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의 부패권력과 독재에 맞선 총파업 18일, 의회복원 이끌어내마오이스트 반군·야당 연합이 시위 주도… 인도·중국은 '떨떠름'

▲ 4월 24일 카트만두에 모인 시위대가 국왕의 의회복원 발표 직후 국기를 흔들며 기뻐하고 있다. / AP
“승리는 국민의 것, 민주주의여 영원하라!”

비가 개인 4월 25일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승리를 외치는 시민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네팔 갸넨드라 국왕이 전날 오후 11시 30분 TV 연설을 통해 2002년 5월 해체한 의회를 복원한다고 발표한 데 대한 열광적 반응이었다.

‘피플 파워의 승리’를 외치는 네팔 시민들과 달리 네팔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도와 중국의 심기는 편하지 않은 듯하다. 시위를 주도한 야당연합이 국왕의 힘과 맞서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힘을 빌린, 마오이스트 반군 탓이다.

18일 만에 국왕을 항복시킨 '피플 파워'

국왕의 절대 권력에 반발하며 촉발된 총파업과 시위는 4월 24일 국왕의 의회 복원 선언으로 막을 내리기까지 18일간 이어졌다. 수도 카트만두에 있는 대부분의 가게는 문을 닫았고 교통도 마비됐다.

정부가 “시위대가 악용한다”며 휴대전화 서비스도 끊어버리면서 통신은 두절됐고 국왕의 통행금지령으로 언론인조차 호텔에 감금되다시피 해야 했다.

“통금을 어길 경우 사살을 허락한다”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국왕에 대한 분노를 표했으며 이 과정에서 최소 16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했다고 현지 병원 관계자들은 전했다.

2001년 디펜드라 왕세자에 의한 국왕일가 살해 사건 이후 형을 이어 왕위에 오른 갸넨드라는 “입 다물고 있는 조용한 국왕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사실상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킨 절대군주제를 추구해왔다.

그해 11월 마오 반군 단속을 위한 국가비상사태를 즉각 선포한 후 2002년 5월 반군 대처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국회를 해산했다. 지난해 2월 같은 이유로 정부 자체를 해산하고 “모든 권력은 국왕에게 있다”며 사실상 독재를 선언하면서 국민들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

국왕은 올해 2월 총선을 실시해 정부를 다시 구성하겠다고 했지만 야당 연합과 마오 반군은 “국왕의 음모”라며 선거 자체를 보이콧했다. 투표율 저조로 선거는 사실상 무효화했고, 시민들의 분노만 더해졌다.

지난해 11월 인도에서 만나 국왕을 몰아내자는 공동 목표 하나로 협력 계약을 맺었던 야당연합과 마오 반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시위는 4월 6일 시작됐고 국왕은 20일을 채 버티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마오 반군 "우리가 꿈꾸는 것은 공산 국가"

공동의 목표가 사라지면 연결 고리가 느슨해지는 법이다. 국왕의 발표가 있자마자 시위를 주도했던 마오 반군과 야당연합은 다른 목소리를 냈다.

야당측은 환영의 뜻을 밝히고 전 총리였던 기리자 프라사드 코이랄라 네팔의회당 당수를 차기 총리에 임명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였다. 국왕에 대한 지위와 존폐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헌법을 새로 만들기 위해 제헌의회도 구성키로 했다.

그러나 마오 반군은 “국왕이 권한을 줄이겠다고 발표한 것도 아닌데 무엇이 기뻐할 일이냐”며 시위를 계속하겠다고 주장했다.

마오 반군은 중국 공산당을 이끌었던 마오쩌둥(毛澤東)의 사상을 받든 조직이다. 농촌을 근거지로 한 공산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이들은 생산량의 80%를 지주에게 뜯기며 가난하게 살아가던 네팔 농민을 중심으로 1996년 결성됐다.

