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미폰 태국 국왕, 탁신 총리 사임 이끌며 혼란 정국 수습에 '물꼬'

▲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왼쪽), 탁신 치나왓 태국 총리
탁신 치나왓(57) 태국 총리는 4일 오후 푸미폰 아둔야뎃(79) 국왕을 알현하고 나온 뒤 이날 밤 “즉위 60년을 맞는 국왕을 존중, 나라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라는 배경 설명과 함께 총리직 사퇴를 공식 발표했다.

탁신 총리가 퇴진 압력이란 정국 돌파를 위해 2일 실시한 조기 총선이후 자신이 당수로 있는 여당 ‘타이락타이당(TRT)’이 승리했기 때문에 “사임할 이유가 없다”고 강경 입장을 밝힌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는 1998년 TRT를 창당한 뒤 2001년 총선과 지난해 2월 총선에서 태국 선거사상 유례가 없는 압도적인 지지로 연임에 성공한 최초의 지도자였다.

이처럼 태국 현대사에서 가장 강력한 총리라는 평가를 받았던 탁신 총리가 퇴진을 선언한 결정적 배경에는 ‘살아있는 부처’로 추앙 받는 푸미폰 국왕이 있었다는 게 한결 같은 평가다.

올해로 재위 60주년 푸미폰 국왕

절대 군주국이었던 태국은 라마 7세인 쁘라자디뽁 왕 때인 1932년 6월 당시 인민당의 주체 세력인 쭐라롱껀 대학 법학과 교수 쁘리디 빠놈용과 육군원수이자 총리였던 피분 쏭끄람이 입헌 혁명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그 해 12월 절대 군주국에서 입헌 군주국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체제로 바뀐다.

쁘라자디뽁 왕은 군부와 갈등 속에서 견디지 못하고 영국으로 요양여행을 떠났고, 급기야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왕위를 포기해 버렸다.

후계자 지명이 이뤄지지 않다가 우여곡절 끝에 1935년 그의 손자인 아난다 마히돈이 10세라는 어린 나이에 라마 8세로 등극했다. 아난다 마히돈은 왕위계승 직후 동생인 푸미폰 아둔야뎃과 함께 스위스로 유학을 떠났으며 1939년 국호를 싸얌에서 타일랜드로 바꾸고 비로소 새 시대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1945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아난다 왕은 1년 후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죽음으로 동생 푸미폰 아둔야뎃이 20세가 채 되기도 전인 1946년 라마 9세로 왕위에 등극하게 된다. 올 6월이면 재위 60주년을 맞이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머물고 있다.

국가가 위기 땐 해결사 자처

태국은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어 국왕은 군림을 하되 통치는 하지 않는다.

다만 헌법 제7조에 ‘어려운 국면에 처했을 때 국가 상징으로서 국왕이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모호한 조항이 있어 국왕이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돼왔다. 때문에 그는 최대한 정치 관여를 자제하며 철저하게 중립을 유지하지만 이번 탁신 총리 사태와 같은 국가의 위기상황 때는 해결사를 자처하기도 했다.

1973년 타놈 군부 독재정권 당시 민주화 시위로 4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푸미폰 국왕은 반정부시위 혐의로 수배 중이던 대학생들을 왕궁에 보호하며 타놈 정권에게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없다”고 사퇴를 요구했다.

막무가내 정권은 국왕을 위협까지 했지만 그는 “민주주의와 국민을 위해서”라며 버텼다. 결국 타놈 정권은 무너졌으며 푸미폰 국왕은 새로운 헌법을 공포하고 당시 탐마삿 대학교의 총장인 싼야를 총리로 내세우기도 했다.

1992년 쿠데타 세력에 대항한 민주화 시위로 태국 정국이 혼란을 거듭하자 그는 또다시 정치에 관여를 하게 된다. 당시 수친다 크랍프라윤 총리 군부정권이 민주화 시위에 맞서 대학 구내에까지 들어가 발포에 나서 유혈사태를 빚었다.

푸미폰 국왕은 당시 시위대 대표였던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시장과 쿠데타 주도자인 수친다 장군을 집무실로 불러 꿇어 앉혀놓고 “민주주의와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해야 한다”며 질책했다. 국왕의 이 같은 질책에 수친다는 스웨덴으로 결국 망명을 떠나면서 태국은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었다.

