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감 넘치는 러시아 행보… 서방 7개국, 러 견제 속 북한·이란 핵 해법 부심

▲ 6월 29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G8 회원국 외무장관들과 악수하고 있다. / 로이터
서방 선진 7개국과 러시아가 참가하는 G8 정상회의가 15일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렸다.

17일까지 계속된 이번 회의는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이 1997년 6월 미국 덴버에서 열린 G7 회의에 참석한 이후 9년 만에 처음으로 러시아가 주최하는 회의라는 점에서 각별했다.

서방 선진국의 들러리 역할로 출발했던 러시아가 어느덧 순회의장국 자격으로 세계 초강대국이 모두 참여하는 회의의 좌장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달라진 러시아의 위상만큼이나 이번 G8 회의는 여러 면에서 과거와는 분위기가 판이하다.

무엇보다 러시아와 다른 서방 7개국과의 신경전이 날카롭다. 회의 개막 한참 전부터 시작된 두 진영 간의 힘겨루기는 앞으로의 국제질서가 이번 회의를 통해서 판가름날 수 있다는 듯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우선 러시아는 정치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서방에 더 이상 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의지다. 이를 공식적으로 과시하는 자리가 이번 G8 정상회의다.

러시아 정부의 자신감의 원천은 고유가다. 천정부지로 뛰고 있는 최근의 고유가는 자원 대국인 러시아의 경제상황을 일거에 반전시켰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정도로 비참했던 러시아 경제는 석유ㆍ가스 등 자원 수입으로 넘쳐 나는 달러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다.

고유가가 일시적이 아닌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시장구조로 정착되면서 러시아 정부의 자신감은 더욱 커졌다.

G8 회의를 앞둔 지난달 30일 국제 채권국 모임인 ‘파리클럽’에 다음달 말까지 213억 달러의 부채를 조기 상환하겠다고 합의한 것이 상징적인 예이다. 달러가 넘쳐나는 데 스타일만 구기는 서방의 부채를 안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서방 주요 선진국이 모두 참여하는 파리클럽은 빌려준 돈을 미리 받는다는 데도 전혀 즐겁지 않다. 대출에 따른 이자를 그만큼 못 받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돈줄을 통해 채무국에 행사했던 정치적 영향력이 일순간 사라졌다는 점 때문이다. 파리클럽이 단순한 금융기관에 머물지 않았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푸틴 "러시아는 G8자격 충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G8 회의 개막을 앞두고 “러시아는 G8 회원국 자격이 충분하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러시아가 회원국으로서 부족하지 않은 이유 3가지를 제시했다.

확인된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량이 G8의 나머지 회원국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4배에 이르기 때문에 러시아를 빼놓고는 에너지 안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고, 두 번째는 핵비 확산, 군축 등 국제안보에서 핵 강국 중 하나인 러시아의 입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 세 번째는 러시아가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를 소유한 유일한 국가라는 것이다.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러시아와 대조적으로 서방 국가들은 초조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번 회의의 공식 의제가 ▦에너지 안보 ▦전염병 퇴치 ▦교육 등 3가지이지만 서방측은 이 의제에서 어떤 가시적인 진전이 이뤄질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러시아가 회의에서 얼마나 노골적으로 자신의 정치ㆍ경제적 야심을 드러낼 것인가에 신경이 온통 집중돼 있다.

‘푸틴의 러시아가 추구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러시아의 팽창이 신냉전을 불러 올 것인가’ 하는 것이 서방의 관심이다. 이 때문에 서방은 4년 전 러시아가 G8 회의를 개최하도록 한 결정을 후회한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 7월 12일 부시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 G8회의에 참석하기에 앞서 독일을 방문하기 위해 부인 로라 부사 여사와 함께 로스톡 라지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 로이터

특히 미국의 견제가 두드러진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회의 개막 열흘 전인 5일 미하일 사카슈빌리 그루지야 대통령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정상회담을 갖고 “그루지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소련 연방 붕괴 이후 급속히 친 서방, 탈 러시아 노선을 취하고 있는 그루지야는 정치ㆍ경제적으로 사사건건 모스크바와 마찰을 빚고 있는, 러시아로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그동안 숱하게 그루지야 정부에 “탈 러시아 행보를 계속하면 에너지 공급 등 독립국가연합의 회원국으로서 누리는 각종 혜택을 중단하겠다”고 경고해 왔다.

그런 대통령을 부시 대통령이 정상회의 직전 백악관으로 초청해 푸틴 대통령의 심기를 긁은 것이다. ‘대안 러시아’라는 푸틴 대통령의 독재에 반대하는 민간단체가 G8에 반대하는 취지의 대안 정상회의를 갖겠다고 했을 때 국무부의 배리 로언크런 민주주의ㆍ인권ㆍ노동 담당 차관보와 대니얼 프리드 유럽ㆍ유라시아 담당 차관보가 한때 참석하기로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 정부는 또 러시아가 국제 현안에서 서방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일 경우 러시아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훼방 놓겠다는 속셈도 갖고 있다.

러시아와 서방 간의 치열한 자존심 싸움만큼이나 이번 G8 회의에서 오고 갈 논의 내용도 뜨거운 관심사다.

특히 공식 의제 외에 회의 기간에 맞춰 위기가 고조된 북한 미사일 문제, 이란 핵 문제 등과 관련된 이해 당사국이 모두 G8에 총 집결하기 때문에 한때 무용론이 나돌 만큼 김빠졌던 과거 G8 회의와는 분위기가 딴판이다.

북한·이란 문제가 최우선 현안

국제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북한과 이란 문제가 역시 최우선 현안이다. 이번 회의에는 정식 회원국 8개국 외에 푸틴 대통령의 초청으로 중국, 인도, 브라질, 남아공, 멕시코, 콩고의 정상들도 옵서버로 참석했다.

이란판 6자 회담 당사국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5개국과 독일 모두가 참석했고, 북핵 6자 회담 회원국 중에서는 한국과 북한만 뺀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 나머지 4개국이 한자리에 모였다.

북한 미사일과 이란 핵문제가 안보리 무대로 넘어간 상황에서 이번 G8 회의는 안보리의 향후 행보를 점칠 수 있는 예비무대이자 당사국들의 이해를 조율하는 최종 리허설의 장일 수 있다. 특히 북한 미사일 사태와 관련해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주석에 관심이 집중됐다. 북핵 6자 회담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는 후 주석이 어떤 입장을 보이느냐에 따라 안보리의 상황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란 핵 문제는 회의 개막 전날인 14일 열린 미·러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갖고 있던 생각의 일단이 드러났다.

부시 대통령은 이 회담에서 전 세계에 있는 미국산 원자로에서 생산되는 수천 톤의 사용 후 핵연료를 러시아에 저장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획기적인 민간 핵 협정을 체결했다. 사용 후 핵연료의 유치는 러시아 정부가 수십년간 바랐던 숙원사업이었다. 핵 폐기물을 처리하는 대가로 각국으로부터 얻게 될 수입이 천문학적이기 때문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 금액이 최대 2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면서 이 협정이 양국 관계를 획기적으로 재정립하는 ‘거대한 변화’, ‘획기적인 이정표’라고 평가했다.

미국이 러시아에 이런 커다란 당근을 제시한 것은 이란 핵 프로그램에 깊숙이 연루돼 있는 러시아 정부가 이란에 모종의 조치를 취해 줄 것을 기대해서다. 그것이 무엇인지 뚜렷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양국이 핵 협정을 계기로 이란 문제에서도 공조를 취할 발판이 마련됐다는 것도 이번 G8 회담의 성과일 수 있다.


황유석 국제부 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