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서 카디마당 1당 등극, 실용 노선 득세

압도적 승자 없는 혼전. 좌우 극단적 이념 대립보다는 실용 노선의 우선. 대 팔레스타인 관계 대신 종교, 인종, 사회 복지 등 다양한 이슈의 등장. 지난달 28일 치러진 이스라엘 총선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중도 카디마당의 1당 등극

중도 정당 카디마당의 1당 등극에 대해 워싱턴 포스트(WP)는 “58년 이스라엘 역사에서 리쿠드당(우익)과 노동당(좌익)이 아닌 중도를 지향해 성공한 정당은 없었다”며 “1월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무장단체 하마스가 승리한 것만큼 놀라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카디마당은 사실 아리엘 샤론 총리 개인에 대한 지지를 밑거름 삼아 만들어졌다.

지난해 11월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의 정착촌 철수를 놓고 리쿠드당 내 갈등이 심해지자 샤론 총리는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 권한 대행 등 당내 지지 세력을 이끌고 전격 탈당, 시몬 페레스 전 총리 등 노동당 내 우파 세력을 모아 카디마당을 꾸렸다.

1월 샤론 총리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정계 복귀가 사실상 불가능해지면서 카디마는 큰 위기를 맞는다. 게다가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하마스가 승리하면서 상황은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착촌 철수로 ‘팔레스타인만 좋은 일 시킨다’는 반발이 컸던 상황에서 하마스가 등장, 이스라엘 내 강경파에게 목소리를 키울 기회를 준 것이다. 심지어 총선에서 리쿠드당이 승리할 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왔다.

위기의 카디마당에는 올메르트 총리 권한 대행이 있었다. 그는 ‘샤론은 없지만 그의 정책은 그대로 잇는다’며 유권자를 안심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여기에 마지막 승부수 ‘예리코 교도소 습격’도 힘을 발휘했다.

올메르트 권한 대행은 지지도가 주춤하자 총선을 2주 앞둔 지난달 14일 이스라엘 군이 헬기, 탱크를 동원해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FLP) 조직원들이 수감된 교도소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 사건 직후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 카디마당은 예상 의석수가 38석에서 43석까지 오르는 효과를 거뒀다.

카디마당의 승리는 ‘줄 것은 주고 얻을 것을 얻겠다’는 샤론 식 영토분쟁 해법을 유권자들이 선택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샤론 총리나 올메르트 권한 대행 모두 1967년 전쟁으로 점령한 가자 지구나 요르단강 서안에서 팔레스타인 거주지에 둘러싸여 고립 상태에 있는 소규모 정착촌은 과감히 철수하는 대신 서안에 흩어져 있는 나머지 정착촌은 이스라엘 국경 가까이로 통합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나아가 이를 보호하는 길이 724㎞ 분리 장벽을 건설, 2010년까지 국경을 새로 긋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CSM)는 “이스라엘 국민이 팔레스타인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좌파적 이상과 피를 보더라도 대 이스라엘 건국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우파적 이상의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적 선택을 했다”고 분석했다.

‘정착촌 철수 반대’라는 네거티브 전략을 썼던 강경 우파 벤야민 네탄야후 전 총리의 리쿠드당이 예상보다 훨씬 저조한 성적(11석)으로 제 5당으로 추락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올메르트 권한 대행으로서는 1당 등극으로 ‘2인자’라는 꼬리표를 떼는 기회를 얻긴 했지만 정국 주도권을 확실히 거머쥐겠다는 바람은 뜻대로 이뤄내지 못했다는 평가다. 카디마당이 얻은 28석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예상(최소 33석~최대 43석)에 훨씬 못 미치는 결과다.

틈새 공략에 성공한 군소정당의 대약진

오히려 총선의 진정한 승자는 군소 정당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무명에서 단숨에 3당(13석)에 오르는 샤스당, 2석짜리 정당에서 4당(12석)으로 상승한 우리집 이스라엘당 그리고 7석을 얻은 길(GIL) 당이 그 주인공이다. 카디마당, 노동당, 리쿠드당 등 기존 정치 세력이 얻은 의석 수는 과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59석에 불과하다.

CSM는 이들의 성공에 대해 “대 팔레스타인 관계를 비롯한 이념이 선거를 좌우했던 데 비해 이번에는 종교, 출신 민족, 복지 예산 등 다양한 이슈가 표에 반영된 때문”이라며 “이들은 이스라엘 내 정치뿐만 아니라 대 팔레스타인 관계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들의 성공 비결은 특정 유권자를 집중 공략한 것이었다.

