현안이 해결되지 않더라도 북한이 핵을 포기한다면 영구적인 안보 보장을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디트러니 특사의 이같은 발언은 "북한을 공격할 의도가 없다"는 조지 부시 대통령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행정부와 의회 내 많은 보수적 인사들이 북한 인권의 개선, 심지어 김정일 정권의 축출 없이는 북한에 대한 안보보장에 반대한다는 입장임을 감안할 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북한 인권문제가 최대 관건될 수도
대북정책에 있어서 부시 행정부가 어느 한 길로 가겠다는 명확한 입장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 부시 대통령의 전략정책보좌관인 마이클 거슨은 “인권이 우리의 접근법에서 중심”이라고 강조했다. 즉 ‘자유와 민주주의 확산’이 부시 행정부의 정체성이란 설명이기도 하다.

평양 당국은 혼란스러울 수 있다. 워싱턴은 북한과의 협상에?한편으론 디트러니 말대로 핵문제가 해결되면 체제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하고, 돌아서면 거슨 말대로 인권 문제 거론에 북한도 예외일 수 없다는 메시지를 동시에 보내고 있는 것이다. 평양 당국이 부시 행정부의 이 중층적 메시지를 어떻게 읽어낼 지 주목된다.


조신 차장


입력시간 : 2005-06-23 14:11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