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박 8일간 중국시장경제 발원지 순례, 대내외에 의미있는 메시지 던져

‘남순강화(南巡講話)’.

1992년 1월 덩샤오핑(鄧小平)은 주하이(珠海)에서 상하이(上海)에 이르는 중국 남부지역을 순회한 뒤 중국에 사회주의식 시장경제의 문을 활짝 열었다.

덩의 남순 행보에는 89년 천안문 사태로 중국 지도부 내부에서 보수주의가 팽배하면서 개혁ㆍ개방 노선에 대한 회의론이 대두하자, 이를 일소하려는 전략이 숨어 있었다.

2006년 1월, 이번에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00명에 가까운 수행원을 이끌고 14년 전 덩샤오핑이 갔던 길을 따라 7박8일간(10일~18일) 중국 ‘남순’을 했다.

소위 북한판 ‘남순강화’이다. 김 위원장의 발길은 허베이(湖北)성의 우한(武漢)과 우창(武昌), 광둥(廣東)성의 주하이(珠海), 광저우(廣州), 선전(深천?) 등 중국식 시장경제의 발원지를 따라 이어졌다.

이후 17일 베이징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을 만났다. 그렇다면 김 위원장의 ‘남순’ 행보에는 어떤 뜻이 숨어 있을까.

미국의 대북압박 탈출 모색 의도

우선 김 위원장은 이번 방중을 통해 ‘우리도 개혁ㆍ개방의 길을 걷는다’는 메시지를 던져 최근 미국의 압박으로부터 탈출을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 일행은 중국 최초의 경제 특구인 선전의 난산(南山) 과학기술단지 내 하이테크 업체와 공업구를 시찰한 것은 물론 대학가까지 둘러 봤다.

2001년 상하이를 보고 “천지개벽”이라고 했던 김 위원장은 이번 ‘남순’에선 "광둥성에서 일어난 전변(발전)을 목격하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고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전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10월 양국 정상회담에서 후 주석이 장황하게 설명한 사회주의식 시장경제의 성과에 대해 따라 배우겠다는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다시 한 번 인정한 셈이다.

이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중국의 입지를 강화시켜주는 대신 중국으로부터는 정치ㆍ경제적 지원을 받겠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동시에 북한은 자신들도 국제사회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겠다는데 미국이 막고 있다는 메시지를 세계에 던져 미국 행정부 내 강경파를 압박하겠다는 중층적 의도도 엿보인다.

개혁ㆍ개방을 위한 행보를 표방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6자회담과 위폐 문제 등을 중국과 협의하는 식의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략이라는 분석이다.

현재 북한에게 ‘발등의 불’은 위폐 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금융 제재이다. 최근 미국의 대북 제재는 북한 정권에 예상 밖의 큰 타격을 주고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장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계좌의 인출 금지 조치로 막대한 액수의 김 위원장 비자금이 묶였고, 다른 국제 은행들도 북한과의 거래에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김정일 정권의 재정이 ‘뇌사 상태’에 빠질 수 있을 만큼 심각할 수 있다는 것이 북한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9일 “핏줄을 막아 우리를 질식시키려는 말살 행위”라고 미국을 신랄하게 비난한 것도 북한이 처한 다급함을 반증한다.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서둘려 중국을 찾은 것은 북-중 간의 전통적 협력관계를 강화하는 모양새이지만, 그 이면에는 북한 정권의 ‘돈줄’을 옥죄는 미국에 대해 중국이 막후 정치적 해결사 역할을 해 줄 것을 긴급 요청한 것으로 본다.

미국 당국의 비공식 조사에 의하면, 북한은 100달러 위조 지폐, 이른바 ‘수퍼노트’ 뿐만 아니라 일본의 엔화도 위조해 왔고 헤로인 등 마약류, 위조 약품, 위조 담배 등의 생산을 통해 연간 5억 달러가 넘는 불법 수익금을 챙기고 있는 것으로 의심 받고 있다.

특히 북한의 불법 행위는 옛 소련의 붕괴로 북한의 경제 사정이 급격히 악화하기 시작한 90년대 이후 집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17일 북-중 베이징 정상회담에서 후 주석이 김 위원장에게 6자회담 재개를 촉구하자, 김 위원장은 ‘6자회담의 난관’을 언급했다.

지난 10일부터 18일까지 중국을 비공식 방문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왼쪽)이 17일 베이징에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맨 오른쪽)과 회담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정상회담 다음날인 18일 “김 위원장은 6자회담 진전을 위한 방도를 찾기 위해 중국과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보도하며 이러한 사실을 확인했다.

김 위원장이 말한 ‘난관’은 미국이 위폐 문제로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에 개설된 북한의 계좌를 동결한 것을 뜻한다.