우리집 이스라엘당은 전체 유권자의 15%(74만여 명)를 차지하는 소련계 이민자 붙잡기에 성공했다.

중심에는 이비그도르 리버맨(48) 당수가 있다. 몰도바 출신으로 20년 전 이민 온 그는 “이스라엘 내 모든 아랍계 이민자는 자기 나라로 돌려 보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강경했다. 바로 이 점이 소련계 유권자들을 사로잡았다.

이스라엘에는 옛 소련계 이민자는 130만여 명이 살고 있는데 대부분 저소득층으로 아랍계 이민자가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며 큰 반감을 갖고 있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가 저지르는 폭탄 테러의 주요 희생자도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가난한 소련계 이민자다. 샤론 총리가 이들로부터 지지를 얻은 것은 그가 러시아 출신이라는 점 말고도 팔레스타인에 대해 강경 노선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리버맨 당수는 “정착촌 철수를 추진하는 카디마당이나 저소득층 복지 예산을 삭감하려는 리쿠드당은 우리 목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는다”며 “우리의 안전과 일자리는 스스로 지켜 나가자”고 외쳤고 이것이 통했다.

이스라엘 연금수령자들을 뜻하는 히브리 단어의 첫 철자를 모은‘길(GIL)’당은 카디마당, 리쿠드당 등 기존 거대 정당이 시장 중심의 경제 개혁을 추진한다며 예산 축소를 위해 연금 규모를 줄이려고 하자 이를 막겠다며 나섰다.

비록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요원 출신 라파엘 아이탄(79)이 만든 노인 정당이지만 이스라엘 전체 인구 중 10%가 넘는 75만명 은퇴자들뿐만 아니라 은퇴를 준비하고 있는 예비 퇴직자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

연정과 대 하마스 협상은 여전히 안개 속

과반 의석을 얻는데 실패한 카디마당은 이제 짝 찾기에 바빠질 것으로 보인다. 일단 정착촌 철수라는 흐름에 큰 이견이 없는 노동당과 손잡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두 당(48석)만으로는 안정 의석인 과반(61석)을 채우지 못한다.

현지 언론들은 3당 샤스당과 길당이 또 다른 연정 상대로 유력하다고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올메르트 총리로서는 이들과 손잡기 위해서는 복지 예산 증액이라는 당근을 던져주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일부에서는 샤론 총리에 절대 지지를 보냈던 소련계 이민자들의 지지를 끌어들이기 위해 우리집 이스라엘당과 손잡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정착촌 철수를 절대 반대한다는 점이 걸림돌이다.

팔레스타인과 하마스 사이 기류는 더 차가워질 것으로 보인다. 뉴욕 타임스(NYT)는 “대화 없는 일방주의 시대가 시작했다”고 전했다.

올메르트 총리는 총선 직후 “대 이스라엘 건설이라는 우리의 꿈은 여전하다”면서 “하지만 현실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 양보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언뜻 보면 줄곧 “하마스가 무기를 버리지 않는 한 협상은 없다”면서 강경한 자세에서 물러선 듯 보이지만 이는 오히려 하마스를 떠보려는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 CSM의 분석이다.

대 이스라엘 강경 노선을 주장하는 하마스와 이스라엘과 대화를 해야 한다는 마흐무드 압바스 자치정부 수반의 파타당 사이에 불협화음을 조장, 하마스의 기를 꺾겠다는 의도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대신해 거둬온 월 5,000만 달러의 세수 이체를 중단한데 이어 또 다른 제재 방안을 찾고 있다.

이에 질세라 29일 공식 출범한 하마스 내각은 20석으로 2당에 오르는 선전을 펼친 노동당을 비공식 초청하면서 카디마당과 노동당 사이에 틈 벌리기를 시도하는 등 신경전은 갈수록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스마일 하니야 총리는 “이스라엘이 먼저 팔레스타인인의 권리와 국가를 인정해야 한다”며 “그것이 실현되면 우리 역시 이스라엘 인정과 무장투쟁 포기에 대해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밝혔다.

게다가 올메르트 총리의 일방적 정착촌 철수와 국경선 획정에 대해서 이스라엘 내 우익 정당과 팔레스타인 모두 강하게 반대하고 있어 중동 평화협상에 당분간 짙은 먹구름이 낄 것으로 보인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