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타오 주석 2003년 취임 뒤 폐지… 주요 현안 '토론의 장' 필요성 절감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올해 여름휴가는 8월 3일부터 13일까지 10일간이었다. 장소는 텍사스주 크로포드의 개인 목장. 2001년 취임 이래 대선이 있던 2004년을 제외하곤 매년 한 달간의 여름휴가를 즐겨온 부시가 휴가기간을 이처럼 줄인 것을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11월 중간선거를 의식한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분석이다. 이밖에 지난해 카트리나 때 느긋하게 휴가를 즐기다 여론의 몰매를 받았던 것을 의식한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고 또 목장 부근에 땅까지 사놓고 시위를 벌이는 극성맞은 이라크 반전 시위대와 마주치지 않으려는 계산도 작용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부시는 열흘 동안 링컨 관련 서적과 노벨 문학상 작가인 프랑스의 알베르 카뮈 작품인 ‘이방인’에 흠뻑 빠져볼 생각이었다. 그에게 가장 부족한 것으로 지적돼온 통합의 리더십과 교양의 충전을 위해서다.

하지만 레바논 사태는 ‘머피의 법칙’을 입증하듯 때맞춰 격화됐다. 부시는 ‘한중망(閑中忙)’의 처지가 됐다. 노타이차림으로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과 스티븐 해들리 안보보좌관의 브리핑을 듣고 대책을 논의했으며 성명을 통해 그때 그때 자신의 입장을 발표해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유엔 안보리가 만장일치로 휴전 결의안을 채택한 것은 11일이었다. 부시의 휴가가 끝나기 바로 이틀 전이다. 이어진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휴전 동의에 대한 부시의 환영 성명은 텍사스주 크로포드 발(發)로 나왔다.

부시가 크로포드 목장에서 ‘한중망’을 보내던 12일 중국의 최고 지도자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은 베이징(北京)에서 중국을 방문 중인 테드 스티븐스(Ted Stevens) 미 상원 임시의장을 접견했다. 그 사흘 뒤인 15일에는 역시 베이징의 회인당(懷仁堂)에서 ‘장쩌민(江澤民)문선’학습 보고회에서 연설을 했다.

스티븐스를 접견하기 여드레 전인 4일 후진타오는 레바논에서 유엔 감시단원으로 활동하다가 이스라엘 공군기의 폭격으로 사망한 인민해방군 중교(中校) 두자오위(杜照宇)의 영결식에 참석했다. 장소는 바바오산(八寶山) 혁명공묘(革命公墓). 이곳 역시 베이징 시내다. 7월 초부터 8월 중순까지 후진타오의 동정기사에서 그의 휴가를 언급한 것은 없다. 올 여름 후진타오에게는 ‘크로포드’가 없었다.

여름 백악관에 비견되는 '여름 중난하이'

하지만 후진타오의 전임자들에게는 부시의 ‘크로포드’에 비견되는 ‘베이다이허(北戴河)’가 있었다. 베이다이허는 허베이(河北)성 동북부에 위치한 친황다오(秦皇島)시의 해변 휴양지이다. 동남쪽으로 해변이 길게 뻗어있고 북쪽에는 옌산(燕山)이 자리잡고 있다. 베이징에서 동쪽으로 300km 이내에 위치하며 현재 10km에 달하는 해변가의 간선도로를 끼고 중앙 국가기관 및 주요 성, 시의 요양원과 초대소, 훈련센터 등 대략 200여 채가 들어서 있다.

부시의 ‘크로포드 목장’이 ‘여름 백악관’으로 불리는 것처럼 베이다이허는 ‘여름의 중난하이(中南海 : 중국 영도층의 베이징 거주지를 지칭)’가 된다. 무더위를 피해 이곳에 집결한 중앙과 지방의 지도자들은 낮에는 수영과 일광욕을 즐기며 지내고 저녁에는 토론과 협의를 통해 당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거나 인사문제를 사전 조율했다.

이는 1987년부터 비공식 회의로 연례화했고 ‘베이다이허 공작회의’로 불리게 됐다. 개최 시기는 대체로 7월 하순부터 8월 초순까지다. 당장(黨章 : 당헌), 혹은 법률에 의거한 회의도 아니고 참석하는 이들의 자격규정도 명확하지 않다. 또한 회의절차 역시 엄격하지 않다. 전·현직 영도자와 핵심 실무자가 시쳇말로 ‘계급장 떼고’ 당면 현안을 토의하는 자리다.

때문에 베이다이허 회의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곧 이어 정식회의를 거쳐 공식화된다. ‘거시적 조정(宏觀調控)’ 정책을 합의하면 국무원이 그 해 하반기에 관련 조치를 취해 과열경제를 식히는 일을 하고 합의한 인사안은 가을에 열리는 당 중앙위 전체회의(중전회) 혹은 당 대회에서 그대로 통과되는 식이다.

‘베이다이허 회의’의 기원은 1958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이 곳에서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고 푸젠(福建)성 코 앞에 위치한 대만의 진먼다오(金門島) 포격과 인민공사 설치, 대약진 운동과 같은 중요한 정책을 결정했다.

