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사건 이래 상하이방 책사로 '권력 지형 설계'한 국가부주석로이터 "지지자들이 요구" 보도 불구 후진타오에 도전 가능성 없어

지난 8일 중국을 방문한 세골렌 루아얄 프랑스 사회당 대통령 후보와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는 쩡칭훙 국가부주석. 이틀 뒤인 10일 로이터 통신은 쩡칭훙의 지지자들이 후진타오에게 2008년에 국가주석직을 쩡에게 넘기라고 요구한다는 기사를 타전했다.
“후진타오(胡錦濤)는 쩡칭훙(曾慶紅)에게 국가주석직을 넘기시오.”

지난 10일 로이터 통신은 쩡칭훙 부주석의 지지자들이 당정군의 최고 직책을 모두 틀어쥐고 있는 후진타오에게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며 2008년 3월 전인대에서 국가주석직을 현재 부주석인 쩡칭훙에게 넘겨 줄 것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이들 쩡의 지지자는 1950년대 말부터 60년 초에 걸쳐 있던 집단지도체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이 당 주석으로 당을, 류샤오치(劉少奇)와 저우언라이(周恩來)가 각각 국가주석과 총리를 맡아 행정부를, 그리고 주더(朱德)가 전인대 상무위원장으로 입법기구를 각기 관장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로이터의 기사는 신빙성이 극히 낮다. 또한 실현 가능성도 거의 없다. 쩡칭훙이 태자당의 지도자로서 후진타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현 시점에서 후진타오에게 국가주석직을 이양하라는 것은 그에게 권력을 내놓으라는 이야기와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장쩌민·후진타오 권력 장악에 영향력 행사

냉전 시대는 물론 개혁·개방 초기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국가주석직은 의전적 기능을 수행하는 실권없는 자리였다. 서방 기준으로 보면 내각책임제 하의 대통령과 유사한 기능을 했다. 그런데 개혁·개방의 본격화로 정상외교의 필요성이 증대되면서 국가주석은 대통령제 하의 대통령과 비슷하게 역할이 강화했다. 만일 국가주석을 쩡칭훙에게 넘긴다면 총서기 후진타오가 방문할 국가는 여전히 공산당 1당 독재국가인 북한과 베트남으로 국한된다. 지방에서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출신의 단파(團派)가 최고지도부를 속속 장악하는 등 후진타오의 권력이 나날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나온 이 기사는 다소 엉뚱하기까지 하다.

문제의 기사가 나온 다음날인 11일에 있은 외교부 정례 브리핑에서 류젠차오(劉建超) 대변인은 확인 요청을 받고 “내가 답변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라고 한 뒤 “중국의 민주제도는 부단히 개선 중”이라고 덧붙였다. 사족 같은 덧붙임은 그 가능성을 아주 배제할 수 없는 시사처럼 보인다. 그러나 필자로선 답이 금방 나오지 않느냐는 전반부에 방점을 찍고 싶다. 외교부 브리핑 녹취록에는 관련 질의, 응답이 빠져있다.

다만 로이터 기사는 중국 ‘제일 책사’ 쩡칭훙의 현재 위상을 상기시키는 데 유효하다. 89년 6월 톈안먼(天安門) 유혈진압 후 상하이 서기에서 일약 총서기에 발탁된 장쩌민(江澤民)이 상하이에서 데려 온 단 한 명의 측근인 쩡칭훙은 이후 중국의 권력질서를 디자인하는 주역이 되었다.

95년 장쩌민을 ‘굴러온 돌’ 취급하며 무시했던 ‘박힌 돌’ 천시퉁(陳希同) 베이징 서기를 숙청하는 결단을 내리도록 만들어 장쩌민이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의 위상을 확보하도록 한 것은 바로 그였다. 97년에는 중국공산당 15차 전당대회(15대)에서 전인대 상무위원장이던 차오스(喬石)의 명예퇴진을 압박, 이를 실현시킴으로써 장쩌민 1인 집권체제를 완성시켰다. 차오스는 덩샤오핑 사후 집단지도체제를 염두에 두고 장쩌민을 지속적으로 공격했으나 쩡칭훙의 책략에 꺼꾸러지고 말았다. 차오스의 낙마를 지켜 본 리펑(李鵬)은 대권의 꿈을 접고, 차오스가 비운 전인대 상무위원장의 자리를 조용히 지키다가 2002년 은퇴했다.

장쩌민이 정치국 위원일 때 이미 상무위원이던 리펑과 차오스는 장쩌민을 단지 과도적 지도자로 여겼다. 하지만 쩡칭훙은 이들 반대파를 각개격파 방식으로 차례차례 제거해 나갔다. 천시퉁을 부패문제로 걸어 숙청할 때 공안통인 차오스의 힘을 빌었고 이후 연령문제를 들고 나와 차오스를 꼼짝 못하게 했다.