여기서 후 주석은 김 위원장에게 “지금까지 유지돼온 6자회담 기조가 중요하다”며 위조 달러가 6자회담의 틀을 깨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면 후 주석은 이 자리에서 북한 측에 위폐 문제를 풀 모종의 카드를 제시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특히 김 위원장의 귀국 직후인 18일 6자회담 수석대표인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과 크리스토프 힐 미 국무부 차관보가 베이징에서 전격 회동했다.

이는 김 위원장이 언급한 ‘난관’에 대해 북-중 간 모종의 합의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즉 북한과 중국이 미국을 상대로 제시할 카드가 준비됐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방중 앞서 북·미·중 물밑거래 분석도

김 위원장의 방중에 앞서 알렉산드 버시바우 주한 미대사가 12일 “북한의 불법 활동은 개별기업 또는 국가와 연관된 기업을 통해 이뤄질 수도 있다”고 언급한 대목도 미국과 중국 간의 사전에 물밑 거래가 있었다는 점을 짐작케 한다.

소식통들이 결국 북한의 위폐는 정부 차원이 아닌 개별기업 또는 개인이 제조한 것이며, 북한 당국이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선에서 마무리될 것으로 전망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조만간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 문제가 풀린다면 결국 중국의 중재가 먹혀 들었다는 얘기다. 이럴 경우 북한은 중국측에 뭔가 내놓아야 할 상황이 된다.

북한이 줄 선물은 우선은 중국의 요구대로 6자회담의 조속한 재개가 될 것으로 추측된다. 다음은 중국의 지원을 전제로 한 개혁ㆍ개방 조치이다.

2002년 자본주의 요소를 제한적으로 도입했던 7ㆍ1 경제개선조치와 같은 개혁과 북-중 국경지역의 경제특구 개방이 이에 해당한다.

통일연구원 허문영 박사는 “개방에는 적극적이나 개혁에는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김 위원장의 태도로 비춰볼 때, 7ㆍ1 경제개선조치 같은 개혁보다는 중국과 가까운 지역을 중국자본에 개방하는 경제특구로 새로 지정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또 북한 사정에 밝은 한 탈북자도 “북한 당국은 개혁ㆍ개방 대신 경제특구 전략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김 위원장은 체제 개혁보다는 대외경제교류와 합작을 통한 경제특구 활성화 쪽을 선택할 것으로 전망이다.

경제특구 활성화는 북한 내부 경제에 변화의 충격을 최소화하면서도 당장에 정부의 수입을 늘릴 수 있다는 점도 북한 당국에게는 개혁보다 매력적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7일 후진타오 주석과 함께 중국농업과학원 직물과학연구소를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더욱이 체제 개혁의 대표적 실험인 7ㆍ1 경제개선조치는 이후 엄청난 인플레이션 등 체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후유증을 겪었다는 점도 이같은 전망을 뒷받침한다.

중국에 개방할 경제특구에 대해 허 박사는 “몇 년 전부터 북한과 중국이 추진해 온 평안북도 철산군 대계도(장군항 독립경제구)가 유력하다”고 전했다.

이렇게 되면 한국의 자본에 문을 연 ‘개성공업단지’와 중국 투자를 겨냥한 ‘장군항 독립경제구’가 북한의 개방 정책의 양 축이 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대계도의 경우 산업 인프라가 전혀 갖춰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신의주 부근의 다른 지역을 거론한다.

여하튼 김 위원장은 이번 방문에서 6자회담과 개혁ㆍ개방에 대한 중국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과 동시에 반대급부로 중국으로부터 과감한 후원을 요청했을 것이란 관측이 설득력있게 들린다.

중국은 북한에 상당한 규모의 경제 지원을 제공하고, 북한은 중국에 북한의 지하자원 등 개발 협력과 중국기업의 투자 여건의 조성을 약속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과 중국은 지난해 10월 평양에서 열린 정상회담을 통해 처음으로 ‘상호투자보호협정’을 체결했다. 이처럼 투자와 경제기술교류에 필요한 법적 제도를 마련한 사실도 양국간 ‘주고 받기’ 거래 가능성을 높여준다.

피터 벡 국제위기감시기구 한국사무소장은 “후 주석이 지난해 정상회담 때 북한에 20억 달러 정도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걸 확실히 하고 경제협력을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며 중국의 대규모 지원설을 주목했다.

그러나 20억 달러 지원설에 대해 당시 후 주석의 평양 방문을 수행한 왕자루이(王家瑞)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은 “들은 바 없다”며 부인했었다.

북·중 밀착으로 한국의 대북영향력 감소 우려

한편 전문가들은 북한의 중국에 대한 밀착은 한국의 입장에서 반길 만한 일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북한이 중국으로부터 에너지와 대규모 경협을 보장받게 된다면 상대적으로 우리 정부의 대북 영향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향후 6자회담의 조정자 역할이나 남북경협의 반대급부를 챙기기가 더욱 까다로워진다는 얘기다.

개방이든 개혁이든 북한의 움직임은 근본적으로 6자회담의 진전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이른 시일 내에 북한의 가시적 변화를 기대하기는 당분간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