후진타오가 1992년 10월 14대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된 것도, 2002년 11월 16대에서 최고지도부가 제4세대로 전면적인 세대교체가 단행된 것도 ‘베이다이허 회의’에서 이뤄진 사전합의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후진타오는 2003년 ‘베이다이허 회의’를 더 이상 열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스(SARS)로 일반 인민들이 막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데 고위 지도부가 대거 휴양지로 몰려 가 장기간 머무르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또한 ‘비공식’이 ‘공식’을 선도하는 관행이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도 덧붙였다. 베이다이허를 본래 목적대로 휴양지로만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명분은 구실일 뿐이었다.

폐지 속내는 신원로들의 정치관여 차단

↖ 93세까지 장수한 덩 샤오핑이 베이다이허 해변에서 경호원들과 함께 수영을 즐기고 있다. 덩샤오핑은 수영을 통해 건강을 유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 생전에 여름철마다 베이다이허를 즐겨 찾은 덩샤오핑이 전용 별장 내 정원에 놓인 등나무 의자에 앉아 쉬고 있다.
↙ 지난 70년대 말 개혁개방노선 출범 후 90년대 초까지 중국의 최고실력자이던 '부도옹' 덩샤오핑이 작고하기 전 어느 여름 베이다이허 해변에 위치한 전용별장의 발코니에 서서 '정국 구상'을 가다듬고 있다.

후진타오는 16대를 통해 새로 형성된 ‘신원로(新元老)’ 의 정치 간여를 차단하기 위해 ‘베이다이허 회의’를 폐지했다.

사실 과거 ‘베이다이허 회의‘는 ’수렴청정‘을 제도화한 것이다. 실권자가 자진해서 막후로 물러난 덩샤오핑(鄧小平) 체제 하에서 이는 필요한 제도였으나 ’제4세대 지도부‘에게는 ’옥상옥‘으로만 보인 것이다. 사실 후진타오는 이 제도의 최대수혜자다. 원로들이 베이다이허 회의를 통해 의견을 결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가 장쩌민과 같은 상하이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쩌민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최고 지도자의 권한을 제약하는 이러한 속성을 너무나도 실감했기에 후진타오는 그가 실권을 잡은 첫해에 바로 베이다이허 회의를 폐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올해 7월을 전후하여 홍콩 언론에서는 ‘베이다이허 회의’가 부활할 것이라는 보도가 느닷없이 나와 주목을 끌었다. 또 8월 1일부터 5일까지 경제발전 및 개혁위원회(발개위) 주임 등 간부들이 대거 참석한 회의를 두고 ‘베이다이허 회의’가 재개된 것으로 간주하는 기사도 나왔다. 하지만 이 회의는 과거와 같은 ‘베이다이허 공작회의’는 아니었다. 그리고 베이다이허에서 휴가는 계속되겠지만 회의는 없다는 고위당국자의 강한 부인을 전하는 보도가 뒤를 이었다.

베이다이허 회의 부활 기사는 그 순(純)기능에 향수가 일고 있음을 방증한다.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올해 3월 전인대에서 8%의 경제성장 목표를 제시했다. 그러나 1분기 성장률은 10.2%, 2분기는 11.3%였다. 중앙의 정책이 지방에까지 먹혀 들지 않는다는 증좌이다.

후진타오가 7월 21일 당외 인사와의 좌담회를 통해 ▲고정자산 투자규모 통제와 ▲거시적 조정정책 강화 등 6개항을 지시했고 원자바오는 26일 화상회의를 통해 이를 ▲고정자산 투자억제, ▲부동산시장 억제 ▲농민발전 및 농민수입 증대 촉진 등 3개항으로 정리하여 다시 반복했다. 하지만 일방적 지시의 좌담회와 스킨쉽이 전혀 없는 화상회의가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는 의문이다.

후진타오 등 현 지도부가 ‘베이다이허 회의’의 재개로 오해 될 수 있는 국무원 국가발전개혁위원회의 베이다이허 회의를 묵인한 것은 바로 이를 절감한 탓이다. 중앙 및 31개 성, 시, 자치구, 직할시에서 온 100명 이상의 발전개혁위 간부들이 참석한 문제의 회의는 당초 이틀간으로 예정되었으나 5일로 연장되었다.

‘계급장 뗀’ 난상토론이 중앙과 지방의 이견을 좁히고 하반기 경제운영의 합의점을 도출하는데 유익했다는 후문이다.

후진타오의 계륵 된 베이다이허 회의

제4세대 지도부는 최근 자신들의 2012년 퇴진을 기정사실화하는 인사규정을 도입했다. 이 같은 권력의 세대교체를 순조롭게 하기 위해서는 내년 가을에 열리는 17대에서 5세대 인물들을 요직에 ‘수혈’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후진타오는 자신의 세력기반인 공청단 출신 인물들을 지방의 지도자로 배치하면서 장쩌민의 상하이방을 어느 정도 내모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과정에선 베이다이허가 없는 게 유리했다. 그렇지만 자신들이 선택한 인물들의 정치적 미래를 위해서는 앞서의 경우처럼 원로들의 동의와 지지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베이다이허 회의’만큼 유용한 것이 없다.

최근 들어 베이다이허 회의의 부활 관련 기사가 자주 나오는 것은 ‘고려장’ 시킨 베이다이허 회의가 후진타오의 ’계륵(鷄肋)‘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이재준 객원기자·중국문제 전문가 hufs82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