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타오 주석, 10월 6중전회 앞두고 본격 밀어내기

▲ 장쩌민 전 당 총서기의 잔존세력인 '상하이방' 인사들이 줄줄이 비리 의혹에 연루되면서 퇴출 위기를 맞고 있다. 사진은 2002년 16대 당대회에서 당 총서기 자리를 인계·인수한 장쩌민과 후진타오가 다정하게 서있는 모습.
“11 년 전 내가 당한 것처럼 당하는군.”

지난 7월 전격 가석방된 전 베이징(北京)시 서기 천시퉁(陳希同)이 요즘 신문을 뒤적이며 했음직한 말이다. 천시퉁은 1989년 6월 천안문 유혈진압 직후 정국 혼미 속에서 리톄잉(李鐵映)과 더불어 차기 총서기의 ‘다크호스’로 부상된 인물이다.

그가 95년 4월 측근 비리로 인책, 연금되었을 때 모두들 이를‘정변’으로 받아들였다. 중앙의 세력기반이 취약한 상하이 서기 출신의 장쩌민(江澤民)이 천시퉁 베이징 서기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베이징방(北京幇)’에 메스를 가한 것으로 생각됐기 때문이다. 천의 처리과정은 초대형 부패사건의 척결 수순을 밟아 나갔다.

천은 97년 연금상태에서 모든 공직을 박탈당하고 출당됐다. 이어 뇌물 수수혐의로 기소되어 98년에 16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가 챙겼다는 금액은 22억 달러로 과장됐다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연금 당시 정치국위원이던 천은 부패죄로 기소된 최고위급 인사라는 오명의 기록도 남겼다. 그러나 천은 자신에 대한 부패 혐의를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완전 석방을 요구하며 한때 가석방을 거부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천의 몰락 배경으로 부패 외에도 장쩌민 체제 구축을 위한 희생양의 필요성과 개발 속도를 둘러싼 중앙과 지방 간의 첨예한 갈등이라는 정치적 요인이 지적됐다.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이 형기의 반을 마친 그를 전격 가석방한 것은 이러한 지적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천의 가석방 무렵 상하이시에서는 초대형 부정 대출 사건에 대한 중앙의 조사가 시작됐다. 2002년 상하이시 사회보장기금 가운데 3분의 1이 넘는 34억5,000만 위안(4,140억원)을 바로 그해 2월에 설립된 푸시(福禧)라는 투자회사에 대출해 준 게 도마 위에 올랐다.

푸시는 바로 특혜대출 자금으로 상하이(上海) ~항저우(杭州) 간 고속도로의 30년 운영권을 따냈다. 이어 다음해인 2003년에는 50억 위안으로 자진(嘉金) 고속도로의 25년 운영권도 획득했다. 푸시는 눈부신 성장을 했고 창업자인 올해 38세의 장룽쿤(張榮坤)은 중국 39위의 부호로 뛰어 올랐다.

신화통신은 조사 시작 한 달여 만인 8월 26일 100여 명의 중앙기율검사요원들이 상하이에 파견되었다고 확인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체포, 조사 중인 인사는 장룽쿤과 상하이시 사회보장국장 주쥔이(祝均一), 상하이전기 왕청밍(王成明) 회장, 그리고 상하이 시 바오산(寶山) 구청장 친위(秦裕) 등이다.

화둥(華東)사범대 동창으로 추정되는 친위와 장룽쿤은 각각 전·현직 상하이 서기와 연결되어 있다. 친위는 현 상하이 서기 천량위(陳良宇)의 비서를 지낸 측근이다. 장룽쿤은 상하이 서기를 지냈으며 현재 부총리인 황쥐(黃菊)의 부인 위후이원(余慧文)이 부회장으로 있는 상하이 자선기금회의 재정적 후원자였다.

이 같은 연결고리를 살피면 중앙이 100명이나 되는 대규모 조사요원을 파견한 이유는 자명해진다. 조사는 상하이방의 두 핵심 황쥐와 천량위를 겨누고 있는 것이다.

천시퉁의 몰락은 그의 ‘금고’로 불리운 왕바오썬(王寶森) 베이징 부시장이 조사를 받던 와중에 의문의 자살(일부에서는 암살설을 제기)을 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천이 뇌물죄로 기소된 데는 그의 비서 천젠(陳健)의 진술이 결정적이었다. 후진타오는 장쩌민의 수법 그대로를 상하이방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황쥐와 천량위 외에 자칭린(賈慶林) 정협 주석 역시 사정권에 들어와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부인이 푸젠(福建)성 밀수사건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룬 전력이 있는 자칭린은 지난 6월 측근인 류즈화(劉志華) 베이징 부시장이 부정부패와 사생활 문란으로 전격 해임되면서 또다시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받았다.