이들은 계속 세를 불려 현재 전체 국토의 40%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무장 투쟁을 부르짖으며 정부군과 충돌해 10년간 최소 1만3,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공산국가를 꿈꾸는 이들과 의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야당연합과의 협력은 일찍부터 ‘불안한 동거’로 일컬어지며 어두운 전망을 낳아왔다.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마오 반군이 민주 시위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반군은 4월 27일 “제헌의회 구성을 돕기 위해 3개월간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겠다”며 휴전을 선언했지만 “그 후에는 투쟁을 계속할 것이며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공산국가 건설”이라고 못박아 불씨를 남겼다.

마오 반군 세력 과시, 껄끄러워진 인도

주변국이 네팔에 돌아온 민주주의를 마냥 반길 수 없는 까닭은 마오 반군 때문이다. 한때 산 속에 숨어 공산 사회를 꿈꾸는 이상주의자들로만 여겨졌던 이들이 영향력을 드러낸 것이 껄끄러운 탓이다.

가장 심기가 불편해진 나라는 네팔과 북쪽 국경을 접하고 있는 ‘떠오르는 경제대국’ 인도다. 인도는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 빈부 격차가 전에 없이 벌어지고 있어 전체 인구의 26%가 극빈층에 속할 정도다.

마오 반군은 농촌지역의 빈민가부터 공략했다. 네팔과 붙어있는 비하르주를 기점으로 남하하면서 '평등 국가'라는 신념을 총과 폭탄으로 무장시켰다.

인도의 한 연구기관에 따르면 올해 1~3월 마오 반군과 경찰의 충돌로 247명이 사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8%나 늘어난 수치다.

지난해 11월 500여 명의 마오 반군이 비하르의 감옥을 습격한 데 이어 3월 13일 인도 북부도시 자르칸드에서는 열차를 납치했고 3월 24일에는 반군 지도자를 탈출시키기 위해 오리사에 위치한 감옥소를 또 공격했다.

인도 내무부 조사 결과 총을 쏘고 폭탄까지 설치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로 훈련된 반군만 9,300여 명에 달한다. 이들은 전체 인구의 17%가 거주하는 14개주 165개 구역을 사실상 점령한 상태다.

반군의 세력 확산을 인도 정부가 자초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2004년 5월 정권을 잡은 여당에서는 마오 반군을 정규군에 편입시키자는 주장이 대두됐다.

이들을 소탕하지 않고 일종의 정치세력으로 발전시키면 최대 야당인 바라티야 자나타당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한 까닭이다. 실제로 정부는 야당이 지배하는 지역서 반군의 투쟁이 늘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와도 군이나 경찰을 파견하지 않았다.

인도 동남부 안다라 프라데시주 정부는 마오 반군의 요구가 없었는데도 2004년 6월 휴전을 선언해버렸다. 마음껏 활동할 기회를 잡은 마오 반군은 그해 9월 흩어진 조직을 모아 '인도 공산당'이라는 정당까지 만들었다.

이 정당은 안드라 프라데시주에서만 1,300만 달러의 후원금을 걷었고 10개월간 300~500명의 반군을 새로 모집했다. 목표를 달성한 반군은 지난해 4월 "휴전은 끝났다"라고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무장 저항을 재개했다.

반군과의 충돌로 피해가 확산되자 만모한 싱 인도 총리는 뒤늦게 마오 세력을 제거하겠다고 나섰지만 쉽지 않은 분위기다. 4월 14일 소집한 비상회의에서는 "마오 반군이 인도 발전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지적하고 이들을 소탕하기 위한 특별 예산 편성까지 제안했다.

네팔과 국경을 맞댄 중국의 티베트 자치구에서까지 마오 반군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히말라야 산맥에서 인도양으로 이어지는 방대한 '붉은 지역'이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4월 27일자에서 네팔 주재 외교관들을 인용 "중국, 인도, 미국은 마오이스트 반군이 네팔의 주도권을 잡는 것을 막기 위해 긴밀하게 협력 중”이라며 "네팔 사태로 이들은 마오 반군이 사상만 부르짖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듯하다"고 설명했다.


김신영 기자 ddalg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