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5세대 '떠오르는 별' 누구인가 중국의 새 세계전략 '화평굴기' 이념 입안, '후진타오의 키신저' 별칭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새해 들어 첫 방문지로 아프리카를 택했다. 8개 순방국 중에는 인도양의 세이셸 군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1월 30일 아프리카 순방길에 오르기 엿새 전인 1월 24일 유엔 무대에서 중국은 미국에 뼈아픈 외교적 패배를 안겼다. 미국이 주도한 미얀마 규탄 결의안에 대해 러시아와 함께 거부권을 행사, 부결시킨 것이다. 중국은 인권문제는 국제안보와 관련이 없다는 이유를 댔다. 하지만 실제는 미얀마의 전략적 가치를 염두에 둔 투자였다.

중국이 인도대륙과 인도차이나 반도 사이의 안다만으로 해상 출구를 확보하려면 미얀마를 우호국가로 잡아두어야 한다. 중국의 일련의 행동은 동(東)중국해에서 아프리카에 이르는 해상루트를 확보하려는 중국의 전략적 포석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이 세계 유일 초강대국 미국을 마냥 긴장시키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중국은 파키스탄에서 이달 말에 실시되는 7개국 연합 해상훈련에 참가한다. 파키스탄과 중국 외에 미국, 영국, 프랑스, 방글라데시와 터키가 참가하는 다국적 해상훈련은 국제 테러리즘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다. 중국이 다국적 해상훈련에 참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중국은 일본과 군사 핫라인 설치를 추진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또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후진타오에게 전화를 걸어 치하했을 정도로 중국은 6자회담 타결을 위해 대북한 압력 행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후진타오의 중국’은 확실히 덩샤오핑(鄧小平)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극적인 외교를 펴고 있다. 덩샤오핑 시대와 장쩌민(江澤民) 시대의 외교전략을 ‘도광양회(韜光養晦)’라고 한다면 후진타오의 그것은 ‘유소작위(有所作爲)’이다. 전자가 ‘힘을 기르자’는 방어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해야 할 것은 해야 한다’는 공세적인 전략이다.

다만 상대방을 한껏 긴장시키는 마오쩌둥(毛澤東) 시대의 세계전략과 차별되는 것은 ‘화전(和戰)’ 양면 전술을 쓴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화평굴기(和平崛起)’라는 용어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렇다면 ‘화평굴기’의 이데올로그는 누구일까. ‘화평굴기’를 검색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인물은 정비젠(鄭必堅)과 왕지쓰(王緝思)이다. 정비젠은 후야오방(胡耀邦)의 비서를 지낸 단파(團派) 원로다. 1932년생으로 은퇴할 나이를 훨씬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화평굴기’ 선전의 전면에 나서고 있다.

보다 주목해야 할 인물은 1948년생으로 현재 베이징(北京) 대학 국제관계학원 원장으로 있는 왕지쓰다. 전임 원장이 부총리 겸 외교부장을 지낸 첸치천(錢其琛)이라는 사실에서 외교분야에서 그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왕지쓰란 이름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그는 지난 1월 18일 관훈클럽 창립 50주년 기념 세미나 참석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인터뷰를 실은 신문들은 하나 같이 그를 후진타오의 ‘외교 브레인’ 으로 소개했다.

최근 동정은 이러한 소개를 뒷받침한다. 올해 1월 1일 중국에서는 ‘중국 학자들이 바라본 세계(中國學者看世界)’라는 제목의 총서 8권이 발간됐는데 왕지쓰가 책임편집자이다. 1권은 국제질서, 2권은 국가이익, 3권은 대국전략, 4권은 중국외교, 5권은 국제안보(國際安全), 6권은 비전통안보, 7권은 세계경제, 그리고 8권은 세계경영(全球治理)이다.

왕지쓰는 총서 발간 목적에 관해 중국이 세계문제를 보는 관점과 시각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왕지쓰는 지난해 12월 5일 ‘중국외교학원 포럼’이 주관한 ‘2006년 국제정세와 중국외교’ 세미나의 주 발표자의 한 사람이었다. 또한 지난해 11월 CC-TV를 통해 방영되어 국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다큐멘터리 ‘대국굴기(大國起)’의 주요 출연자 중의 한 사람이다.

왕지쓰는 사회과학원 미국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미국통이다. 그는 ‘미국이 중국을 아는 것보다 중국이 미국을 더 잘 안다’는 대부분의 중국학자들과 관료들의 통념에 상당히 비판적이다.

그는 미국 내 싱크탱크의 수와 연구 인력, 재정 등을 근거로 이런 통념이 잘못됐음을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했다고 한다. 미국 학자들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었는데 이는 미국을 보다 잘 알기 위해서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의 관훈클럽 세미나 강연에서 북한 핵실험 후 부시 행정부는 ‘핵 비확산’으로 마지노선을 후퇴시켰다고 지적했으며 중국과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서로의 이익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협력하는 관계를 당분간 지속할 것으로 내다봤다.

왕지쓰는 문혁 당시 저명한 언어학자인 부친 왕리(王力)가 ‘반동학벌(反動學閥)’로 규탄받는 바람에 네이멍구(內蒙古)로 하방되어 9년 동안 노동을 하며 보냈다.

베이징대학 국제정치학과에 입학한 것은 1978년으로 나이 30세 때였다. 베이징대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교수에 임용되었고 91년 사회과학원 미국연구소로 자리를 옮겼으며 2년 뒤인 93년 소장에 올랐다.

당시 중앙당교의 전략연구소 소장을 겸임하면서 후진타오, 정비젠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후진타오는 92년 중국 공산당 제14기 전국대표대회(14대)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된 뒤 차오스(喬石)의 후임으로 당교 교장을 겸임하였고 상무부교장으로 실질적인 교장을 역할을 한 이가 정비젠이다.


이재준 객원기자 중국문제 전문가 webmaster@chinawat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