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진타오_원자바오’ 투톱체제원자바오 총리, 신화통신 통해 鄧의 선부론 극복 주장

후진타오 주석이 지난해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에 참석, 군사학원 대표들과 악수하고 있다.
중국에서 공산당 전당대회가 치러지는 해는 백화제방(百花齊放)의 해이기도 하다.

2002년 16차 전당대회(16대)를 목전에 두고는 과거 정통노선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좌파의 만언서(萬言書)에 맞서 판웨(潘岳)(현 환경총국 부국장)가 중국 공산당이 투쟁적이며 특정계급을 대표하는 ‘혁명당’에서 각 계층을 대변하며 법치에 바탕을 둔 ‘집권당(執政黨)’으로 질적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 한바탕 파란을 일으켰다.

17대를 앞두고 이러한 현상이 또다시 반복될 조짐이다. 전 인민대학 부총장인 셰타오(謝韜)는 최근 중국이 사회주의를 버리고 민주사회주의를 택해야만 살길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중국 공산당에게 일당독재를 포기하라는 요구이다. 지난해 10월에는 위커핑(兪可平) 당 중앙편역국 산하 당대마르크스주의연구소 소장이 “민주는 좋은 것”이라며 민주주의 확대를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미국에 망명 중인 톈안먼(天安門) 시위의 주역 왕단(王丹)은 홍콩에 거주 신청을 내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는 17대의 해를 맞이하여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겠다는 예고이다. 왕단이 지향하는 정치노선은 위거핑의 당내 민주주의 확대와 세타오의 민주사회주의 도입 주장보다 더 급진적이다. 서구적 민주주의의 구현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16대에서 판웨의 주장이 배척된 것과 마찬가지로-그는 이 주장 때문에 중앙위 진입에 실패했다-이들의 주장이 17대에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1992년 14대의 노선을 정한 것은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이 남쪽 지방을 시찰하며 한 말, 이른바 남순강화(南巡講話)였듯이 그해 당 대회의 노선이 어떻게 정해질 것이냐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최고 지도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지난달 26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신화통신을 통해 발표한 문건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문건의 제목은 ‘사회주의 초급단계의 역사적 임무와 대외정책의 몇 가지 문제에 관하여(關於社會主義初級段階的歷史任務和對外政策的幾個問題)’이다.

우선 ‘사회주의 초급단계’ 라는 용어가 눈길을 끈다. ‘사회주의 초급단계’는 자오쯔양(趙紫陽) 전 총서기가 87년 13대에서 제시한 개혁 개방 이론이다. 중국이 상품경제의 이행기를 거치지 않고 혁명적 수단에 의해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상당기간 시장경제의 요소를 활용하는 초급단계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론의 핵심이다.

원 총리가 이 시점에서 2005년에 타계하여 이제 역사적 인물로 된 자오쯔양이 20년 전 당 대회에서 제시한 이론을 재론하며 역사적 임무 운운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문건을 읽어 보면 그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이 풀리게 된다. 문건은 올해 말로 예정된 17대를 앞두고 후진타오(胡錦濤)-원자바오 체제의 노선의 기본틀을 제시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상하이방(幇)과의 어정쩡한 노선상의 동거관계를 청산하는 선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노선이 덩샤오핑 노선에서 이탈하지 않았음을 변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해 9월 천량위(陳良宇) 전 상하이 서기의 해임으로 권력기반을 확고히 다진 후-원 체제는 덩샤오핑의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왔다. 올해 춘제(春節)를 맞아 후진타오는 서북부의 간쑤(甘肅)성을 방문했고 원자바오는 동북의 랴오닝(遼寧)성을 찾았다. 덩샤오핑이 겨울에 상하이로, 광둥(廣東)으로 갔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와 함께 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은 어느 새 자취를 감추고 ‘허시에(和諧)’, 즉 ‘조화’라는 슬로건 아래 ‘공동부유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2월 19일은 덩샤오핑의 10주기이지만 베이징에서는 그를 기리는 행사가 열리지 않았다. ‘덩샤오핑 문선(文選)’을 발간하고 쓰촨(四川)성 그의 고향에서 기념학술대회를 연 것이 고작이다. 5년 단위로 성대한 기념식을 갖는 중국의 관례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의도된 홀대가 아닐 수 없다.

