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5세대 '떠오르는 별' 누구인가 ③ 한정상하이 대리서기에 임명… 5세대 선두주자 리커창 위협

후진타오(胡錦濤)가 제4세대의 그룹에서 선두로 튀어나온 것은 그가 1992년 10월 14차 전당대회(14대)에서 일약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면서부터다. 천량위(陳良宇) 전 상하이 서기가 비리 연루 혐의로 전격 해임된 지 하루 만인 9월 26일 상하이 대리서기에 임명된 한정(韓正)은 여러모로 후진타오를 연상시킨다.

이중적 이미지 때문에 후진타오는 덩샤오핑(鄧小平)의 눈에 들어 장쩌민(江澤民)의 후계자로 낙점되었다. 후진타오는 후야오방(胡耀邦), 후치리(胡啓立)와 더불어 ‘쓰리 후(三胡)’로 불린 인물이다. 후야오방과 후치리는 대표적 개혁파였다. 후야오방이 발탁하고 후치리가 후원한 후진타오는 따라서 개혁파로 분류됐다.

하지만 후진타오는 1989년 6월 천안문 유혈진압을 가장 먼저 지지한 지방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앞서 같은 해 3월 티베트 독립시위를 무력진압하기도 했다. 이 대목에서는 리펑(李鵬)과 난형난제의 강경파 이미지다.

한정은 사회 진출 이래 상하이를 떠난 적이 없다. 전형적 상하이방(幇)이다. 하지만 그는 상하이시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부서기와 서기를 지냈다. 그 덕에 요즘 한창 뜨는 공청단 출신의 단파(團派)로도 분류된다. 바로 이러한 이중성이 그가 상하이방이 된서리를 맞는 가운데서 오히려 승진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상하이 서기는 베이징(北京) 서기, 톈진(天津) 서기와 더불어 정치국 위원을 겸하는 직책이다.

10월 8일 개최되는 6중전회에서 대리의 꼬리표를 떼고 또 정식으로 정치국위원이 되면 그는 5세대 인사 중 가장 먼저 정치국에 진입하는 것이다. 천량위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후진타오의 최측근으로 5세대의 선두주자로 간주돼 온 리커창(李克强) 랴오닝(遼寧)성 서기가 상하이 서기로 옮겨갈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후진타오의 최종 선택은 한정이었다. 상하이 시정의 연속성과 상하이방의 반발을 고려했음은 물론이다.

한정이 대리서기에 임명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간부들과 함께 후진타오와 중앙에 대한 충성 맹세였다.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와 탁자를 두드리며 논쟁을 서슴지 않았던 천량위와는 다른 자세를 취하겠다는 선언이다.

후진타오의 조화(和諧)노선은 ‘성장 속의 균형’이다. 만일 중앙과 마찰을 빚지 않으며 상하이의 성장을 지속시킨다면 이는 후의 노선을 가장 잘 구현하는 것이 된다. 분명히 한정은 리커창의 선두 지위마저 위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물론 ‘상하이시의 보통 도시화’로 자원 배분이 동북지방과 톈진으로 분산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는 심각한 시험일 수도 있다.

한정은 49세 때인 2003년 2월 상하이 시장에 선출되었다. 중국 공산정권 수립 이래 40대에 시장으로 임명된 것은 그가 최초였다. 부총리와 외교부장을 역임한 천이(陳毅)가 1949년 5월 48세의 나이로 상하이 시장에 임명되었으나 당시는 공산정권이 수립되기 이전이다. 그가 이 같은 기록을 세우게 된 데는 상하이방의 무리수가 큰 역할을 했다.

2001년 12월 7일 총리 후보로까지 거론되던 쉬쾅디(徐匡迪) 상하이 시장이 돌연 사임했다. 쉬쾅디의 후임이 바로 천량위다. 이는 천량위를 황쥐(黃菊) 당시 상하이 서기의 후임 서기로 만들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2002년 11월 16대에서 황쥐가 상무위원 겸 부총리에 선출되어 중앙으로 올라가자 천량위는 시장이 된 지 1년여 만에 서기에 올랐다. 천량위가 내놓은 빈 자리를 공청단 경력이 있던 한정이 채운 것이다.

어부지리로 얻은 기회를 잘 활용하였다는 점에서 한정은 베이징 시장 왕치산(王岐山)과 닮았다. 한정은 2003년 11월 20개 현의 시장을 대상으로 실시한 주민 여론조사에서 67.4%의 지지로 왕치산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그는 1998년 부시장 시절부터 도시계획과 교통문제를 담당하며 상하이시를 실무적이며 효율적인 현대화 도시로 탈바꿈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1998년 이래 연속 5년 동안 새해 첫날 시민으로부터 직접 의견을 청취하는 시민 핫라인 제도를 운영해왔다. 그가 높은 인기를 누린 것은 바로 왕치산과 마찬가지로 서민에 다가가는 행정을 폈기 때문이다.

저장(浙江)성 츠시(慈溪)출신인 한정은 상하이의 한 고무공장에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문화대혁명 와중에서 대학진학 기회를 놓친 그는 루완(盧灣)구 구청장으로 있던 1994년 40세의 늦깎이로 화둥(華東)사범대를 졸업했으며 경제학 석사까지 취득했다.


이재준 객원기자·중국문제 전문가 hufs82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