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방북 예상에 위조달러 문제 등 냉기류 해소 역할 할 지 주목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곧 북한을 방문한다.

김 전 대통령은 “북한 쪽에서 와 달라는 연락이 수 차례 있었고, 노무현 대통령도 북한을 다녀와 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해 평양을 방문한다”고 밝혔다. 방북 시기와 관련해서는 “건강이 변수”라고 말했다.

그러나 건강보다는 단순히 기념 방문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 6자 회담 등에 변수로 개입할 ‘타이밍’을 찾고 있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사실 최근 북한 인권 문제와 위조 달러 문제를 지렛대로 미 행정부의 대북 정책이 강경으로 선회하고 있는 가운데 김 전 대통령의 방북은 의미 있는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김 전 대통령이 평양 방문에서 풀어놓을 ‘보따리’는 무엇일까. 우선 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 제안이다. 김 전 대통령은 악화 일로의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2006년에 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의 필요성을 강조할 것 같다.

세종연구소 장성장 연구위원도 ‘2006년 북한 정세와 남북관계’에 대한 분석에서 “북한은 국제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2006년에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해 남북관계를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끌어올려놓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며 “2007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므로 2006년을 넘기면 수년간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이 낮다”는 분석 역시 이런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공적 임무를 띠는 특사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운신 폭을 묶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는 평양 방문에서는 △ 6자회담 상설화 제안 △ 미국에 대한 대응 △ 일본 문제 해결 △ 국제사회의 비판에 대한 대응 △ 21세기 한민족의 평화적 협력과 통일방안 등 폭 넓은 주제를 자유롭게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선제 양보' 등 북한 달래기에 나설 듯

일각에서는 미국이 강경 발언은 하고 있지만 네오콘 말처럼 군사행동을 할 힘이 없다는 정세 판단 아래 김 전 대통령은 북한에게 대담한 ‘선제 양보’ 전략을 요청하고, 동시에 미국에 대해서는 핵 문제와 인도적 인권, 정치적 인권을 분리해서 접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낼 것으로 전망한다.

미국 행정부가 아직 6자 회담과 인권문제를 분명하게 연계시키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평양 당국이 주도권을 쥘 여지가 있다는 판단이다.

한반도 문제 전문가이자 싱크탱크 ‘포린 폴리시 인 포거스(www.fpif.org)’의 존 페퍼(John Feffer)는 최근 ‘연계냐 아니냐’라는 제목의 기고에서 “미국에서도 북한 인권에 문제가 있다는 공감대는 넓지만 인권 개선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합의된 바는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즉 북한 인권에 대한 인식이 행정부와 의회, 시민사회(NGO)의 차원에서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페퍼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에서 북한 인권에 대해 가장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곳이 의회다.

의회는 인권문제를 독재국가에 대한 정권 교체(Regime Change) 전략의 골격으로 삼고, 2005년 민주주의 증진법(Advanced Democracy Act)을 상정했다. 페퍼에 따르면 이 법은 정권 교체를 미 국무부의 최우선 임무로 상정해 세력균형 동맹을 통한 미국의 이익추구라는 고전적 목표를 폐기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 법으로 인해 북한과 미국의 관계정상화와 경제관계 증진은 더욱 어렵게 될 것이고, 북한이 내적인 정치구조를 바꾸지 않을 경우 미국이 북한을 경제적으로 더 고립시킬 수 있는 조치의 근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시민사회 차원에서는 기독교 단체들이 종교적 자유의 관점에서 인권 문제를 제기하고 있고, 이는 교회의 지원과 신앙에 기초한 여론 덕에 정치적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주류 인권운동 조직은 복음주의적 열정으로 무장한 기독교운동 단체의 강경 행보에 거리를 두고 있다는 분석이다.

마지막으로 행정부 정책 결정자들은 핵 문제와 인도적 지원을 인권 문제와 연계 시킬 것인지에 대해 아직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고 페퍼는 판단한다. 실제로 6자 회담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도 4차 6자 회담 당시 “인권을 무기로 삼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밝혔다.

