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의회 '대통령 특별입법권' 선포로 초헌법적 권한 부여서방자본 축출·에너지산업 국유화 통한 독재권력 공고화 노릴 듯

야망의 끝은 어디일까.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의회로부터 특별입법권을 위임받은 뒤 나온 서방 언론들의 반응이다. 그렇잖아도 각종 초법적 조치들로 국내외에 엄청난 논란을 불러왔던 차베스 대통령이 이제 자기 손으로 만든 법이나마 합법적 틀을 갖췄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초헌법적 조치들이 튀어나올지를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베네수엘라 의회가 지난달 31일 차베스 대통령에게 부여한 ‘대통령 특별입법권’은 한마디로 차베스 대통령을 ‘현대판 제왕’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는 초헌법적 백지수표라 할 수 있다. 수도 카라카스 시내 광장에서 진행된 특별의회에서 반대파인 야당이 빠진 가운데 거수투표로 만장일치 통과된 특별입법권에 따라 차베스 대통령은 앞으로 18개월간 의회의 동의없이 포고령만으로 법률을 제정할 수 있게 됐다.

대통령 본인이 ‘1인 의회’가 된 것이자 ‘대통령의 말이 곧 법’이 되는 전제군주적 권한을 부여받은 것이다. 실리아 플로레스 의회 의장은 특별입법권 통과를 선포한 뒤 “국민주권 만세, 차베스 대통령 만세, 사회주의 만세”를 외치며 새로운 황제의 탄생을 찬양했다.

의회가 특별입법권을 통과시키면서 이 법의 효력을 인정한 분야는 모두 11개. 특히 차베스 대통령이 주창해온 ‘21세기형 사회주의 건설’에 필수적인 경제, 에너지, 국방 분야에서 집중적인 ‘입법’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석유와 통신, 전기 등 국가 기간산업에 대한 국유화 조치와 부자들에 대한 중과세 등은 이미 기정사실로 나돌고 있다.

플로레스 의장은 “이 법은 차베스 대통령에게 천연가스와 전기, 석유 등 에너지 부문에서 필요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언급해 이 법의 주 타깃이 세계 제5위 산유국인 베네수엘라에서 서방자본을 몰아내기 위한 것임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베네수엘라의 석유와 천연가스에 투자하고 있는 엑손과 BP, 셰브론 등 서방 다국적 기업들은 포고령에 의해 자신들이 갖고 있는 지분을 몰수당하는 치명타를 받지 않을까 벌써부터 전전긍긍하고 있다.

차베스 대통령이 지난달 10일 임기 6년의 3기 정부를 출범시키면서 오리노코강(江) 유전 사업권의 다수 지분을 서방 에너지 기업이 아닌 베네수엘라 국가가 소유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특별입법권은 또 밑으로부터의 개혁과 부의 평등이라는 명분 아래 지방행정구역을 조정하고 주민 스스로가 정부예산 등을 책정할 수 있도록 수천개의 지역공동체 협의회를 구성할 수 있도록 했다. 기존 행정ㆍ사회조직도 사회주의에 맞게 완전 뜯어고치겠다는 것이다. 이밖에 ▲은행 세제 보험 금융규제 부문 개혁 ▲무기류 규제, 군 조직 등 안보ㆍ국방 분야에 대한 절대적 정책 결정권 보장 등도 앞으로 예상되는 정책들이다.

차베스 대통령에게 이런 초법적 권한이 부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차베스는 2001년에도 의회로부터 이런 권한을 부여받아 정치, 경제, 사회, 영토, 외교 5개 분야에 걸쳐 모두 49개의 개혁법을 통과시킨 바 있다.

이번에는 60여 개의 새 법이 제정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데, 이번 특별입법권이 당시와 다른 것은 그때는 위기에 빠진 경제를 구하겠다는 명분이라도 있었으나 지금은 치솟은 원유가로 인해 베네수엘라 경제가 사상 유례없는 호황을 구가하는 가운데 나왔다는 점이다. 경제적 측면보다는 서방자본 축출, 에너지산업 국유화를 통해 권력을 보다 공고히 하자는 정치적 측면에서 비롯됐으리란 것을 짐작케 한다.

권력독점을 위한 차베스의 야심은 지난달 취임식 때 이미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영구집권의 꿈이다. 차베스 대통령은 임기 6년에 3선까지로 돼있는 헌법상 대통령 연임 규정을 없애고 ‘무제한 대선 출마’를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취임식 연설 도중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을 흉내내 “조국과 사회주의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결의에 찬 맹세를 다짐해 ‘쿠바식 영구집권체제를 노리는 것’이라는 의심을 샀다. 또 오른쪽 어깨에 걸었던 삼색 대통령 휘장을 왼쪽 어깨로 옮겨 좌파 정부로서의 자신감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로 미뤄 앞으로 구성될 개헌을 위한 특별위원회가 입안할 개헌안에는 ▲대통령 연임 규정 철폐 ▲사회주의로의 체제전환 가속화 ▲국가자산 매각 금지 등 차베스를 종신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필요조건이 모두 망라될 것으로 전망된다. 특별위원회는 의회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활동하는데, 집권당인 ‘제5공화국운동당(MVR)’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의회 구조상 특별위원회의 위원들도 친(親) 차베스 의원들이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특별입법권 통과로 베네수엘라 정부와 미국 정부 간의 설전도 더욱 가열되고 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특별입법권이 통과되자 “베네수엘라 국민이 걱정스럽다”는 말로 불편한 속내를 드러낸 뒤 “민주제도가 손상될까 우려돼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해 좌시하지는 않겠다는 뜻을 넌지시 암시했다.

미국 언론들도 일제히 ‘차베스 때리기’에 나섰다. 워싱턴포스트는 “차베스 대통령의 권력이 갈수록 커지는 것에 절망한 베네수엘라 주민 수백명이 매일 수도 카라카스의 스페인 영사관 등에서 이민허가를 받으려 장사진을 치고 있다”며 길게 줄지어 선 사진을 함께 게재했다. 이 신문은 또 차베스 대통령이 미국이 대주주로 있는 베네수엘라 최대 전화회사 CANTV와 카라카스전력(EC)을 국영화하려 하고 2002년 실패로 끝난 반(反) 차베스 쿠데타를 지지한 의혹을 받고 있는 RCTV 방송의 허가를 갱신하지 않으려는데 대해 미국 정부 관리들이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CNN 방송은 특별입법권 통과 과정을 매시간 주요 뉴스로 다뤘으며, 한 뉴스 진행자는 “차베스 대통령이 베네수엘라를 독재국가로 바꾸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차베스 대통령은 의회가 특별입법권을 1차 승인한 지난달 21일 미국 국무부가 이에 대한 비난 성명을 발표하자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을 “나의 아가씨(my little girl)”라고 부르며 “안녕하신가, 나를 잊었나”고 한껏 조롱했다. 또 미국인을 비하하는 ‘gringo’라는 표현을 동원해 “미국인들은 지옥에나 가라, 너희 나라로 가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차베스 대통령의 갈수록 과격해지는 반미 사회주의 실험에 미국이 어디까지 인내력을 보일지 관심거리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