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레바논 전쟁 한 달째… 헤즈볼라 배수진에 장기전 조짐

지난달 12일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병사 2명을 납치하면서 촉발된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이 한달을 넘었다.

개전 초기만 해도 사태가 이렇게까지 오래가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한달이 지난 지금 레바논 사태는 ‘이제부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국면은 갈수록 혼미해지고 있다. 누가 승자가 될지, 피해는 얼마나 될지, 중재노력은 접점을 찾을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불투명하다.

헤즈볼라 막강한 힘의 원인

이스라엘은 물론, 미국 정부조차도 당황할 정도로 전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은 물론 헤즈볼라의 막강한 힘에 원인이 있다.

헤즈볼라가 과거처럼 때리면 일방적으로 맞는 존재가 아니라 이스라엘군도 상당한 피를 흘려야 하는 무서운 상대로 탈바꿈한 때문이다. 헤즈볼라의 강력한 저항과 반격은 중동의 세력판도마저 뒤바꿀 태세다.

헤즈볼라라고 하면 미국 등 서방의 선전공세로 인해 테러단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미국은 중동의 평화를 해치는 말썽꾸러기라는 낙인을 찍어 이른바 ‘중동의 민주화’를 밀어붙이는 정책의 지렛대로 사용했다.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등 아랍의 온건 친미국가들도 자국의 극렬 이슬람 세력을 견제하고 체제를 유지하는 명분으로 헤즈볼라 등 무장단체를 역이용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헤즈볼라는 제거돼야 할 무장단체가 아니라 아랍 민중이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두둔하는 미국에 맞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 이번 레바논 사태를 통해 확인된 것이다.

헤즈볼라의 부상은 앞으로의 중동의 지정학적 판도가 지금과는 다를 것이라는 것을 알리는 선언적 사건이다. 이로 인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앞서 언급한 친미 아랍정권의 정통성 약화다. 자국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제어할 명분이 없어지면서 이들 국가들은 정부의 미온적인 대응을 규탄하는 반정부 시위로 사면초가에 빠졌다.

이집트 최대 야권인 ‘무슬림형제단’은 1979년 이스라엘과 체결한 평화협정의 파기를 요구하면서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을 압박하고 있다. 공공시위가 철저하게 금지된 사우디에서도 헤즈볼라를 지지하는 시위가 연일 벌어지고 있다. 중동에서 가장 친미적이라고 하는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 조차 이번 사태에 대한 미국 정부의 대응을 비난했다.

친미 아랍권이 우려하는 것은 단순히 국내 정정의 불안뿐만이 아니다. 헤즈볼라는 시리아와 이란이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시아파 단체다. 시리아와 이란, 레바논은 수니파가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중동 지역에서 시아파가 다수인 몇 안 되는 이슬람 국가이다.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로 등장한 이라크의 새 정부도 시아파 대열에 합류했다.

이라크와 이란을 중심으로 동쪽 파키스탄에서 서쪽 레바논까지 이르는 ‘시아파 초승달’이 구름속에서 나와 빛을 발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잖아도 이라크의 시아파 정권 등장으로 이란의 패권을 우려하던 수니파의 맹주 사우디 정부는 이슬람 이념의 주도권마저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가득하다.

미국 정부의 ‘중동 민주화’ 정책도 용도 폐기될 위기에 몰렸다. 아랍 민심과는 유리된, 극도로 편향된 대 이스라엘 정책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중동 민주화’는 허구라는 것이 드러났다.

미국의 일간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는 “헤즈볼라와 이란, 시리아가 중동지역의 새 판을 짜는 기회로 이번 사태를 여길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한사코 제거하려고 했던 미운 털에게 미국 정부 스스로가 자양분을 공급하는 꼴이 된 셈이다.

악수는 또 다른 악수를 낳는 것일까. 영향력 추락에 노심초사하던 미국 정부는 ‘민주주의’라는 중동 개혁의 기준마저 헌신짝처럼 차버려 도덕성에 또 하나의 큰 흠집을 냈다.

중동에서의 고립을 피하기 위해 아랍의 독재정권에 다시 추파를 던지고 있는 것인데,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은 지난달 레바논 사태 발발 후 이집트, 사우디, 요르단 등을 순방하면서 이들 지도자들에게 전에 없던 찬사를 늘어놓는 등 점수따기에 바빴다. 불과 1년 전인 지난해 6월 이집트를 방문한 자리에서 “증오와 분열, 폭력을 극복하기에 충분한 이념은 자유와 민주주의가 유일하다”며 이집트의 독재정권을 강도 높게 비난하던 그였다.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지난달 23일 일요일임에도 이례적으로 사우디 외무장관인 알 파이살 왕자를 면담했다. 또 25년간 이집트를 철권통치하고 있는 무바라크 대통령의 후계자로 유력한 그의 아들을 미국으로 초대했다. 당시 이집트, 사우디, 팔레스타인 등에서는 미국의 압박에 못 이겨 부분적이나마 민주절차가 가미된 선거가 치러졌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를 두고 “미국이 친미 독재정권을 다시 버팀목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비꼬았다. 미국 정가에서는 부시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중동전문가 빌랄 사브는 “미국이 시리아나 이란에 고위급 특사를 보냈다면 무력충돌은 빨리 끝났을 수 있다”고 비판했다.

초당적 싱크탱크인 외교위원회의 리처드 하스 위원장은 보다 노골적으로 “부시 정부가 시리아를 고립시키려고 애쓰는 것은 실수”라고 지적했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중동전문가 대니얼 벤저민은 “미국은 중동에서 이스라엘을 제외하고 아무런 친구가 없는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 데이비드 웰치 미 국무차관보(왼쪽에서 세번째)가 9일 레바논 베이루트의 정부 청사에서 후아드 사니오라 레바논 총리(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회담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중재 노력 지지부진

레바논 사태는 이제 미국에게 이라크에 뒤이은 제2의 수렁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즉각적인 휴전과 헤즈볼라의 무장해제를 이끌어내기 위한 유엔의 결의안 도출 작업은 미국의 편파적인 태도에 항의하는 레바논과 프랑스 정부의 반발에 막혀 지지부진한 상태다. 뒤늦게 중재하겠다고 나선 미국 정부가 국제사회의 해결 노력을 가로막고 오히려 분열만 조장하는 애물단지가 된 것이다.

이 와중에 이스라엘 정부는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상전 확전을 전격 결정해 미국 정부를 더욱 난감하게 만들고 있다.

한 달을 넘긴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레바논에서의 희생자만도 1,000명을 넘어섰다. 이재민은 전체 인구의 4분의 1인 100만 명에 이르고 있다. 사회기반시설은 초토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군의 도발은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세력균형이 무너진 국제질서에서 유일 초강대국이 편향된 이념에 사로잡혔을 경우 그것이 어떤 비극을 부를 수 있는지를 레바논 사태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황유석 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