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재선거 후폭풍

0 대 4. 단지 네 선거구의 재선거 결과지만 후폭풍이 거세다. 여야는 물론 청와대까지 폭풍의 영향권에 들어 있다. 이번 선거에 담긴 함의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다.

참패한 여당은 “지역선거일 뿐”이라며 애써 자위하지만 충격의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당 지도부 사퇴론과 조기 전당대회론이 끊이질 않고 심지어 노 대통령 책임론까지 제기되고 있다. 재선거 결과에 따른 계파간 갈등은 언제든 점화할 여지를 남겨둔 상태다.

한나라당은 완승의 기쁨을 만끽하면서도 ‘재보선 전문당’이라는 오명을 우려해 몸을 낮추고 있다.

맹형규 정책위의장은 “이번 재보선 결과는 한나라당의 승리라기보다 열린우리당이 패배한 측면이 강하다”며 ‘반사 이익’을 인정했다.

수도권의 한 재선 의원은 “4 대 0이라는 점수는 좋으나, 게임내용이 좋지 않다”며 자만을 경계했다.

민주노동당은 안방에서 패배한데다 노동계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입지가 약화됐다. 민주당은 호남표에 기대를 걸었으나 ‘지역당’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당과 소수 정당의 상황이 악화하면서 중부권 신당과 고건 전 총리측이 정국의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10ㆍ26 재선거 결과가 몰고 온 후폭풍은 겉으로 드러난 반향에 머물지 않는다. 여야에 공통적으로 내재한 견고한 틀과 속성을 흔들면서 기존의 정치판을 깨뜨릴 조짐을 보이고 있다.

범 친노진영 변화로 정국 지형 영향

여권은 당(黨)-청(靑)-정(政) 간 역학관계에 변화가 불가피하고 차기 대선 주자들의 행보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한바탕 소용돌이가 예상된다.

여권의 정세를 규정하는 4개의 기본축인 노무현 대통령과 청와대, 당내 정동영 통일부 장관 진영과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진영, 문희상 의장을 포함한 범 친노 진영에 변화가 예상됨에 따라 향후 정국 지형도 적지않은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우선 노 대통령과 청와대는 당ㆍ정에 대한 권위를 잃지 않으면서 통할을 강화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27일 “선거결과를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평가로 받아들인다”며 선거결과에 따른 청와대 책임을 인정했다.

노 대통령의 발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향후 대규모 당ㆍ정ㆍ청 개편을 포함, 국정운영 기조 및 여권 운영시스템에 상당한 변화가 점쳐진다.

10·26 재선거 패배후 열린우리당 복귀가 거론되고 있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이해찬 국무총리(왼쪽부터). 연합뉴스

청와대 주변에서는 연말을 전후해 경제총리 기용을 포함한 대폭 개각을 검토 중이며 민생에 중심을 둔 국정운영을 펼칠 것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반면 노 대통령이 선거 패배에 따른 책임을 인정한 것은 우리당이 지도부 책임론을 둘러싸고 내홍에 휩싸이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 꺼낸 봉합책에 불과하다는 분석이 있다.

현재의 문희상 체제가 무너지면 차기 대선의 유력 주자인 정동영ㆍ김근태 장관이 조기에 당에 복귀, 당ㆍ청간 무게 중심도 당쪽으로 쏠려 급격한 레임덕(권력 누수)이 진행될 것을 우려해 청와대가 서둘러 사태 봉합에 나섰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27일 “당은 (선거결과에)동요치 말고 정기국회에 전념하도록 당부하며, 개인적인 이견과 견해가 있더라도 국민들에게 우려가 끼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고 발언한 것은 문 의장 체제를 우회적으로 지원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이 노 대통령의 발언 취지에 대해 “인적쇄신이나 정책기조 변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한 것은 그 같은 해석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당내 사정은 복잡하다. 문희상 의장-배기선 사무총장 등 지도부와 의정연구센터, 국참연, 참정연 등 범 친노 진영은 대체로 노 대통령의 의중에 동조하는 경향이다.

친노직계로 분류되는 서갑원 의원은 “절차를 통해 당선된 지도부를 선거 때마다 물러가라고 하면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냐”며 연말까지는 문희상 체제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참정연의 유시민 중앙상임위원은 “재선거 패배에 대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고 내년 2월 임시전당대회를 열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정청래 초선 의원도 “문 의장의 사퇴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정동영·김근태 당 복귀 놓고 손익계산 분주

당내 양대 축인 정동영(DY) 장관과 김근태(GT) 장관 진영은 현 지도부에 비판적이지만 조기 당 복귀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이다.

무엇보다 당에 복귀, 당의 간판이 될 경우 노 대통령과의 ‘관계 정립’을 큰 부담으로 여기고 있다.

DY계로 분류되는 한 중진은 “당에 복귀하더라도 뒤로 빠져 있으면 (복귀의)의미가 없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당의 얼굴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대선 레이스가 본격화하고 대통령과 발을 맞추지 못하면 갈등관계로 비춰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 “2007년 대선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데 자칫 공격을 당해 본 무대에 서기 전에 상처를 입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GT계의 초선 의원은 “차기 유력 주자가 당을 맡아 쇄신하게 되면 대통령과의 갈등은 불가피하다”며 “당을 살리는 것이 국민을 위하는 것이라면 건전한 갈등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양 진영 중 조기 당 복귀에 더 많은 고민을 하는 쪽은 GT계다. 정 장관에 비해 낮은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 상황에서 당 복귀를 미룰 경우 당내 입지 마련이 어려울 수 있고 범 여권이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다.

