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중시 상하이방 노선과 결별… 대북관계 격하 여부도 주목

중국에게 10월은 혁명의 달이다.

10월 10일은 신해혁명(辛亥革命) 기념일이다.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멸망했다. 공산중국도 10월 1일 수립됐다. 2006년 10월도 이러한 뒤엎음의 역사를 반복할까. 10월 10일 대만의 타이베이(台北)에서는 총통부를 ‘인(人)의 만리장성’으로 포위하는 정치 이벤트가 열린다. ‘피플 파워’의 분출이 최고 권력자의 하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같은 날 베이징(北京)에서는 중국공산당 16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16기6중전회)의 사흘째 회의가 열린다. 대만해협의 동쪽의 정치 이벤트가 100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광장’에서 이루어진다면 베이징의 정치 행사는 400명 미만의 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밀실’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이 밀실의 결정은 아마도 ‘광장의 혁명’보다도 더 큰 파급력을 가질 것이다.

6중전회를 앞두고 중앙당교(中央黨校)의 당 건설 전문가 예두추(葉篤初) 교수는 이번 6중전회가 1938년 6기 6중전회와 1981년 11기 6중전회에 비견되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 대회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중앙당교는 중국 공산당의 최고 싱크탱크이자 당 고위간부 교육기관이다. 따라서 예 교수의 이런 발언은 가볍게 흘려 넘길 수 없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장정(長征) 중이던 1935년 1월 쭌이(遵義)회의에서 ‘총구’를 장악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38년 10월부터 11월까지 옌안(延安)에서 열린 6기 6중전회에서 마오는 소련 추종파인 국제파를 권력의 중심에서 밀어냈다. 당권마저 장악한 것이다. 마오가 ‘마르크스주의 중국화’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이후 중국 공산당은 ‘마오의 당’이 됐다.

6기 6중전회에서 시작된 마오의 공산당은 43년이 지난 1981년 6월 27일부터 29일까지 개최된 11기 6중전회에서 끝을 맞는다.

1978년 12월 권력을 장악한 덩샤오핑(鄧小平)은 역사결의를 통해 마오쩌둥 사상 및 그 공과를 전면적으로 재평가했다. “공이 잘못보다 크다”“공적이 1차적, 착오는 2차적이다”라고 하였지만 마오가 발동한 문혁을 “영도자의 착오 아래 발동된 내란”으로 규정했다. ‘마오의 극복’이 주제였다.

상하이 서기 陳良宇 전격 해임

이후 중국 공산당은 ‘덩의 공산당’이 되었다. 평등보다는 발전이 중시됐고 내향적 국수주의 지향에서 벗어나 개방적 국제주의를 추구했다. 노선이 180도 전환된 것이다.

예두추 교수가 16기 6중전회를 6기 6중전회와 11기 6중전회에 비유했다는 것은 중국 공산당의 중대한 노선변화를 전망한 것이다. 예 교수의 발언의 의미는 상하이 서기 천량위(陳良宇)가 9월 25일 전격 해임되면서 보다 명확해졌다. 11기 6중전회에서 시작된 덩의 성장노선이 16기 6중전회에서 중대한 수정이 가해질 것임을 예고한 셈이다.

천량위의 해임은 많은 중국 전문가들에게 의외였다. 후진타오가 자신의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장쩌민 전 총서기의 세력기반인 상하이방(幇)을 손볼 것으로 모두들 예상했다.

하지만 사법처리를 예고하는 ‘비리 연루 해임’을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전국총공회 주석과 같은 한직으로 좌천시키는‘명예 숙청’의 방식을 택할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노선 전환을 뚜렷하기 위해선 충격요법이 필요했을는지 모른다.

후진타오의 정치슬로건은 ‘화해(和諧 :허시에)’ 즉 ‘조화’이다. 이 슬로건은 개혁, 개방이 추진된 1978년 이래 심화된 지역 간, 계층 간의 격차의 해소를 겨냥하고 있다. ‘공동부유(共同富裕)’가 목표라는 점에서 ‘한솥밥(大鍋飯)’의 마오의 노선과 지향점이 같다.