문건에서 원자바오는 덩샤오핑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공동부유’라는 개념이 덩샤오핑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했다. 그가 인용한 덩의 발언은 “사회주의의 본질은 생산력을 해방하는 것이며 생산력의 발전을 통해 양극 분화를 소멸시켜 공동부유를 달성하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또한 사회주의 기본노선이 100년 동안 동요되지 않아야 한다는 말도 언급했다. 자신들의 노선은 덩샤오핑의 지침을 이행하는 것이라는 해명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느 쪽의 깜박등을 켜느냐가 아니라 차가 어느 쪽으로 가느냐는 것이다.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추구하고 있는 노선이 덩의 노선을 좇는 것이라는 말은 개혁과 개방이 마오의 노선을 따랐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덩샤오핑은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표준’이라는 마오의 말을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라는 표현으로 변용하여 자신의 노선 전환을 정당화했다. 원자바오도 덩의 발언을 통해 균형발전 노선을 정당화하고 있는 셈이다.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의 최근 행보와 원자바오의 문건의 이 같은 괴리는 이번 17대가 또 한차례의 중대한 노선 전환의 정치행사가 될 것임을 예고한다.

중국 공산당은 창당 이래 계속적인 노선투쟁을 벌여왔다. 개혁 개방 이후에도 이런 현상은 변함이 없었다. 개혁 개방 초기에는 개혁의 범위를 놓고 덩샤오핑과 천윈(陳雲)의 대립이 있었다.

덩샤오핑이 대담한 개혁과 적극적 개방을 주장한 반면 ‘새장 경제학(鳥籠經濟學)’으로 대변되는 천윈은 제한적 개혁, 개방론자였다. 두 사람은 ‘불편한 공존’을 유지했다. 덩샤오핑이 주도권을 쥐었으나 천윈 역시 배척되진 않았다.

이후 개혁 개방의 속도를 놓고 이른바 개혁파와 보수파 간의 대립과 갈등이 전개되었다. 이 같은 대립은 덩샤오핑과 천윈의 경우처럼 공존을 지향하지 않았다. 개혁파인 후야오방(胡耀邦)이 보수 원로들의 압력에 못 이겨 총서기직에서 사임하고 그의 후임 자오쯔양도 톈안먼 사태 와중에서 쫓겨나야 했다. 이어 들어선 장쩌민 체제는 타협의 소산이었으나 얼마 못 가 정치적 갈등은 재현되었다.

이 단계에 접어들면서 노선 갈등은 ‘마이너리그’가 됐다. 92년 남순강화와 14대를 통해 개혁 개방이 시대정신으로 굳건히 뿌리를 박은 탓이다. 메이저리그는 중앙과 지방 간, 파벌과 파벌 간의 주도권 싸움으로 특징지워졌다.

권력투쟁 결과 천시퉁(陳希同)의 베이징방(北京幇), 예쉬안핑(葉選平)의 광둥방, 그리고 리펑(李鵬)과 차오스(喬石)으로 대표되는 구 주류세력을 차례차례 제압하고 장쩌민 중심의 상하이방(上海幇)이 정치적 패권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2002년의 16대는 상하이방과 그 반대세력 간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 결과 지난 4년간 ‘중국호’는 두 명의 선장이 탄 배와 같았다. 중앙에서는 균형 발전을 소리 높여 외쳤지만 지방에서는 각개약진이 벌어졌다. 매년 3월 전인대에서 내세운 성장목표가 연말에 초과 달성되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장쩌민은 또 다른 ‘태상황’으로 군림했고 사실상의 총리는 원자바오와 책상을 치며 맞장을 뜨는 천량위처럼 보였다. 배의 속도는 빨랐지만 배의 앞머리는 우왕좌왕이었다. 어딘가 불안했다. 하지만 지난해 9월 천량위의 숙청을 계기로 불안한 동거는 청산됐다.

덩샤오핑은 개혁 개방을 추진하면서 ‘1개 중심 양개 기본점’이라는 노선의 틀을 제시했다. 경제건설을 중심에 놓고 ‘4항 견지’와 ‘개혁 개방’을 양개 기본점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4항 견지는 사회주의 원칙을 고수하겠다는 것이었으나 무게중심은 개혁 개방에 맞추어져 있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원자바오의 문건은 발전과 균형을 조화롭게 담고 있지만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어디에 역점을 두고 있는지는 그들의 행보가 말해준다.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덩샤오핑의 수법을 원용하여 덩을 극복하려 하고 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다.

중국이 장기간‘사회주의 초급단계’에 머물 것 이라고 밝혀 눈길을 모은 원자바오 총리가 우이(吳儀) 부총리와 함께 과학분야 연구소를 시찰, 관계자의 브리핑을 받고 있다.

이재준 객원기자 중국문제 전문가 webmaster@chinawat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