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 국무총리, 위상변화 예상 속 여야 상생 등 난제 많아 순항여부 주목

“나는 얼굴마담이나 대독(代讀)총리가 될 생각은 없다. 비록 모든 부처를 손아귀에 꽉 쥐는 장악력은 없지만, 그들을 이해하고 소통하고 조정하는 능력은 가지고 있다. 머지않아 나의 ‘내강’(內强)과 ‘카리스마’를 보게 될 것이다.”

헌정사상 첫 여성총리가 된 한명숙 국무총리는 20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취임식을 갖고 국민을 위한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국정을 펼칠 것을 밝혔다.

한 총리는 정부 수립 이후 58년 만에 최초의 여성총리로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사실 2004년 6월 내각 교체시 ‘중립적’총리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됐었다. 하지만 뜻밖에 이해찬 전 총리가 낙점되면서 2년 가량을 기다려야 했다.

한 총리는 첫 여성 수반이라는 역사적 상징성과 국민적 기대감으로 일단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국정 안팎으로 버거운 난제가 적지 않아 한명숙호(號)가 순항할 지는 미지수다.

관리형 책임총리, 당정 위상 변화 예상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4년차를 맞아 한 총리를 지명한 데는 여러 정치적 의미가 함축돼 있다. 이는 향후 국정운영, 당정 관계, 노 대통령과의 역할 분담 등에서 변화가 예상되는 배경이다.

우선 그동안 이해찬 전 총리 체제 때 유지된 ‘분권형ㆍ책임총리제’ ‘강성’ 이미지의 국정운영 기조는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이 이 전 총리 후임자로 한 총리와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을 놓고 막판까지 고심을 거듭하다 한 총리를 선택한 것은 참여정부 후반기 국정운영을 ‘안정ㆍ관리형’총리와 함께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와대가 한 총리 지명 당시 “안전 항해를 위한 조타수를 세워 국정을 안정적으로 관리해 나가겠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한 총리를 지명하면서 “‘책임총리제’의 기조는 그대로 이어간다”고 밝혀 기존 이 전 총리의 틀을 유지하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하지만 한 총리가 ‘실세 총리’였던 이 전 총리의 역할을 그대로 물려받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도 “책임총리제가 유지되더라도 이 전 총리와 한 총리의 전문분야와 임기 후반 국정과제가 다른 만큼 총리실의 기능도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부언했다.

이에 따라 향후 노 대통령과 한 총리 간 국정운영 방식과 역할분담은 이 전 총리체제의 틀에서 다소간 조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즉 한 총리가 ‘관리형 책임총리’로서 안전 운항을 할 수 있도록 노 대통령이 지속적으로 힘을 실어줄 것이라는 전망이다.

실제 노 대통령은 김영주 청와대 경제정책수석을 국무조정실장에 임명해 총리 보좌에 효율성을 기한 데 이어 4일 국무회의에서는 김영주 실장을 언급하면서 "각료들이 많이 도와달라"고 이례적인 당부의 말을 내놓기도 했다. 또한 이 전 총리 시절 있었던 매주 월요일 대통령-총리 주례 오찬회동을 계속 이어가기로 해 한 총리의 내각 장악을 지원했다.

반면 한 총리가 외형상 책임총리제 모습을 갖추더라도 실제 운영 면에서는 ‘관리형’ 총리에 그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는 이 전 총리 때보다 청와대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현 정부 출범 이후 줄곧 대통령정책실에서 일해 노 대통령의 의중에 밝은 김영주 실장이 한 총리를 보좌하게 된 것도 청와대와 정부의 가교 역할을 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에 따라 한 총리가 국정 현안의 중요한 결정을 이 전 총리 때처럼 직접 내리기보다 김병준 대통령정책실장-권오규 대통령경제정책수석비서관-김영주 실장으로 이어지는 청와대와 총리실 간의 정책라인에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내각은 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김우식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 이종석 통일부 장관 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 등을 축으로 분권형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높다.

당정 관계는 이 전 총리와 한 총리의 당내 위상 차이로 변화가 예상된다. 이 전 총리가 우월적 입장에서 당정 간 조율을 이끌어온 데 반해 한 총리 체제에서는 당의 입김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열린우리당의 한 중진은 “이 전 총리 때처럼 ‘실세 총리’의 일방통행에 당이 끌려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총리실 관계자도 “고위 당정협의를 하더라도 이 전 총리 때처럼 총리실이 상대적 우위에 서지는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면 일부에선 한 총리가 정치 지향적이지 않고 노 대통령이 힘을 실어주는 상황에서 당 쪽의 정치적 요구에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지는 않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 노무현 대통령이 4월 20일 청와대에서 한명숙 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나란히 접견실로 향하고 있다. / 최종욱 기자

대화 정치 의지, 지방선거 관리 등이 시험대

여야관계는 이 전 총리 때와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노 대통령이 고심 끝에 한 총리를 지명한 것 자체가 ‘대화 정치’를 통해 산적한 현안을 대처해나가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노 대통령은 17일 여야 원내대표 만찬회동에서 “대화의 정치문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혀 그 같은 입장을 나타냈다.

한 총리도 인사청문회에서 야당의 사상검증 등 정치공세에 가급적 대응을 피하면서 자신이 한때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독재자의 딸”로 비난한 데 대해 “적절치 않았다”고 사과하는 등 대야관계를 개선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한 총리의 앞날이 쾌청하지만은 않다. 당장 5ㆍ31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공천비리 파문, 이명박 서울시장을 둘러싼 폭로전 등으로 여야 관계는 ‘날이 선’ 상황이다. 이 와중에 노 대통령이 18일 “공천비리를 철저하게 단속하라”고 지시한 데 대해 한나라당이 "또 다시 탄핵을 유도하는 것이냐"며 반발, 여야 상생정치는 크게 흔들리고 있다.

참여정부 후반기의 주요 국정과제인 사회 양극화 해법 마련과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저출산ㆍ고령화 대책, 현안으로 부상한 일본의 동해 독도 인근 배타적경제수역(EEZ) 수로측량 계획 등은 난바다 위의 ‘한명숙호’를 시험대에 올려 놓고 있다.

나아가 한 총리는 빠른 시일 안에 국정을 장악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노 대통령이 측면 지원을 하더라도 경직된 당ㆍ청 및 대야 관계를 원만히 풀어나가는 국정운영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야 하는 것은 당장에 한 총리가 넘어야할 높은 파도이다.

한명숙호가 특유의 부드러움과 유연성을 발휘, 여당은 국정운영의 반려자로, 야당은 국정의 협력자로 새롭게 관계를 이뤄갈 지 주목된다. 다만 지방선거, 대선 등 큰 일이 많아 바다가 잔잔하지 않다는 게 문제다.

<한명숙 총리 프로필>

1944년 평양 출생, 이대 불문학과(67년)ㆍ여성학과 대학원(85년) 졸업,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 구속 수감(79~81년), 한국여성민우회 회장(86~94년),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93~96년), 제 16ㆍ17대 국회의원, 초대 여성부 장관(2001~2003년), 환경부 장관(2003~2004년),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ㆍ당혁신위원회 위원장, 한일의원연맹 부회장, 국무총리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