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북 길주 케이블 노출 등 '핵실험 징후' 포착… 북·중 외교게임 양상으로

▲ 지난 7월 5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 강행 후 모습을 감췄다가 40일 만에 다시 공석에 등장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거행된 군사 퍼레이드에 참석, 평양 시민들의 환호에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1990년대가 ‘영변(寧邊)의 연기’였다면 2006년은‘길주(吉州)의 케이블’이다.

북한 영변의 핵 재처리시설 굴뚝에서 1990년대 연기가 피어 오르면 세계가 긴장을 했다.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 추출을 위한 폐연료봉의 재처리를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재처리 여부의 판단은 연기 속 비활성의 방사능 가스‘크립톤 85‘의 유무다. 하지만 낮은 수준의 재처리 활동일 경우 포착이 안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영변의 연기’ 는 ‘크립톤 85’의 존재 유무와는 관계없이 벼랑 끝 외교의 ‘새로운 라운드’를 알리는 신호였다.

지난 17일 미국 ABC 방송은 평북 길주 풍계리에서 대형 케이블을 감은 얼레를 내려놓는 모습이 위성사진 등에 포착됐다고 보도했다.

풍계리는 북한의 핵실험 시설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케이블은 지하 핵실험장과 외부의 관측장비를 연결하는데 필요하다. 미국 정보당국이 풍계리에 케이블 얼레가 출현한 것을 두고 북한이 핵실험 실시를 준비하고 있는 징후로 판단한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7월 5일의 북한의 미사일 발사실험은 대포동 2호가 발사 후 40여 초 만에 공중 폭발하는 바람에 협상‘카드’로서 기능을 상실했다. 결정적인 것은 안보리 대북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중국의 ‘배신’이었다.

북한으로서는 또 다른, 그리고 강도 높은 ‘카드’를 꺼낼 필요성이 제기되는 상황이었다. 그날 이후 모습을 감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8월 13일 40일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나흘 뒤 ‘길주의 케이블’이 미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궁금해 하던 김정일의 다음 수가 ‘핵실험 카드’임을 암시하는 순간이다.

미국의 반응은 ‘영변의 연기’가 그랬던 것처럼 즉각적이었다.

백악관, 그리고 뒤이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만일”이라는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 북한의 핵실험은 극히 위험한 도발이라는 경고를 내놓았다.

부시는 21일에는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 전화회담을 가졌다. 이후‘북한 돈줄 옥죄기’가 강화됐다. 같은 날 스튜어트 레비 미 재무부 금융범죄 담당 차관은 “북한 자금은‘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다”며 전 세계 금융기관들에 북한 관련 계좌를 개설하는 데 따른 위험성을 주의하라고 압박을 가했다. 합법적인 계좌마저 손대겠다는 이야기다.

북한은 벼랑 끝에 몰린 형국이다. 하지만 이는 북한이 원하던 바다. ‘벼랑 끝’은 북한의 곡예 외교 전개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핵실험 움직임에 중국 예민한 반응

‘영변의 연기’와 ‘길주의 케이블’의 가장 큰 차이는 중국의 반응이다. ‘영변의 연기’에 대해 중국은 항시 뒷짐지는 자세였다. 하지만 ‘길주의 케이블’에 대해서는 전혀 다르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인 ‘환구시보(環球時報)’는 21일 북한은 인구가 많고 땅이 좁은 탓에 핵실험을 할 수 없으며 또한 이러한 불리한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핵실험을 강행한다면 방사능 오염물이 지하수로 유입되어 한반도의 수자원이 모두 오염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전망을 내놓았다. 중국은 이 같은 은유적 경고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던 듯싶다.

추이톈카이(崔天凱) 외교부 부장조리(차관보)는 21일 방중한 도이 다카코(土井多賀子) 전 일본 중의원의장에게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는 실험적인 프로세스까지 포함해 반대한다. 그 같은 행동에 나서면 협력할 수 없다”고 말했다.

속내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고, 드러내더라도 은유적으로 내비치는 중국 외교의 그간의 행태로 볼 때 최 부장조리의 이 같은 직설적 경고는 상당히 이례적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김 정일의 새로운 ‘벼랑 끝 외교’ 가 성공적인 출발을 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40일 만에 북한군 제757군부대 축산기지의 토끼목장 지배인인 윤호중씨 가족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며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 연합뉴스

‘벼랑 끝 외교’는 고위험 고수익의 게임이다. ‘영변의 연기’가 증폭시킨 북한의 1차 핵위기는 ‘영변 폭격’이라는 파국의 위험성을 맞기도 했지만 1994년 ‘제네바 핵합의’라는 북한측에게는 대박을 안겼다. 평북 금창리의 ‘핵의혹 시설’을 둘러싼 벼랑 끝 외교도 1999년 북한에 50만 톤의 쌀을 안겼다. 1998년 대포동 1호 발사는 현직 미국 대통령의 방북이라는 초대박의 문턱까지 갔었다.

