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좌파 속속 득세로 대미 칼피 움직임 가속도남미 의회 논의도 합의… "3~5년 내 EU처럼 될 것"

볼리비아 코치밤바에서 열린 제2차 남미국가공동체회의를 마친 남미 각국 정상들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남미가 유럽연합(EU)처럼 될 수 있을까.

남미에 경제통합 움직임이 활발하다. 아직은 구상단계이지만 실행계획이나 정치적 동력은 과거에 비할 바 없이 구체적이고 역동적이어서 마냥 뜬구름으로 평가절하하는 것은 속단일 수 있다.

남미 각국의 여전한 경제적 수준차에도 불구하고 각국이 경제통합에 열을 올리는 것은 지난해부터 거세게 불고 있는 좌파 열풍이 한몫을 하고 있다. 실용주의 좌파에서 극렬 반미까지 내부에서도 스펙트럼은 다양하지만 추구하는 정책방향에서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칠레, 볼리비아, 가이아나, 페루, 우루과이, 파라과이, 콜롬비아, 에콰도르, 수리남 등 남미국가공동체(CSN) 회원국 12개국중 콜롬비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좌파 또는 중도좌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 같은 정치적 일체감이 산적한 내부 제약을 뛰어넘어 웅대한 밑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자산이다.

지난 8, 9일 볼리비아에서는 제2회 CSN정상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경제문제에 집중됐다. 남미 경제공동체를 양분하고 있는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과 안데스공동체를 통합해 명실상부한 제2의 EU를 만들자는 것이 이번 회의를 지배한 한결같은 목소리였다.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은 폐막식에서“유럽이 50년 걸려 만든 EU 경제공동체를 3~5년이면 실현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고,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도“남미의 풍부한 천연자원이 1950년대 유럽통합의 촉매제가 됐던석탄, 철강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두 정상의 포부에 걸맞게 회의에서는 다양한 플랜이 개진됐다. 우선 남미 경제를 통합하고 장기적으로 남미 의회 창설까지 논의할 상설기구로 대통령보좌관 협의체를 설치키로 합의했다. 또 경제통합의 혜택이 모든 회원국에 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각국의 국책은행이 참여하는 중남미 은행 창설 논의도 심도있게 오갔다. 한 발 더 나아가 지난달 26일 대선에서 승리한 라파엘 코레아에콰도르 대통령 당선자는 중남미 화폐단일화 까지 제안했다. 그는화폐통합이이뤄진다면 미국 달러화를 공식화폐로 하고 있는 정책을 폐기할 수 있다는 뜻까지 밝혔다. 앞서10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정부는 양국 간무역에서 달러화를 결제수단으로 사용함으로써 생기는 환율상의 손실과 불편을 없애기 위해 무역대금 결제를 자국 통화로 하는방안을 적극 추진하고 이를 메르코수르 전체회원국으로 확대하기로 합의하기도했다.

경제공동체 설립에 관한 밑그림 외에 각종 협력안도 쏟아졌다. 가장 관심을 모은 것은 남미대륙을 종단하는 천연가스수송관 건설프로젝트이다. 베네수엘라에서브라질, 아르헨티나를 잇는 총 9,000km에 달하는 거대한 가스관을 건설해 에너지를 고리로 남미를 하나로 묶겠다는 구상이다. 이 계획은 남미의 자원대국으로 급부상한 베네수엘라와 남미의 좌장 브라질이 합의했다는 점에서 자체로 강력한 추진력을 내포하고 있다.

이밖에 파나마운하를 대체해 브라질의 아마존 지역과 에콰도르의 태평양 연안을 연결하는 물류 수송망 건설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속출했다.

CSN 정상회의에 앞서 7일에는 우고 차베스베네수엘라 대통령과 룰라 브라질 대통령이 브라질에서 양국 정상회담을 갖고 메르코수르의 정치, 사회적 기능을 확대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새로운 메르코수르’구축에 합의했다. 이는 표현은 다르지만 남미 경제통합을 메르코수르가 주도하도록 한다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안데스공동체가 회원국들의 잇단 탈퇴, 또는 탈퇴 선언 등으로 동력을 상실한 데다 경제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회원국의 면면이 좌파가 지배하는 대부분의 남미 국가와는 결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회원국이 4개국이었던 메르코수르는 안데스공동체에 속했던 베네수엘라가 같은회원국인 페루, 콜롬비아가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를 체결한 데 반발해 메르코수르로 옮겨왔다. 또 코레아 에콰도르 대통령 당선자도 메르코수르 합류 의사를 밝혀 안데스공동체는 볼리비아, 페루, 콜롬비아 등 3개국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브라질 베네수엘라의 두 정상이 합의한‘새로운 메르코수르’의제에 따라 13일부터 사흘간 브라질에서는 내년 1월 18, 19일 역시 브라질에서 열리는 메르코수르 정상회의에 대비한 분야별 준비회담이 잇따라 열렸다. 13일 열린‘메르코수르 사회회담’에서는 메르코수르 5개 정회원국과 5개 협력회원국의 노동·인권·환경 단체 대표들이 대거 참석해 회원국 공통의 사회적 소외문제를 논의했다.

14일에는 메르코수르 의회의 출범을 알리는 1차 공식회의가 열렸다. 메르코수르의회는 올해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파라과이 등 개별국가 의회에서 설립이 통과돼 이들 4개국에서 내세운 18명의 대표들 로 구성돼 있다. 베네수엘라가 메르코수르 가입절차를 마무리해 의결권을 행사하게 되면 메르코수르 의회는 앞으로 기대되는 남미의회의 모태 역할을할것이 분명하다. 준비회담은 15일 회원국 외무장관들이 참석하는 메르코수르 집행위원회 회의와 재무장관및 중앙은행 총재 회의를 마지막으로 종료됐다. 내년 정상회의의 의제도 이날 회의에서 결정됐다.

세계경제에서 남미가 독자적목소리를 낼수 있다는 자신감은 지난달 29일부터 이틀간 나이지리아에서 열린 제1회 중남미-아프리카 정상회의에서도 드러났다. CSN 12개국과 아프리카연맹(AU) 53개국 정상 및 정부 대표단이 모두 참석한 이번 회의는 2003년 집권한 룰라 브라질 대통령의 오랜 소신과 결단의 결과물이었다.

세계의 대표적인 자원공급원이면서도 자본을 독점하고 있는 선진국의 시장통제에 막혀 걸맞은 위상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남남협력의 출발선이었다. 중남미-아프리카은행창설 문제, 세계무역기구(WTO)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에 대한 공동보조 문제가 집중 논의된 회의에서 정상들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와 같은 수준의 대륙 간 경제협력기구 창설을 중장기적 과제로 설정했다.

남미 경제통합까지는 많은 난제로 가로놓여 있다. 정치적 불안정성, 대미 관계에 대한이견, 열악한 자본시장 등 극복해야 할 과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추진 동력만 확보된다면 주변 여건과 환경은 과거 어느때보다 호의적이다. 수십 년간 미국의 뒷마당이란 오명을 뒤집어 써왔던 남미가 당당히 세계무대의 전면에 나설 수 있을지 흥미 진진하다.

보따리를 짊어진 볼리비아 원주민들이 제2차 남미국가공동체회의 참석 국가를 펄럭이는 코치밤바 공항을 지나가고 있다.

황유석 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