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미사일 발사 계기 대북정책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오히려 골칫거리로 간주… 美의 대북조치에 동조도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7월 5일 미사일 발사실험 이후 한 달이 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가 은거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곳은 백두산 부근 삼지연(三池淵)이다. 2004년 3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관저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에도 한 달여 동안 칩거한 장소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실험이 미국 시간으로 230주년 독립기념일인 7월 4일 오후에 맞추어 이루어졌고 그중 한 발은 미국 본토까지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돼 온 대포동 2호이기 때문에 이러한 추측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실험이 이루어진 지 20일이 지난 7월 25일 중국의 선양(瀋陽)군구 16집단군도 북·중 국경지대에서 미사일 발사실험을 했다. 헬기를 가상한 공중 목표물을 향해 지대공 미사일 23발을 쏘았고 모두 목표물에 명중했다.

그 나흘 뒤인 29일 중국 인민해방군 기관지 해방군보는 이례적으로 이 같은 사실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발사장소가 창바이산(長白山), 즉 백두산 부근이었다는 것도 밝혔다. 훈련이 악천후 속에 밤 9시 시작되어 1시간 만에 완료됐다는 내용도 함께 전했다.

전례 없는 해방군보의 친절 덕에 훈련지역이 삼지연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며 북한이 대포동 2호를 발사한 함북 화대군 무수단리에서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북·중 접경지역임이 드러났다. 북한의 가장 안전한 최후방 지역은 한순간에 최전방 지역이 된 것이다.

지나친 비약일까. 그렇다면 중국이 한국전쟁 이후 벌인 3개의 군사충돌 중 2개가 소련과 베트남, 같은 공산국가들과 벌인 전쟁이었음을 상기해보라.

UN 결의안 등 사사건건 강공책

그날, 즉 7월 5일 이후 북·중 관계에 새 역사가 쓰여지고 있다. 발사실험 10일 뒤인 15일 중국은 유엔 안보리 대북 결의안에 미국과 함께 찬성표를 던졌다. 북한은 등 뒤에 비수가 찔렸다. 홍콩 시사월간지 쟁명(爭鳴)은 8월호에서 북한의 '비명‘을 전하고 있다.

결의안이 통과된 당일(한국시간 16일) 평양의 북한 외무성은 우둥허(武東和) 중국대사를 꼭두새벽에 소환했다. “배신행위”라고 질타했다. 베이징에선 최진수(崔鎭洙) 대사 등 11명의 북한 외교관들이 중국 외교부로 몰려가 3시간 동안 거친 ‘시위’를 벌였다. 중국 외교부는 ‘시위’ 진압을 위해 공안을 부르는 방안까지 검토했다고 한다. 베이징의 북한 외교관들의 구호도 평양에서와 마찬가지였다. “배신자여. 배신자여.” 이런 몰(沒)외교적인 언사와 행동은 1992년 한·중 수교 때도 없었다.

7월 22일 중국은 선양 주재 미국 영사관에 들어와 있던 탈북자 3명의 미국행을 허용했다. 중국이 탈북자를 정치적 망명자 취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국은 그동안 탈북자를 불법 월경자로 간주, 정치적 비호권 인정을 일관되게 거부해 왔다. 북한 엘리트 계층의 망명을 막아온 둑에 작은, 그러나 의미심장한 구멍이 뚫렸다.

다시 이틀 뒤 24일에는 류젠차오(劉建超)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부시 미 대통령이 제안한 세계 핵테러리즘 방지구상(GICNT : Global Initiative to Combat Neuclear Terrorism)을 진지하게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부시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G-8(서방선진 7개국 + 러시아) 정상회의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공동으로 제안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긍정적 신호를, 그것도 공개적으로 보낸 것이다. 부시의 이‘핵 테러리즘방지 구상’은‘대량살상무기(WMD) 확산방지 구상(PSI : Proliferlation Security Initiative)'과 짝을 이룬다.

PSI는 대량살상무기 부품을 실은 것으로 의심되는 선박을 공해상에서 정선, 검색, 차단, 나포 압류하는 일련의 조치를 허용토록 하자는 것이다. PSI는 2002년 12월 예멘으로 가던 북한의 미사일 수출 선박을 검색한 것이 계기가 됐다.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돼 현재 70여 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PSI와 GICNT는 모두 북한과 이란을 겨냥한다. PSI가 WMD 운반수단인 미사일의 수출을 막는데 초점을 두었다면 GICNT는 핵을 겨냥한 것이다. PSI가 처음 제안되었을 때 중국은 한국과 함께 북한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며 참여를 거부했다(비록 현재 한·중은 PSI를 묵인하거나 혹은 제한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그런데 GICNT과 관련해서는 출발하기도 전에 중국이 ‘그린 라이트’를 깜박인 것이다.

26일에는 백악관이 중국이 달러 위조와 관련된 것으로 의심받는 중국은행의 북한 계좌를 동결했음을 확인하고 환영을 표시했다. 미국이 동결한 마카오계좌를 풀라는 것이 지난해 9월 이후 북한의 일관된 요구였다. 미국이 거부하자 북한은 6자회담도 공전시켰다.

미사일 발사실험도 따지고 보면 부시가 계좌동결 해제를 끝내 거부한 데서 기인한다. 북한은 혹 떼려다 혹을 하나 더 붙인 셈이다.

"미사일 발사 역이용" 해석도

이후 북한을 대하는 중국의 태도는 ‘오뉴월 서릿발’ 그 자체다. 25일 백남순 북한 외상이 베이징(北京)에 왔을 때 중국 관리 어느 누구도 그를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백남순은 7시간 만에 베이징을 떠났다. 문전박대였다. 리자오싱(李肇星) 중국 외교부장은 27일 아세안지역포럼(ARF)의 한 공식모임에서 행사 내내 옆 좌석에 앉은 백남순에게 말 한마디는커녕 눈짓조차 건네지 않았다. 면전박대이다.

