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동북경제권에 북한 편입 포석?중공업 육성위해 동북개발 적극 나서… '경제 동북공정'도 노린 듯

리커창
‘(李克强)이 동북(東北)에 더 머무는 까닭은….’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의 최측근 랴오닝(遼寧)성 서기의 유임이 던진 화두다. 중국 공산당 16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16기 6중전회 : 10월 8~11일)가 열리던 당시, 이 상하이(上海)서기, 혹은 중앙 판공청 주임으로 자리를 옮길 것이라는 기사가 중화권 언론에 빈번하게 나왔다. 하지만 이는 그가 10월 26일 랴오닝 서기에 연임됨으로써 모두 틀린 예측이 되고 말았다.

이 결과를 두고 여러 분석을 할 수 있다. 우선은 상하이방(上海幇)의 강력한 저항에 따라 타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원래 구상은 혹은 류옌둥(劉延東) 등 즉 단파(團派) 인사를 상하이 서기로 보내 상하이를 완전 접수하려는 것이었지만 상하이방의 반발과 과도한 경제 위축을 우려, 이 생각을 접었다는 것이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10월 2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거행된 장정(長征) 70주년 기념식에서 후 주석에 이어 두 번째로 거명됐다. 이는 장쩌민 집권 시절 생전의 덩샤오핑(鄧小平)을 예우한 방식이다. 이후 단파의 표적으로 관측돼 온 자칭린(賈慶林) 정협 주석이 외국 방문에 나서고 황쥐(黃菊) 부총리가 공식 석상에 얼굴을 드러냈다. 상하이방 핵심의 건재과시다. 의 랴오닝 잔류와 더불어 후진타오의 당초 구상이 절반의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약간 다른 분석도 가능하다. 단지 이행만이 늦춰졌을 뿐이라는 것이다.‘상하이방의 미래’ 천량위(陳良宇) 전 상하이 서기를 제거한 이상, 상하이방을 너무 궁지에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는 16기 6중전회에 앞서 보도됐던 예상 인사가 17기에서는 자칭린, 황쥐 등의 명예퇴진과 함께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의 동북 잔류를 중국의 미래 국가전략과 결부시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동북지방은 중국의 미래 비전 구현의 기관차 역할을 하는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차세대 리더인 을 그곳에 더 머무르게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의 잔류는 수동적 선택이 아닌 미래를 대비한 적극적 조치다.

덩샤오핑이 자오쯔양(趙紫陽)과 완리(萬里)를 쓰촨(四川)성과 안후이(安徽)성으로 보낸 까닭은 농업개혁의 선도를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덩의 기대에 부응했고 모두 중앙으로 불러 올려져 총리와 부총리를 역임했다. 자오는 나중에 총서기까지 올랐다. 그들에게 부과된 역사적 임무는 농촌 생산력 증대라는 개혁의 저변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들 뒤를 이은 인물이 장쩌민과 주룽지(朱鎔基)다. 둘은 모두 상하이 시장과 서기를 거친 뒤 중앙으로 진출했다. 장쩌민은 총서기와 국가주석을, 주룽지는 부총리를 거쳐 총리에 올랐다. 장과 주의 소명은 가공무역을 통한 수출 증대라는 상하이 모델의 전국적 확산이었다. 이들 역시 자오쯔양과 완리와 마찬가지로 성공했다.

그렇다면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에 앞에 놓여진 시대적 과제는 무엇일까. 후진타오는 구이저우(貴州)성과 시짱(西藏) 자치구(티베트)로 보내졌다. 한 곳은 중국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이고 다른 한 곳은 소수민족 문제로 제일 골치 아픈 지역이었다. 최고지도자가 된 후진타오는 개혁추진과정에서 누적된 빈부격차의 해소와 다민족 국가로서의 중국의 새로운 정체성 확립을 자신의 과제로 규정했다.

