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돈 대가성 여부·도청자료 등 진상규명에 무게정계·재계·언론계 망라한 전방위 수사 예고
[X파일] 칼 뽑은 檢, 다 밝힐 수 있을까 삼성 돈 대가성 여부·도청자료 등 진상규명에 무게 정계·재계·언론계 망라한 전방위 수사 예고
“단검(短劍)을 쓸 것인지, 장검(長劍)을 쓸 것인지 선택만 남았다.” 서울중앙지검 고위관계자는 지난달 27일 ‘안기부(현 국정원) X파일 사건’에 대해 기자에게 ‘칼’얘기부터 꺼냈다. 며칠 전만해도 “솔직히 피하고 싶다”며 은근히 특검이 맡기를 기대하던 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런 비장함은 같은 날 아침 김종빈 검찰총장에게서도 묻어났다. “현재 남아있는 불법도청 테이프가 있다면 이를 모두 수거해서 살펴보겠다. 테이프 내용에 대해 본격 수사에 착수한다면 전 검찰력을 동원해서라도 철저히 조사하겠다.” 김 총장의 발언은 5일 전인 7월 22일 퇴근 길에 “불법도청으로 수집한 증거는 법정에서 증거능력이 없다. 테이프에서 언급된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공소시효가 지났다”며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180도 달랐다. X파일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서창희 부장검사)는 지난달 27일, 전 안기부 도청조직 ‘미림팀’팀장 공운영(58) 씨의 집과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한데 이어 같은 날 공 씨에게서 도청자료를 넘겨받아 MBC에 유출한 혐의(통신비밀보호법)를 받고 있는 재미동포 박인회(58) 씨를 긴급 체포해 수사하는 등 발빠른 행보를 보였다.
검찰이 도청 내용보다는 도청 행위 자체에 수사의 초점을 맞추는 듯한 종전의 태도를 바꿔 전방위 수사를 예고하면서 수사 범위도 넓어질 전망이다. 검찰이 참여연대의 고발 내용을 중심으로 수사할 경우 삼성이 건넨 자금의 규모와 대가성 여부, 삼성의 기아차 인수로비 의혹이 두 기둥이 된다. 수사대상도 삼성 관계자들과 언론사 사주, 일부 정치인들로 국한된다. 게다가 도청자료 자체가 불법이어서 증거로 인정하기 어렵고, 대부분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점, 당사자들이 혐의를 부인할 경우 마땅한 입증 방법이 없다는 애로가 있다. 하지만 검찰은 도청 자료의 불법성에 대한 수사를 기본으로 하면서‘진상규명’에 무게를 둬 수사 대상은 참여연대가 고발한 정재계, 검찰 인사들을 훨씬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검찰 주변에서는 X파일에 직ㆍ간접으로 연루된 전직 대통령과 권력 실세, 재벌 회장, 언론사 사주 등이 포함될 경우 1995년 ‘전두환ㆍ노태우 비자금 사건’이후 최대 규모가 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검찰 고위관계자는 “국민 대다수도 진상규명을 바라고 있다”면서 “지난 대선자금 수사에서 보였듯 원칙대로 성역 없이 수사할 것”이라고 해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만일 검찰이 장검(長劍)을 빼 들 경우 김영삼(YS)ㆍ김대중(DJ) 정권 사람들과 97년 대선과 관련된 인사들이 수사 대상에 오를 전망이다. 검찰은 지난달 26일 안기부 도청테이프 사건을 특수부가 아닌 공안2부에 배당, 불법 도청 및 도청의 활용 여부를 우선 규명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도청테이프의 진원지인 미림팀이 94년 YS 정권 시절에 부활된 만큼 당시 권력 라인에 있던 인사들이 수사 1순위로 거론된다. 특히 오정?전 안기부 1차장이 이번 사건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미림팀장이던 공 씨는 지난달 26일 자해하기 전 공개한 자술서에서 “1992년 미림팀장으로 일하다 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활동 중지 지시를 받아 평직원으로 근무했고, 94년 미림팀이 재구성됐다”고 주장했다. 전 국정원 직원 김기삼 씨도 “94년 초 오정소 안기부 인천지부장이 대공정책실장으로 부임하면서 재조직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검찰은 오 씨에 대해 출국 금지 조치를 취했고 미림팀 재구성을 지시한 윗선을 밝히는데 주력하고 있다. 국정원 관계자 등에 따르면 오 씨는 미림팀이 사회 고위층 인사들의 대화내용을 녹취록과 요약본으로 보고를 하면 이를 ‘이원종 정무수석→김현철 씨’로 이어지는 비선라인으로 전달하거나 직접 현철 씨에게 보고했다는 것이다. 주요 사안은 현철 씨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하기도 했다고 한다. 검찰은 오 씨에 대해 도청 지시 및 도청 활동여부 등을 조사할 것으로 알려졌다. 또 현철 씨와 이원종 씨, 당시 안기부장을 지낸 김덕ㆍ권영해 씨 등에게는 미림팀 부활 지시 여부, 도청 자료 이용 여부 등을 밝힌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현재 형집행정지로 출국이금지된 권영해 씨 외에 현철 씨와 이원종 씨 등의 출국금지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우에 따라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소환 또는 서면 조사를 통해 도청자료를 보고 받거나 이용했는지 여부 등을 밝힐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YS시대 인사들은 공소시효가 만료돼 법적으로는 처벌이 불가능한 상황이어서 진상규명 차원에서 조사가 진행될 전망이다.
YS와 DJ정권 실세들 수사 대상에 당시 실세였던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도청테이프를 재미교포 박인회 씨로부터 넘겨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박 씨는 지난달 26일 MBC와의 인터뷰에서 “공 씨의 복직을 돕기 위해 박 장관 집무실로 홍석현 회장과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 관련 녹취록을 들고 갔다”면서 “박 장관에게 (녹취록을)전하자 감사의 뜻을 전해왔다”고 밝혔다. 박 전 장관의 경우 도청자료를 전달받은 과정과 그것을 이용했는지 여부가 조사 대상이다.
97년 대선과 관련된 수사대상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삼성으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도된 인사들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홍석현 전 중앙일보 사장,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등이다. MBC 등에 보도된 도청자료에 따르면 이 회장, 이 구조조정본부장, 홍 전 사장 등이 97년 경 전ㆍ현직 국회의원과 정치인, 제15대 대통령선거 후보출마자 및 전ㆍ현직 검찰 고위간부와 법무부 고위간부들에게 삼성 자금을 전달한 것으로 나온다. 그 가운데서 홍석현-이학수의 대화내용처럼 삼성측이 이 전 총재측에 실제로 100억원을 건넸는지 여부가 핵심 수사 대상이다. 또 자금 전달 방침을 정한 삼성측 인물이 누구인지, 홍석현 전 사장이 연결고리로 등장한 배경, MBC 보도에서처럼 이 전 총재의 동생인 이회성 씨와 고흥길 의원(한나라당)이 각각 자금 창구와 전달자 역할을 했는지 등이 규명되어야 할 사항이다. 이밖에 검찰은 도청테이프 유포 과정에 개입한 전 미림팀원과 언론사 중 처음 테이프를 입수, 보도한 MBC 관계자 등에 대해서도 조사할 것으로 알려졌다. 안기부 불법도청은 그 실체가 밝혀진다 해도 공소시효, 증거능력 등의 현실적인 문제로 법적 제재가 무뎌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진상 규명에 따른 정치, 경제, 사회 등에 미치는 파장은 상당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계와 재계, 언론 등이 검찰의 칼 끝을 주목하는 이유다.
입력시간 : 2005-08-04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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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