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O 동진·동구권 MD 구축 등 美 군사전략에 강력 반발, IMF탈퇴 시사경제·정권 안정 쌍두마차 타고 목소리 높여… 신냉전시대 도래 해석도

러시아는 부활하는가. 19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냉전이 종식된 지 15년. 소련은 러시아로 간판을 바꾼 뒤 2류국가로 내려앉았고, 미국은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세계를 호령해왔다. 앞으로도 그럴까.

2000년 강한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집권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최근 미국을 향해 작심한 듯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냈다. 발언의 내용이나 수위로 볼 때 과거 미·소 대립과 연상케 할 만큼 격렬한 것이어서 ‘신냉전’이 도래하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낳았다. 말뿐만이 아니다. 다분히 미국을 겨냥한, 미국의 아픈 곳을 찌르는 활발한 외교행보는 마치 동면에서 막 깨어난 북극곰을 생각나게 한다.

푸틴 대통령의 대미 도전장은 2월 9~11일 독일 뮌헨에서 열린 43차 국제안보회의에서 시동이 걸렸다. 미국의 군사전략을 “일방적이고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한 푸틴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과 미사일방어(MD) 시스템을 그런 사례로 지목했다.

특히 미국이 체코와 폴란드에 설치하려는 MD 시스템은 냉전시대 ‘상호확증파괴(MAD)’라는 공포의 핵균형을 통한 평화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강력 비난하며 미국이 MD 시스템을 고집할 경우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토폴_M’을 실전 배치하겠다는 뜻을 시사했다.

같은 날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NATO 국방장관 회의에서 세르게이 이바노프 러시아 국방장관(최근 제1부총리로 승진)은 “체코와 폴란드의 MD 시스템이 북한과 이란의 위협때문이라는 논리는 어불성설”이라며 새로운 세대의 ICBM과 핵잠수함, 항공모함, 조기경보 레이다 시스템 등이 포함된 야심찬 군 현대화 계획을 발표했다.

올해 러시아의 군사예산은 310억 달러. 전비를 포함해 6,246억 달러로 한국전쟁 이후 최대 규모인 미국의 올해 국방비와는 여전히 상대가 되지 않지만 푸틴 재임 직전과 비교하면 30% 이상 늘었다.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이 국방비로 지출되고 있다.

러, 대륙간 탄도 미사일 실전배치 움직임

러시아 언론을 통해 흘러나온 중거리핵전력감축협정(INF)에서의 일방 탈퇴 보도도 같은 맥락이다. 러시아 정부로부터 공식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INF 협정은 더 이상 러시아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국제안보회의에서의 푸틴 대통령이나 “폴란드, 체코의 MD 구축계획을 철회하지 않으면 INF 협정에서 탈퇴할 수 있다”는 러시아 참모총장의 발언 등을 볼 때 외교적 엄포만은 아닌 듯하다.

1987년 구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맺은 INF 협정은 냉전 종식의 돌파구로 평가받았던 만큼 러시아의 탈퇴 시사는 과거 미국이 탈 냉전 후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에서 일방 탈퇴한 것과 같은 군사적 긴장감을 야기하기에 충분하다.

국제안보회의가 끝나자마자 중동의 대표적인 친미 국가들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요르단 등 3국을 순방한 것은 푸틴 대통령의 ‘말’이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러시아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인 이번 중동 순방은 이라크전 실패로 미국의 중동정책이 수렁에 빠진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어서 특히 이목을 집중시켰다.

푸틴 대통령은 이번 중동 순방에서 에너지와 군사부문에 초점을 맞췄다.

사우디에서는 핵에너지 개발협력과 러시아제 무기구입 문제를 논의했고, 카타르에서는 천연가스 공급에 대한 협력을 제의했다. 특히 카타르는 러시아, 이란 다음으로 천연가스 매장량이 많은 국가라는 점에서 서방이 의심하고 있는, OPEC(석유수출국기구) 판 ‘천연가스 카르텔’ 조직을 본격화하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다.

푸틴은 카타르에서 “러시아는 천연가스 카르텔 구상을 거부한 적이 없다”고 운을 뗀 뒤 “천연가스 생산국들의 공급량 조절은 가격 안정을 위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미 이란과 에너지 부문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러시아가 세계 3위 천연가스 매장국인 카타르까지 끌어들일 경우 이들 3국의 천연가스 생산량은 세계 전체의 55%이상을 차지해 사실상 시장을 지배할 수 있다.

지난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그루지야 등 주변국들과 천연가스 공급 가격 분쟁을 일으키는 와중에서 한때 러시아산 가스 공급이 끊겨 비상이 걸렸던 유럽으로서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유럽은 천연가스 소비량의 25%, 수입량의 40%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유럽 가스 소비량의 10%를 대고 있는 세계 8위 알제리 역시 지난달 러시아와 가스 생산ㆍ판매 분야에서 러시아와 보조를 맞추기로 합의한 바 있다.

푸틴 중동 에너지 외교에 유럽 긴장

2000년 4월 이후 7년여 만에 최근 윤곽을 드러낸 러시아의 ‘신 군사독트린’은 러시아의 달라진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축소판이다.

모스크바 군 소식통들을 통해 나온 신 군사독트린은 ▲러시아에 대한 외국의 내정간섭 ▲러시아 인접국에 외국 군사시설 설치 등을 외부위협 요인으로, 에너지 통제권과 환경을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요인으로 규정했다. 또 이전 독트린에는 없었던 적 개념으로 NATO와 국제 테러리즘을 새로 규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에너지 자원’과 ‘내정간섭’을 명문화한 부분이다. 에너지는 석유ㆍ천연가스를 포함해 세계 에너지 강국으로 급부상한 러시아가 이를 바탕으로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지이자 자신감의 표현이다.

내정간섭 배제는 미국의 MD 설치 등 서방의 정치ㆍ군사적 간섭을 배격하고 패권국가로서의 지위를 되찾겠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한마디로 지금까지의 소극적, 수동적 외교에서 벗어나 러시아의 이익을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관철시켜 나가겠다는 의미이다.

1998년 외채 지불능력을 상실해 대외 채무지불유예(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굴욕을 감수해야 했던 러시아가 불과 10년도 안 돼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한때 배럴당 70달러까지 치솟은 석유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석유 등 에너지에서 매년 천문학적인 외화를 벌어들이는 러시아는 지난해 8월 채권국 모임인 ‘파리클럽’에 지고 있던 장기 국가부채 237억 달러를 모두 갚아버렸다.

경제적 호황은 푸틴 정권에 대한 러시아 국민의 80%에 이르는 절대적 지지로 이어졌다. 경제와 정권의 안정이라는 쌍두마차가 푸틴의 러시아를 세계의 러시아로 탈바꿈시킨 동력인 셈이다.

3선 출마 금지 규정으로 내년 대선에 출마할 수 없는 푸틴 대통령이지만 그가 러시아 정계에서 쉽게 사라지리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헌법을 뜯어고치는 초강수를 들고 나올지, 아니면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싱가포르를 사실상 통치하고 있는 리콴유(李光曜)처럼 막후에서 러시아를 좌지우지하는 ‘킹메이커’로 남을지, 둘 중 어떤 선택을 할까만이 관심사일 뿐이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