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5세대 '떠오르는 별' 누구인가 ⑨ 저장성 서기 시진핑(習近平)푸젠省長 재직 땐 GDP 전국 최고 달성… 리커창 대안인물로 주목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후계자 시절 남북한을 모두 방문했다. 후진타오에게 남북한 방문은 후계자 수습 과정의 일환으로 간주됐다.

이를 뒷받침하듯 5세대의 최선두 그룹에 속한 리커창(李克强) 랴오닝 서기와 보시라이(薄熙來) 상무부장은 최근 모두 남북한을 방문했다. 리커창은 북한정권수립 기념일 참석을 위해 2005년 9월 6일 북한을 방문했고 같은 달 26일에는 한국을 방문했다. 한 달 동안 남북한을 모두 둘러본 것이다. 리커창처럼 한 달 안에 남북한을 모두 둘러 본 5세대 인사로는 시진핑(習近平) 저장(浙江)성 서기가 있다. 그는 리커창보다 두 달 앞서 남북한을 모두 방문했다. 시진핑은 2005년 7월 9일 공산당 친선방문단 단장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뒤 같은 달 18일에는 한국을 방문했다. 경쟁하듯 두 사람은 남북한을 방문했다.

5세대 지도체제와 관련, 현재까지는 '리커창 총서기-보시라이 총리’의 구도가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리커창이 후진타오의 직계라는 점을 아킬레스건으로 보는 이들은 총서기 자리가 태자당에게 돌아갈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 가장 유력한 총서기 후보는 보시라이가 아닌 시진핑이다.

보시라이는 성 서기를 거치지 않고 중앙으로 올라온 반면, 시진핑은 저장성 서기까지 차근차근 올라왔다. 샤먼(廈門) 부시장, 푸저우(福州) 서기, 푸젠(福建)성 성장을 역임하며 푸젠성에 대만 자본을 많이 끌어들이는 등 양안 분야에서 경험을 축적했다. 저장성 서기로 있으면서 1인당 GDP(국민총생산)를 전국 최고인 3,000달러까지 끌어올리는 등 경제 분야에서도 괄목한 성과를 거두었다. 나이도 리커창보다 두 살 위인 1953년생이다. 1949년생인 보시라이보다도 유리하다. 보시라이가 태자당의 ‘스타’라면 시진핑은 태자당의 ‘호프’이다.

시진핑은 전인대 부위원장을 지낸 시중쉰(習仲勛 : 1913~2002)의 장남이다. 시중쉰은 제1 야전사 출신으로 펑더화이(彭德懷) 계열의 인물이었다. 때문에 시중쉰은 1962년 숙청되었고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한 한 해 뒤인 78년 복권되었다.

아버지 시중쉰은 경제특구 구상의 아이디어를 처음 내놓은 인물이다. 그는 광둥(廣東)성 서기 겸 성장으로 있던 79년 초 특구 설치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제기했고 덩샤오핑(鄧小平)은 이를 받아들여 선전 등 4 곳에 특구를 설치했다. 중국의 오늘날 번영이 특구의 성공에서 비롯되었음을 감안하면 시중쉰이야말로 진정한 개혁개방의 ‘총설계사’이다.

시진핑은 개혁의 입안자라는 프리미엄 탓인지 덩샤오핑-장쩌민(江澤民) 시절 내내 각별히 중용됐다. 30대에 아버지의 건의로 설치된 경제특구 중의 하나인 샤먼시의 부시장에 임명됐고 연해 지역의 푸젠 성장과 저장 성장을 잇달아 역임했다. 특히 97년 15대 때에는 보시라이를 포함한 5세대 태자당 인사들이 중앙위 정·후보위원 선거에서 대거 탈락할 때에도 그는 덩의 장남 덩푸팡(鄧樸方)과 함께 중앙위 진입에 성공했다.

칭화대 공정화학과를 나온 시진핑은 칭화대 사회과학대학에서 법학박사를 취득했다. 칭화대를 고리로 후진타오와 연결되지만 단파와의 관계는 껄끄럽다. 그가 2002년 푸젠성 성장에서 저장성 성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을 두고 단파인 쑹더푸(宋德福)가 서기로 내려온 데 따른 ‘정치적 피난 행위’라는 분석이 나왔을 정도다. 쑹더푸는 후진타오의 후임으로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제1서기를 역임한 단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하지만 시진핑은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가 ‘허시에(和諧 : 조화)’의 슬로건을 내걸자 문화건설과 경제발전의 조화를 내세우는 등 중앙의 정책에 호응했다. 이처럼 신중한 처신을 하고 있지만 그는 불균형 발전론의 첫 주창자인 시중쉰의 아들이다. 원하건 원하지 않던 성장 우위 노선의 대표자가 될 수밖에 없다. 만일 리커창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시진핑이 가장 유력한 대안이 될 것으로 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재준 객원기자·중국문제 전문가 huf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