‘식견있는 지도자’ 김정일이 ‘일그러진 영웅’으로 탈바꿈한 것은 미국의 대통령 교체 때문이었다. 새로운 대통령 부시에게 김정일의 벼랑 끝 외교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김정일은 부시의 임기가 끝나는 2008년을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다. 부시는 분명하게 바뀔 것이고 그 후임이 ‘코끼리(공화당)’이건 ‘당나귀(민주당)’이건 ‘기독교 원리주의 십자군 기사’보다는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김정일 역시 모를 리 없다. 따라서 이 새로운 벼랑 끝 외교의 ‘케이블 버전’은 중국과의 게임에 주 목적을 둔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중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2010년 상하이 국제박람회라는 세계적인 행사를 앞두고 있다. 북한이 핵실험을 통해 명실상부하게 핵클럽에 가입하는 것은 끔찍한 악몽 중에서도 악몽이다.

가정이지만 만일 베이징 올림픽 개막일인 2008년 8월 8일에 북한 핵실험이 실시된다면 세계의 주요 언론들은 올림픽 개막식 대신 북한 핵실험을 톱뉴스로 다룰 것이다. 미국의 330주년 독립기념일에 맞추어 미사일 발사실험을 한 북한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가능성을 아주 배제할 수 만은 없다.

북한 노림수에 촉각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벼랑 끝 외교를 펼칠 때 서방 관측통들은 북한이 살라미(Salami)전술을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살라미 전술이란 이탈리아 소시지 살라미를 얇게 썰어 조금씩 먹는 것처럼 단번에 목표를 관철하는 게 아니라 조금씩 순차적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전술을 말한다.

하지만 필자는 북한의 벼랑 끝 외교를 ‘함진아비 전술’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신부집 가족이 함진아비가 즈려밟고 갈 ‘배춧잎’을 발 아래 깔고 신부 친구들이 술도 따르고 노래도 부르며 함진아비의 ‘기쁨조’가 되어야 하는 오늘날 우리의 함들이 풍속이 북한의 벼랑 끝 외교를 설명하는데 적절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관점에서‘케이블 버전’의 전개과정을 다음과 같이 전망할 수 있다. 핵실험을 위해 필요한 사전 조치를 단계적으로 밟아 가며 그때마다 북한에 유리한 협상 결과, 혹은 입지를 다져 나갈 것이라는 것이다.

함들이는 종종 함진아비의 무리한 요구와 신부가족의 인내심 부족으로 파국을 맞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윈-윈 게임으로 마무리되곤 한다. ‘영변의 연기’에서 비롯된, 미국을 대상으로 한 북한의 벼랑 끝 외교결과는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부시의 미국은 이 같은 실랑이를 아예 할 생각이 없다. 따라서‘케이블 버전’의 주역은 북한과 중국이 될 공산이 크다.

▲ 북한에 의해 신의주 특구 초대 행정장관에 임명됐다가 북-중간 알력의 희생양이 된 양빈이 2002년 기자회견에서 북한측이 내준 임명장을 내보이고 있다.
▲ 최근 북한의 핵실험 움직임과 관련,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설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2005년 10월 북한을 방문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김 위원장의 영접을 받고 있는 모습 / AP

앞으로 중국측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살피는 데 있어 중요한 인물이 있다. 양빈(楊斌)이다.

9월 12일은 북한이 신의주 특구를 지정한 지 4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러나 그날 북한정부에 의해 차관급인 행정장관에 임명되었고 김정일을 양아버지로 불렀던 양빈은 현재 중국 랴오닝(遼寧)성 교외의 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 18년형을 선고받았으니 석방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상당기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양빈은 그해 10월 4일 선양 본사를 출발하기 직전, 중국 당국에 의해 전격 체포됐다. 탈세, 주식투기, 부동산 불법개발 혐의였다. 중국은 체포와 구속, 그리고 재판과정 내내 그가 북한의 차관급 고위관리라는 사실을 철저히 무시했다.

김정일이 2000년 5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 당시 주룽지(朱鎔基) 총리는 신의주 대신 38도선 특구를 권유했다. 하지만 김정일은 신의주 특구를 강행했다. 외자유치, 수출 촉진, IT기술 도입 등을 표방했으나 미국과 일본을 끌어들여 장기적으로 중국을 견제한다는 정치적 고려가 담겨 있었다. 이를 간파한 중국은 ‘초전박살’ 식으로 김정일의 구상을 좌초시켰다.

8월 25일자 한국 언론들은 김정일의 8월 말 중국 방문설을 보도했다. 김 위원장이 핵 실험을 사전 통고하기 위해 방중한다는 설도 있고 중국 정부가 김정일을 초청했다는 관측도 나돈다.

후자가 사실이라면 양빈 사태 경우처럼 김정일의 구상을 ‘협박’이든 ‘회유’ 방식을 통하던 초기에 끝내 버리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럴 경우 김정일이 자신의 회심의 카드를 무산시키려는 ‘홍문의 연회’에 응할지 여부가 궁금하다.

벼랑 끝 외교의 ‘케이블 버전’이 ‘연기 버전’처럼 위험한 장기 레이스를 벌일지 중국의 의도대로 단기간에 결말이 날지가 북한과 중국 간 물밑 외교게임의 관전 포인트이다.


이재준 객원기자·중국문제 전문가 hufs82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