하지만 선거결과를 이유로 대통령과 각을 세우며 지도부 교체나 조기전대를 주장할 경우 ‘분열주의자’로 역풍을 맞을 수도 있어 김 장관이 고민하고 있다는 게 측근의 설명이다.

김 장관이 26일 자신의 당 복귀 여부에 대해 “대통령의 판단을 존중하겠다”고 밝힌 것도 그러한 배경 때문이라는 전언이다.

이인영ㆍ우원식 의원 등은 김 장관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김 장관 자신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초선이 깃발을 들고 나설 경우 오히려 역효과를 부를 수 있다”면서 “유인태ㆍ임채정 의원 등 중진급이 치고 나오는 게 모양이 낫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현실로 이어질 지는 미지수다.

27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등 지도부가 10·26 재선거 당선자들에게 화환을 준 뒤 박수를 치고 있다. 왼쪽부터 김무성 사무총장, 강재섭 원내대표, 유승민 당선자 (대구 동을), 박근혜 대표, 정진섭 당선자 (경기 광주), 임해규 당선자 (경기 부천 원미갑). 오대근 기자

이에 반해 DY 진영은 상대적으로 느긋한 모습이다. 주어지는 상황변화에 따라 운신하면 된다는 분위기다.

DY계로 분류되는 김한길 의원은 “누가 지도부에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창당 후 계속돼온 정치실험을 끝내고 본격적인 정치를 펼칠 틀을 만들 때”라며 지도부 인책론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 김현미ㆍ박영선 의원 등도 같은 입장을 나타냈다.

정 장관 진영의 한 핵심 의원은 “대권주자들이 구조적으로 패배 가능성이 높은 지방선거를 완전히 책임지는 형식으로 나서면 정치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을 수 있다”며 “당 복귀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이 어려움에 처해 요청이 있으면 피할 의사가 없다”는 게 정 장관의 입장이라고 이 의원은 설명했다.

DY계 의원들의 모임인 ‘바른정치모임’의 한 의원은 “상임중앙위원 중 누군가가 지도부 교체나 조기전대를 치고 나와 준다면 정 장관의 당 복귀 시점도 빨라질 수 있다”고 해 정 장관이 늦어도 내년 5월 지방선거 전에 당에 복귀할 것이 점쳐졌다.

박근혜 친정체제 강화 계기

한나라당은 4개 선거구를 석권, 지도부 교체론에 휩싸인 우리당에 비해 상대적 여유를 갖게 됐다.

특히 박근혜 대표는 재선거를 진두지휘해 승리함으로써 친정 체제가 더욱 공고화할 전망이다.

박 대표는 이번 재선거가 여권에 대한 중간평가의 의미를 띈다는 점을 살려 하반기에 있을 여권의 선거구제 개편 협상과 연말 사학법 개정 및 국가보안법 철폐 등에서 강공 입장을 취할 것이 예상된다.

아울러 강정구 사건으로 인한 ‘국가의 정체성’과 ‘색깔론’ 시비에 대한 따가운 여론을 물리치는 동시에 노 정권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정가에서는 박 대표가 재선거 완승으로 당내 대선 레이스에서 탄력을 받게 됐다는 평가다.

‘청계천 효과’에 힘입어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 대표를 따돌리기 시작한 이명박 서울시장의 상승세를 억제하는 성과를 거뒀다는 것.

게다가 대구 동을 선거구에 이회창 전 총재의 오른팔인 유승민 후보를 공천하고 이 전 총재의 지원유세를 받아 ‘창심(昌心)’까지 덤으로 얻었다는 분석도 있다.

반면 재선거 승리를 박 대표만의 공으로 돌리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있다. 재선거 특성상 중장년이 중심이 된 낮은 투표율로 한나라당에 유리한 구도인데다 강정구 교수 파문으로 보수층을 결집하는 이득을 봤다는 분석이다.

한마디로 한나라당의 승리가 아니라 우리당의 패배라는 것이다. 오히려 텃밭인 대구에서 박 대표의 핵심 측근을 내세웠음에도 여당 후보가 40%를 넘는 지지를 얻은 것은 예사롭지 않는 징후라는 비판도 있다.

게다가 내년 지방선거와 차기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당의 체질변화가 필수적인데 박 대표로는 외연을 넓히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대선레이스도 박 대표가 재선거 승리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기보다는 청계천 효과로 이 시장이 뜨면서 박 대표의 지도력에 회의를 품는 기류를 감안할 때 당내 대권경쟁이 이제부터 막이 올랐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또 다른 잠룡인 손학규 경기지사는 이번 재선거에서 이른바 ‘손학규사람’으로 알려진 임해규 부천시의원과 정진섭 경기지사 특보가 당선돼 우군을 확보했다는 평가다.

일각에서는 낮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당내 주자들 중 ‘개혁성’에서 앞서고 박근혜 대표와 파트너로 점쳐지면서 최근 주가가 상승하고 있다.

한편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자민련은 이번 재선거 결과 소수 정당의 한계를 드러내 향후 타 정당과의 연정(또는 연대)이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민노당은 단독법안 제출이 가능한 10석을 놓치게 되면서 향후 여야 관계에서의 정책연대나 연말 개혁입법 처리과정에서의 위상이 크게 줄어들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실정이다.

민노당 지도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우리당과의 소연정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이유다.

민주당과 자민련 역시 이번 선거에서 소수당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지방선거를 위해 '연정'을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

심대평 충남지사의 중부권 신당과 고건 전 총리측의 신당 움직임이 점차 주목받는 상황이다.


박종진 기자 jjpark@hk.c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