후가 내세운 슬로건인 ‘조화(和諧)사회’ 건설은 빈부격차 해소를 위한 정책노선이다. 또 ‘통일다민족국가(統一多民族國家)’라는 역사 이데올로기에 힘을 실어준 것은 다민족국가라는 새로운 정체성 확립을 위한 모색이다. 이 과정에서 추진된 동북공정(東北工程)이 우리와 심각한 마찰을 빚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992년 개혁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남순강화(南巡講話)에 나선 덩샤오핑이 상하이를 재발견한 것처럼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동북 3성에 주목했다. 동북지방은 랴오닝성, 지린(吉林)성, 헤이룽장(黑龍江)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과거 만주(滿洲)로 불린 지역이다.

동북3성은 국민정부 이래 중국 최대의 공업지구였으나 덩샤오핑이 연해 개방전략을 취함에 따라 그동안 방치되어 왔다.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 출범 첫해인 2003년 10월에 ‘동북지구 등 노후 공업기지 진흥에 관한 약간의 의견’이라는 문건을 내놓았다. 개혁, 개방 이래 축적된 남방지역의 자본과 외자 유치를 통해 전통적으로 중공업 기업이 밀집한 동북지역의 산업구조를 혁신함으로써 중공업발전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수출입국 후 중화학공업 건설’이라는 박정희 모델의 차용이다.

이 같은 동북진흥 계획은 중국의 산업구조를 선진형으로 업그레이드함과 동시에 연해 지역에 과도하게 집중된 경제력의 분산을 통해 지역 간 균형발전을 꾀하자는 것이다. 이는 조화사회 구현이라는 현 지도부의 정책노선과도 맞으며 또한 상하이방의 경제권력에 대해 제약을 가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정책이다.

다만 발표 후 2년 가까이 이 문건은 청사진에만 머물렀다. 투자 유인 요건이 약한 데다 ‘상하이 모델’에 대한 여전한 집착 때문이었다.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2005년 6월 획기적인 내용의 문건을 추가로 내놓았다. ‘동북 노후공업기지 촉진을 위한 대외대방의 일층 확대에 대한 실시의견’이란 제목의 이 문건은 ▲대형 국유기업 경우도 외자의 경영권 취득 허용 ▲제조업, 석유화학, 제약 등 200개 항목의 프로젝트에 외자 참여 장려 ▲가스, 전력공급, 하수도 정비 등 인프라 건설부문에 대해서도 외자의 주식취득 인정 등의 파격적 내용을 망라하고 있다.

아울러 동북진흥계획의 선도 성인 랴오닝성에서 우량기업이 중심이 된 대형 국유기업 24건을 경매에 내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양쯔강(揚子江) 경제권의 발전을 상하이가 앞장 선 것처럼 동북진흥계획의 향도역을 랴오닝성이 맡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동북진흥계획의 추진에 따라 북한이 재발견되었다. 장쩌민 시절 ‘뜨거운 감자’로만 인식했던 북한을 동북진흥의 불가결한 요소로 재인식한 것이다. 2005년 10월 중국의 지도자들이 집중적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10월 초 경제담당 부총리 우이(吳儀)가 랴오닝 성장을 지낸 보시라이(薄熙來) 상무부장을 대동하고 북한을 방문한 데 이어 10월 하순에는 후진타오 주석이 방문했다.

당시 교도(共同)통신은 중국측이 북한의 중공업 부문의 회생과 항만 등 인프라 건설을 위해 20억 달러의 장기 지원안을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그해 12월에는 북·중 해저유전 공동개발 협정이 체결됐다. 이런 중국측의 일련의 대북 경제 드라이브는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이는 동북공정과 맞물려 중국이 북한을 동북경제권에 포함시키려는 시도로 해석되기도 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실험과 핵폭발 실험은 중국의 미래 국가전략인 동북진흥정책에도 위협을 주는 것이다. 전쟁과 같은 최악의 상황은 피한다 해도 경제파탄에 따른 북한 난민의 대거 유입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로마의 경제를 파탄시킨 것처럼 자칫 동북진흥계획을 일장춘몽으로, 더 나아가 중국 경제의 밑둥치를 뒤흔들 위험성을 내포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에게 ‘랴오닝에 1년 더’를 결정했는지도 모른다.

차세대의 선두주자인 에게 앞으로 1년은 그에게 기회이자 위기이다. 또한 그의 성패는 북한의 미래와도 연계된 것이기에 우리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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