미 행정부 내 네오콘 강경파와 실용주의적 중도파 간의 절충을 모색하는 힐 차관보는 인권문제 해결 없이 북한은 국제사회에 합류할 수 없다는 정도의 발언으로 수위를 조절하고 있다. 이는 핵 문제와 인권을 드러내놓고 연계시키지 않으면서 인권문제를 가시권 안에 두고 있다는 설명이다.

현재 북한 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이 미국 내에 광범위하게 확산됐고 정치권이 여론 압박을 많이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행정부 내 정책 결정자들은 아직 절충주의적 기류가 강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한 이 점이 김 전 대통령의 운신의 폭이기도 하다.

북 · 미 관계 완화에 역할 기대

다만 최근 눈덩이처럼 점점 사태가 커져 가고있는 위조 달러, 일명 슈퍼노트(Supernote 미국 사법당국이 부르는 공식명칭은 C-14342) 문제는 인권문제와 그 성격을 달리한다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우선 힐 차관보는 북한의 위조 달러 문제와 관련해 미국이 거래를 동결한 마카오 뱅코델타아시아은행에 대한 제재 등은 핵문제와 무관한 불법행위에 따른 순수 사법절차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 정부는 왜 1990년대 이후 불거진 북한의 위조 달러 문제를 왜 지금에 와서 정색을 하고 나섰는가.

이에 대해 미국 의회조사국(CRS)에서 북한의 위폐, 마약거래 등을 조사해 온 라파엘 펄 선임 연구원이 “부시 행정부는 종전에는 북한의 위폐 제조 등 불법 행위자체만을 들여다봤지만, 지금은 그런 불법 행위로 벌어들인 돈의 용처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 설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 미 당국은 위조지폐 유통에 연루된 혐의로 기소된 아일랜드 공화군(IRA) 테러리스트 출신인 션 갈랜드 아일랜드 노동당 당수가 북한 정부 관료와 접촉한 증거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 입장에선 북한이 국제 테러조직과 연결돼 슈퍼노트뿐 아니라 핵 물질까지 넘길 수 있다는 가장 우려하는 시나리오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나아가 미국은 세계 기축 통화인 달러가 공격당했다는 논리로까지 확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 의회 조사국 펄 연구원은 “달러는 미국의 군사력 유지, 자유 민주주의 전파의 근간”이라며 “북한은 미국 힘의 원천을 공격했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알렉산더 브시바오 주한 미국대사가 ‘북한은 범죄정권(Criminal Regime)’이라고 맹비난한 것이나 힐 차관보도 브시바오 대사를 거들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 정부도 위조 달러 문제와 관련, 이는 북-미 양자 이슈로 규정하고 핵 문제와 분리하려는 원칙이지만 점차 북한이 위조 달러를 제조, 유통한 것이 사실이라면 용납하기 곤란하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6자 회담 한국 수석대표인 송민순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위조지폐 문제는 법 집행 차원의 문제이며, 이에 관해 한-미 양국 사이에는 이견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한편 미국 내 대북한 강경 여론이 거세지는 가운데 미국의 안보 일변도 한반도 정책에 대한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에 국한된 한반도 정책의 초점을 한반도 통일로 확대한다면 한미동맹 강화는 물론 북한의 핵무장 해제 등 미국의 목표를 더 쉽게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데이비드 강 미국 다트머스 교수는 중도성향 미국 싱크탱크 ‘노틸러스 연구소’에 ‘더 나은 한반도 전략’이란 최근 기고를 통해 “미국은 한반도 정책을 대테러 정책 연장선에서만 보고, 한국에게 대북정책은 핵문제를 넘어 통일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강 교수는 한국과 미국 정부가 대북 정책을 놓고 고비마다 갈등을 빚는 이유는 결국 정책의 우선순위 차이 때문이란 지적이다.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