자신의 78회 생일 연설에서는 탁신 총리가 자신을 비판한 언론 재벌 손티 림통쿤에 대해 명예훼손 소송을 남발한 것을 겨냥해 “나 자신도 비판을 받을 수 있다”며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은 비판을 수용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결국 탁신 총리는 이틀 뒤 손티에 대한 모든 소송을 취하하기도 했다.

▲ 2001년 총리취임 직후 국왕 앞에 무릎꿇고 충성서약하는 탁신.

탁신 총리에 대한 퇴진 압력이 거세게 일던 지난달 12일 오후 8시 태국 6개 국영 방송사는 왕실의 요청으로 정규 방송을 취소하고 1992년 민주화 사태 당시 국왕이 중재에 나선 영상물을 일제히 방영했다. 이는 푸미폰 국왕이 현 정국을 깊이 우려하고 있음을 보여줘 반탁신 운동에 기름을 끼얹기도 했다.

국왕이 곧 나라인 태국

이 같은 푸미폰 국왕의 권위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물론 헌법 8조는 국왕에 대한 어떠한 비난이나 비판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입헌 군주제인 만큼 국왕의 존재가 그만큼 절대적이다.

하지만 푸미폰 국왕이 입헌 군주제라는 정치 형태에 따라 헌법에 규정된 것 이상의 힘과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높은 도덕성을 갖추고 있고 그의 삶 자체가 태국 민초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와 프랑스, 독일어, 산스크리트어에 능통한 데다 ‘구름씨 뿌리기’란 세계기술 특허를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인공강우 전문가이기도 한 그는 재즈섹스폰과 클라리넷을 즐기는 현대적 제왕이다. 또 사진 작가에다 국제 요트대회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1,000여건의 농업기획을 주도한 농업부문 전문가이기도 하다.

푸미폰 국왕은 재임 60년간 모든 일정을 각계 각층의 국민들을 만나 어려움을 듣는 것으로 채웠다. 정치인은 거의 만나지 않는다. 소외된 자, 가난한 자들을 위한 수많은 법령 및 사회보장 제도 확립에 기여했다.

지난해 3월 동북부 전역에서 수개월째 계속된 가뭄으로 민심이 흉흉했다. 굶는 이가 속출했고 곡식 값은 치솟았다. 그러자 그는 일주일여 식음을 전폐하며 고민하다 하늘에 구름씨를 뿌려 인공강우를 시도하기로 한 뒤 책임자를 자청했다. 그러곤 10여 일 동안 가뭄 현장에 머물다 단비가 내린 뒤에야 왕궁으로 돌아왔다.

전 세계 생존 군주 가운데 재임기간이 가장 길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부정이나 스캔들이 난 적이 없는 유일한 왕족이다. 왕궁에서의 일정은 각계각층의 국민을 만나 어려움을 듣는 것이 대부분이다.

지난해 푸미폰 국왕의 전기를 쓴 미국 언론인 폴 핸드리는 “그의 삶은 부처의 삶을 닮을 정도로 최고의 절제와 도덕성을 구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탁신 총리도 “국왕은 총리인 나의 지휘자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나는 국왕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라며 “나를 퇴진시킬 수 있는 분은 국왕 폐하와 국민뿐”이라고 공언해왔을 정도다.

태국 군부도 “태국은 국왕이 곧 나라이며, 태국 군은 신성한 왕의 군대이다”며 “정치가들이 국왕을 언급한다면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타임지도 “국왕의 부탁과 권유는 태국이란 국가의 가장 지고한 명령”이라며 “국왕의 말은 태국 헌법과 태국 국민들의 정서에 100% 일치한다고 모든 국민이 진심으로 믿기 때문”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탁신 총리가 과도정부를 이끌 총리 권한 대행에 자신의 친구인 칫차이 와나사팃야(59) 부총리 겸 법무장관을 지명했고, 탁신 총리 자신의 총리 복귀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어 태국 정국은 아직도 안갯속이다.

하지만 6,500만 태국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권위인 ‘왕(王)의 힘’을 가진 푸미폰 국왕이 있는 한 태국 민주주의의 미래는 밝은 셈이다.


황양준 기자 naiger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