장쩌민은 베이징방을 내몰기 위해 차오스(喬石)와 연합하는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았다. 후진타오도 상하이방을 와해시키기 위해 상하이방의 ‘제1책사’ 쩡칭훙(曾慶紅)과 ‘실세’ 우방궈(吳邦國)를 끌어 들였다.

2004년 9월 장쩌민이 군사위 주석직을 내놓은 것은 후진타오 편에 선 쩡칭훙이 그를 설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쩡칭훙은 그 대가로 혁명원로들의 자제들로 구성된 태자당(太子黨)의 권력지분을 확보했다. ‘윈-윈 거래’였다. 칭화(淸華)대라는 학연과 안후이(安徽)성이라는 지연으로 후진타오와 연결된 우방궈 역시 말을 갈아 탔다.

권모술수 면에서 후진타오는 장쩌민의 ‘청출어람(靑出於藍)’ 수제자인 셈이다.

▲ 장쩌민 총서기와 권력투쟁에서 패배했던 '베이징방'의 영수 천시퉁 베이징 서기가 1998년 법정에서 16년형을 선고받고 있다. 그는 형기의 절반을 마친 최근에 가석방됐다.

후 주석, 힘의 균형 역전에 성공

후진타오는 2002년 11월 총서기로 선출된 이래 지속적으로 지방의 주요 간부들을 자신들의 사람들로 교체해 왔다.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출신과 안후이성 출신이 많았다. 이를 통해 상하이방과 자신의 지지세력 간의 힘의 균형을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장제스(蔣介石)를 제압한‘농촌을 통한 도시 포위 전략’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눈길을 끈 대목은 후진타오가 그를 최고지도자로 낙점한 덩샤오핑(鄧小平)의 수법을 원용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중국 공산당 중앙판공청은 8월 7일 당과 정부의 고위 간부의 임기를 5년으로 제한하고 1회에 한해 연임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규정을 발표했다. “먼저 나가 있어라. 우리도 얼마 안 가 동참한다”는 메시지다. 정치개혁 진전이라는 의미와는 별도로 이는 반대파의 도전 빌미를 아예 없애는 회심의 승부수다.

덩샤오핑이 천윈 등 보수세력을 은퇴시킬 목적으로 솔선해서 퇴진했다. 후진타오는 퇴진 일정 사전예고로 같은 효과를 거두려 하고 있다.

백미는 ‘경이원지(敬而遠之)’ 전략이다. 후진타오는 8월 15일 정치국 상무위원 9명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장쩌민 문선’ 보고회를 가졌다. 이 성대한 의식은 장쩌민의 정치적 장례식이었다. 보고회를 통해 ‘이론’ 반열에 오른 ‘3개 대표론’의 생산연도는 불과 6년 전인 2000년이다. 라벨이 붙여진 채로 박물관에 들어간 셈이다.

마오에게 공(功)은 7할이며 과(過)는 3할이라며 덩샤오핑은 천안문에 마오의 대형 초상화를 계속 걸어두었다. 하지만 덩이 주력한 것은 공의 계승이 아니라 과의 극복이었다. 덩의 절묘한‘경이원지 전략’을 후진타오도 멋지게 적용한 것이다.

장쩌민 문선 보고회가 있은 지 채 보름도 안 된 8월 29일 후진타오는 무경(武警)에 대한 대폭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무경은 장쩌민이 집권기간 각별히 공을 들인 그의 물리적 기반으로 알려져 있다. 용의주도한 솜씨다.

후진타오가 이런 일련의 조치를 통해 장쩌민과 상하이방에게 던진 메시지는 두 가지다. 장쩌민을 ‘박제화한 우상’으로 존중하겠다는 것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오는 10월에 소집되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6중전회)를 앞두고 상하이방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비워달라는 것이다. 그것도 많이.

천시퉁이 장쩌민에게 그랬듯이 원자바오(溫家寶)와 ‘맞짱’을 뜬 천량위를 포함한 상하이방의 주요인사에 대한 처리강도와 양상은 후진타오의 이 메시지에 대한 답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재준 객원기자·중국문제 전문가 hufs82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