2002년 16차 당대회(16대)에서 물러나지 않아도 될 리루이환(李瑞環)이 자진 은퇴하면서까지 장쩌민의 퇴진을 압박하는 가운데서도 장쩌민의 군사위 주석직 유지를 관철시켰다. 후진타오의 완전한 권력승계가 아닌 장쩌민 수렴청정 체제를 수립함으로써 상하이방의 계속적인 집권을 가능케 했다.

이러한 이력의 쩡칭훙이기 때문에 상무위원 겸 국가부주석으로 권력서열 5위인 그가 후진타오와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를 견제하며 장쩌민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하리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었다. 하지만 쩡칭훙은 2005년 9월 ‘토사주팽(兎死主烹)’의 처신을 함으로써 관측통들을 놀라게 했다. 원로와 반대파로부터 군사위 주석직을 후진타오에게 넘기라는 압력을 받던 장쩌민은 자신의 추종세력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사임 반대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장쩌민으로서는 천만뜻밖에도 쩡칭훙이 이제 사임할 때라고 장을 설득하고 나선 것이다. 쩡칭훙은 무리하게 군사위 주석직을 고수하다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상하이방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논리를 편 것으로 판단된다. 조직을 위해 주군을 희생시킨 것이다. 쩡칭훙의 이 같은 ‘전향’으로 후진타오 체제가 비로소 구축될 수 있었다.

단파와 태자당 연합정권 구상하는 듯

지난해 천량위(陳良宇) 상하이시 서기 해임에도 그가 중심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장쩌민의 퇴진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상하이방은 균형발전 정책으로 전환하려는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에 대해 면종복배의 자세를 취했다. 쩡칭훙은 충돌의 위기 속에서 후진타오 편에 섰다. 잘 알려졌다시피 쩡칭훙은 상하이방이면서 동시에 태자당이다.

그는 태자당 세력을 이용, 상하이방을 거세했다. 쩡칭훙은 천량위를 베이징으로 불러 올린 후 자진 사임을 권유했으나 거부하자 해임했다. 이어 측근인 허궈창(賀國强) 조직부장을 상하이로 내려 보내 상하이방이자 단파인 한정(韓正)을 대리서기에 임명하고 천량위의 측근들을 축출했다, 허궈창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세 번째 부인인 허즈쩐(賀子珍)의 조카로 쩡과 마찬가지로 태자당이다. 장쩌민은 천량위를 구제해보려고 했으나 쩡칭훙의 설득을 받고 사후 승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쩡칭훙의 이 선택으로 권력은 후진타오 쪽으로 완전히 중심을 이동했다.

쩡칭훙은 장쩌민이 과도적 지도자가 아닌 ‘제3세대의 핵심’ 이 되도록 했으며 또한 후진타오 역시 ‘제4세대의 핵심’으로 자리잡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를 ‘권력의 디자이너’라고 불러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는 최고지도자의 위치를 넘보지 않으면서도 권력향방을 결정해 왔다. 쩡칭훙의 정치적 행로는 옛 소련 시절의 미하일 수슬로프를 연상시킨다. 수슬로프는 47년 당 중앙위 서기가 된 이후 82년 1월 25일 사망할 때까지 그 직위를 유지했다. 64년 10월 소련공산당 중앙위 총회에서 흐루시초프 추방의 검사역을 맡을 정도로 실세였으나 최고지도자가 되기보다는 최고지도자를 움직이는 위치에 만족했다. 브레즈네프 시절 체코 침공 같은 주요 대외정책을 결정하는 데 그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데올로기 담당이기도 한 그는 체코 침공을 정당화하는 ‘제한주권론’의 입안자이기도 하다.

89년 이래 쩡칭훙이 항상 권력투쟁의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의 친소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시대의 흐름을 탄 덕분이다. 쩡칭훙이 지금 설계하는 미래 정치 지형도는 단파와 태자당과의 연합정권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동안 사전에 대세를 결정지음으로써 결과를 가늠할 수 없는 권력투쟁을 회피해온 그가 국가주석직을 구태여 요구해 혼돈스런 권력투쟁을 불러오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을 듯싶다. 문화대혁명의 공을 내세워 류샤오치가 비운 국가주석직을 요구했던 린뱌오(林彪)의 비참한 몰락을 잘 아는 쩡칭훙이 그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002년 11월 후진타오가 16차 당대회에서 총서기로 선출됐을때 쩡칭홍 부주석의 장악 하에 있는 서기처와 빗대어 그의 불안한 위상을 풍자한 시사만화.

이재준 객원기자ㆍ중국문제 전문가 webmaster@chinawat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