다만 제로섬의 투쟁이 아닌 포지티브섬의 조화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또한 성장을 통한 균형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덩 노선의 배척이 아닌 발전적 극복을 의미한다. 당의 좌편향을 상징하는 마오와 우편향을 대표하는 덩을 ‘화해(和諧)를 통해 화해(和解)’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상하이방의 타도를 겨냥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상하이방에 있었다.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취임 이래 ‘거시적 조정(宏觀調控)’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는 자금과 에너지의 블랙홀이 되어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키고 있는 연안 성시의 경제과열을 진정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하이는 이에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상하이 서기 천량위는 ‘선부(先富)를 통한 균부(均富)’라는 덩의 노선을 내세우며 ‘자원 재분배를 통한 공부(共富)’ 노선을 공격했다. 이는 원자바오를 넘어서 후진타오의 조화 노선 자체마저 겨냥한 것이다.

올해 3월 5일 전인대에서 원자바오는 올해 성장목표를 8%로 제시했다. 그런데 1분기 경제성장률은 10.3%였고 2분기 성장률은 11.3%였다. 상반기 중 31개 성, 시 자치구 가운데 23곳이 12% 이상의 고성장을 기록했다. 각 지방이 중앙의 거시조정 정책은 아랑곳하지 않고 경쟁적으로 고정자산 투자에 나선 탓이다.

이는 ‘상하이 노선’의 승리를 의미했다. 후진타오는 결국 ‘인적 청산 없는 노선 전환은 없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1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조사요원을 상하이로 내려 보냈고 결국 천량위를 해임했다.

마오와 덩이 노선전환에 앞서 왕밍(王明)과 화궈펑(華國鋒)을 내친 것처럼, ‘지하 총리’로 군림해 온 상하이방의 황태자를 숙청함으로써 1978년 이래의 ‘성장 우위 노선’에 못질을 가한 것이다.

천량위의 해임이 결정된 9월 25일 중국 공산당 정치국은 6중전회를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갖기로 결정했다. 신화통신은 대회의 주제가 ‘사회주의 조화 사회의 구축과 건설’임을 밝히고 당면한 경제정세와 경제공작에 관한 토의가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천량위가 비운 상하이 서기 자리는 상하이시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서기를 지낸 상하이 시장 한정(韓正)으로 채웠고 공청단 제1서기 저우창(周强)이 후난(湖南)성 성장에 임명되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조화 노선 추진에 동력을 부여하기 위한 지도부 물갈이가 대대적으로 진행될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물갈이가 상하이방의 전면적 와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공격대상은 성장 노선이지 상하이방 전체가 아니다. 성장 노선을 지지해 온 황쥐(黃菊)와 리창춘(李長春)은 위태롭지만 쩡칭훙(曾慶紅)과 우방궈(吳邦國)의 입지는 변함없고 ‘조정자’로서의 쩡의 위상은 오히려 더 공고해졌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조화 노선이 쫓는 두 마리 토끼 중 하나는 균형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성장이기 때문이다.

중국적 사회주의를 외친 마오는 소련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개혁, 개방을 외친 덩은 한국전 당시의 교전국 미국과의 준(準)동맹 관계를 지향했다.

교도(共同)통신은 6중전회에서 1961년 체결된 북·중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의 개정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보도는 중국 외교부에 의해 단호하게 부인되었다. 홍콩의 성보(成報)는 6중전회의 안건으로 경제 문제 외에 주변국 관계 밑 외교정책 조정이 있을 것이라고 전했으나 9월 25일 신화는 이 대목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6중전회를 통해 상하이가 ‘보통 도시’로 격하되는 것처럼 북한도 ‘혈맹’에서 ‘보통 국가’로 조정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유엔 안보리 대북결의안에 중국이 찬성표를 던진 것이 이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이재준 객원기자·중국문제 전문가 hufs82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