중국은 북한이 ARF에서 비공식 6자 외무장관 회담을 거부하자 북한이 빠진 다자회담- 당초 8개국 회담에서 10개국회담으로 확대됐다-에 동의하고 이에 참석했다. 물론 설득은 했다. 1시간 반 동안 목청을 높여가며. 그러나 이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일 뿐이었다.

북·중 관계는 불편한 관계 그 이상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기’에 접어들었다고 봐야 한다. 이런 관측은 더 이상 성급하지도 과감한 것도 아니다.

중국이 극적 변화를 보인 데 대해 ‘?x쯔(面子)’론을 들기도 한다. 원자바오(溫家寶)총리가 직접, 공개적으로 미사일 발사실험 중단을 촉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발사를 강행한 데 대해 발끈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중국의 일련의 행동은 너무 일사불란하고 치밀하다. 때문에 오히려 대북한 정책의 전환을 공식화하기 위해 중국이 북한의 미사일 발사실험을 이용하고 있다는 정반대의 해석까지 나오고 있다.

▲ 북한 미사일 문제 들을 논의하기 위해 7월 28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 컨벤션센터에서 북한 백남순 외상이 불참한 가운데 콘돌리사 라이스 미 국무장관 주재로 10자 회담이 열렸다. / 쿠알라룸프르=연합뉴스

北의 벼랑끝 전술 용인 안해

북한의 미사일 발사실험은 벼랑 끝 전술이다. ‘1994년 제네바 핵합의’와 같은 또 한번의 ‘대박’을 위한 아슬아슬한 도박이다.

하지만 중국 입장에서 북한의 이 곡예는 전략적 이적행위이다. 차기 일본총리로 유력한 아베 신조(安倍晋三)관방장관은 적(敵)기지 선제공격론을 운운했고 급기야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의 핵무장 촉구 발언까지 나왔다.

9.11 테러 이후 동력을 상실한 부시 행정부의 미사일방위구상(MD)에도 모멘텀을 제공했다. 미국과 일본에게 북한은 ‘내겐 너무 이쁜 당신’이다. 아베는 “고맙다”고 말했으며 부시는 ‘악의 축’의 ‘악역’에 표정관리 하느라 바쁘다. 미·일의 즐거움은 고스란히 중국의 골칫거리이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은유화법’의 중국이 ‘직접화법’을 택한 것은 일단 북한이 다음 카드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심모원려’로 보인다.

김정일이 구사할 수 있는 다음 카드로는 지하 핵실험이 있다. 북한은 이미 이를 위해 함경북도 길주에 지하터널을 파놓았다. 북한의 핵실험은 대만에까지 핵무장 도미노 현상을 불러 올 수 있다. 중국에게 이것은 악몽 중의 악몽이다, 한국전쟁 발발로 대만 해방의 기회를 놓쳤다고 보는 중국은 대만이 핵무장하고 독립선언을 하게 되는 것을 일본의 핵무장 이상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그간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을 북한의 생존외교의 일환으로 이해했다. 북한에 끌려가는 듯한 인상도 감수했다. 하지만 북한의 의도가 어디에 있던 북한의 벼랑 끝 곡예를 더 이상 방치할 경우 중국의 국익에 치명적 위협을 안긴다는 판단에 따라 대북한 정책전환을 분명히 한 것이다.

중국의 대북한 정책 전환의 밑바탕에는 한반도 미래에 관한 중국의 장기적 비전이 도사리고 있다. 그 하나가 동북공정이다.

최근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중국이 한반도 통일 후 간도의 영유권 분쟁을 막고 현 북·중 국경선을 고착화할 의도에서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동북공정이 겨냥하는 것이 당(唐)나라 이후 그 어떤 한(漢)족의 왕조도 시도하지 않은 ‘한반도 북부경영’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어떠한 것이 옳든 거기에는 ‘김정일의 북한’은 없다.

이라크의 후세인은 ‘아들 부시’가 ‘아버지 부시’처럼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 아래 2차 걸프전쟁에 임했다. 전쟁에 또다시 지겠지만 자신의 권력유지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계산했다.

하지만 ‘아들 부시’는 아버지와 달리 주저없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넜고 바그다드로 진격했다. 그리고 소수 수니파에 의한 독재체제를 다수파인 시아파와 쿠르드족이 주도권을 갖는 체제로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아버지 부시’는 말할 것도 없고 제국주의 시대 식민주의자들도 감히 생각지 못한 일이다.

물론 이라크의 미래는 낙관할 수 없다. 하지만 후세인이 ‘아들 부시’에 대해 치명적 판단 착오를 했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왼쪽)이 지난해 10월 28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 영접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있다. / AP=연합뉴스

김정일은 후진타오 등 제4세대 지도부의 지속적 설득에도 불구하고 선군정치를 고집하고 있다. 중국식 개혁개방의 출발은 병력 감축이다. 바꿔 말하자면 탈(脫) 선군정치인 셈이다.

작년 가을 쩡칭훙(曾慶紅) 중국 국가 부주석이 평양을 방문,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며 ‘탈 선군’을 설득했다. 김정일은 거부했다. 그리고 미사일 발사실험이라는 도박을 벌였다. 북·중 관계를 규율해온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전략틀의 견고함을 철석같이 믿은 탓이다. 그러나 이제 중국 역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고 있다. 김정일도 ‘후세인의 착오’를 범한 것이다.

다만 후세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에게는 일단 착오를 시정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6자회담 복귀다.


이재준 객원기자·중국문제 전문가 hufs82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