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5세대 '떠오르는 별' 누구인가 ⑧ 장쑤성 서기 리위안차오(李源潮)공청단 시절엔 리커창보다 서열 우위… 천안문 사건 이후 뒤집혀

중화권 언론에서 중국의 지도자 그룹을 지칭하는 용어로 ‘트로이카’와 함께 ‘4대천왕(四大天王)’이 자주 사용된다.

5세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4대천왕으로는 리커창(李克强), 보시라이(薄熙來)와 함께 리위안차오(李源潮) 장쑤(江蘇)성 서기와 시진핑(習近平) 저장(浙江)성 서기가 꼽힌다. 단파(團派)가 리커창, 리위안차오 등 2명이고 태자당이 보시라이와 시진핑 2명이다. 이는 많은 중국 관측통이 5세대 지도부가 단파와 태자당의 ‘조화(和諧) 정권’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광고의 카피 같이 각파의 선두 주자에 비해 바로 뒤의 주자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 2위 사이 격차는 언론 노출 빈도처럼 그렇게 현격한 것이 아니다.

1950년생으로 리커창보다 다섯 살 위인 리위안차오는 경력, 능력, 배경 면에서 리커창의 최대 경쟁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위안차오는 상하이 명문 푸단(復旦)대학 출신이다. 수학과를 나와 베이징대학에서 경제학 석사(1986)를, 중앙당교(中央黨校)에서 법학 박사(1998)를 취득했다. 베이징대학 법률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한 리커창과 학력 면에선 막상막하이다.

중앙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과 함께 일했기 때문에 후와의 관계도 리커창 못지않다. 리위안차오는 장쑤성 롄수이(漣水) 출신이다. 장쑤성과 후진타오의 출신 지역인 안후이성 사람들은 동향의식이 강하다. 그도 그럴 것이 안후이성과 장쑤성은 장난(江南)성이라는 한 울타리에 있다가 청나라 때인 1666년 나눠졌기 때문이다.

리위안차오는 리커창보다 배경 면에서는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는 문화대혁명 이전 상하이 부서기를 지낸 리간청(李干成)의 아들로 태자당에도 끼인다. 5세대의 킹메이킹 과정에서 중요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한 쩡칭훙(曾慶紅)과의 거리는 리커창보다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한동안 리위안차오는 리커창보다 앞서 나갔다. 그는 1985년 후진타오의 후임 공청단 제1서기로 쑹더푸(宋德福)가 선출되었을 때 리위안차오는 9명의 서기 중 류옌둥(劉延東) 다음으로 차석이었다. 리커창은 이때 서열 6위였다.

리위안차오와 리커창의 역전은 아마도 1989년 천안문 사태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청단의 일부 간부들이 학생시위를 지지하고 이에 동참한 데 책임을 지고 류옌둥이 공청단을 떠난 것처럼 그 역시 공청단을 나와야 했다. 1993년 전국청련(靑聯)부주석을 거쳐 당중앙 대외선전부 판공실 부주임, 국무원 신문판공실 부주임, 문화부 부부장 등 한직을 전전했다. 류옌둥과 리위안차오가 떠난 뒤인 1993년 리커창이 부장급인 공청단 제1서기에 올라 미래의 지도자 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의 앞길에 서광이 드리운 것은 2000년 장쑤성 부서기가 되면서부터. 이듬해엔 난징(南京)시 서기, 다시 한 해 뒤에는 장쑤성 서기에 올라 리커창과 동렬이 되었다.

리위안차오는 장쑤성 출신으로 장쑤성의 서기가 되었는데 이는 극히 드문 케이스다. 하지만 장쑤성 사람들은 그를 중앙에서 내려 보낸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거시적 조정 정책에 호응, 민영 톄번(鐵本) 철강회사를 문 닫게 했기 때문이다. 톄번이 베이징의 수도강철공사의 2배 규모로 확장하자 원자바오는 이를 과잉투자로 규정, 정리해 버린 것이다. 원자바오는 이를 거시적 조정의 대표적 성공사례로 내세우고 있다.

리위안차오는 “장쑤는 가장 부유한 성은 아니지만 가장 조화(和諧)가 실현된 지역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지역의 이익을 위해 중앙에 맞서다 몰락한 천량위(陳良宇) 전 상하이 서기와는 대조적이다.

리위안차오는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참전한 다음달인 1950년 11월에 태어났다. 그의 이름 위안차오(源潮)는 ‘항미원조(抗美援朝)’의 뒤 두 글자와 발음이 같다. 한반도와 인연이 닿아 있는 대목이다.


이재준 객원기자·중국문제 전문가 huf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