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5개국 순방… 반미바람 잠재우기 때늦은 러브콜

3월 5일 중남미 순방을 앞둔 부시 대통령이 히스패닉 상공회의소에서 중남미 극빈층 지원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잃었던 뒷마당을 되찾을 수 있을까. 8일부터 6박 7일 일정으로 브라질, 우루과이, 콜롬비아, 과테말라, 멕시코 등 중남미 5개국을 순방하고 있는 부시 대통령의 화두이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두 차례 전쟁을 치르고,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테러와의 전쟁에 몰두하느라 신경 쓰지 못했던 중남미가 어느새 반미 좌파정권으로 빨갛게 물든 데 따른 때늦은 러브콜이다. 2005년 12월 베네수엘라를 시작으로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 남미대륙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좌파 정권 일색으로 넘쳐 났다.

특히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석유, 가스 등에서 나오는 막대한 오일달러를 앞세워 과거 미국 텃밭을 무서운 속도로 잠식해 나가자 중남미를 자신의 뒷마당 정도로 가볍게 치부했던 미국 정부는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부시 대통령의 이번 남미 순방에 특별한 정치ㆍ경제적 현안이 없으면서도 부시 취임 이래 해외 순방으로는 가장 긴 1주일이란 시간이 투입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미국은 차베스의 바람을 잠재울 카드로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을 선택했다. 브라질이 남미대륙에서 땅덩어리가 가장 큰 대국인데다 좌파지만 대화가 가능한 온건노선을 취하고 있는 점을 높이 산 것이다.

여기에다 남미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려는 차베스 대통령의 거친 행보가 남미 맹주인 브라질의 눈에는 불편하게 비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 브라질을 베네수엘라의 대항마로 꼽은 배경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이 브라질에 얼마나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가는 3월 31일 룰라 대통령을 워싱턴 인근 대통령의 주말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 초청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중남미 정상이 이 별장에 초청받은 것은 아버지 부시 대통령 시절인 1991년 카를로스 살리나스 멕시코 대통령 이후 16년 만이다. 한 국가와 극히 이례적으로 불과 20여 일 사이에 두 차례 정상회담을 갖는 것이나 대통령의 별장을 회담장소로 삼은 것 모두 세계 어느 정상도 쉽게 받지 못할 대접이다.

브라질과 대체에너지 개발 협의

첫 순방을 브라질에서 시작한 부시 대통령은 9일 룰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에탄올 생산과 이용에 관한 포괄적 협력방안을 논의했다.

부시 대통령이 에탄올을 브라질 방문의 키워드로 꺼낸 것은 브라질이 에탄올 자원 강국이어서 브라질 경제에 큰 파급효과를 일으킬 수 있고, 미국도 석유 등 화석연료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에너지 수급체계를 전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본 때문이다.

세계 에탄올 생산의 70%를 차지하는 두 나라가 에탄올의 에너지 자원화에 공동으로 나선다면 가능성 차원에 머물러 있던 대체에너지 개발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브라질 언론은 이런 점을 들어 이번 정상회담을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빗대 ‘에탄올의 OPEC’을 만들려는 시도로 보도하기도 했다.

문제는 대체에너지로서 에탄올의 상용화를 위한 양국 간 시장개방을 어느 수준까지 보장하느냐 하는 것이다. 브라질은 현재 연간 180억 리터의 에탄올을 생산하고 있고, 이 중 35억 리터를 미국에 수출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1월 국정연설에서 밝힌 것처럼 2017년까지 석유소비를 20% 줄이고 에탄올 공급을 늘리겠다는 구상을 실행에 옮길 경우 미국시장의 에탄올 수요량은 연간 800억 리터까지 늘어날 수 있다.

그러나 양국의 에탄올 생산비용의 현격한 차이가 걸림돌이다. 사탕수수를 원료로 하는 브라질의 에탄올 생산비용은 리터당 0.2달러인데, 옥수수를 원료로 하는 미국의 에탄올 생산비용은 리터당 0.3달러여서 가격경쟁력에서 미국이 상대가 되지 않는다.

브라질산 에탄올에 대해 부과되고 있는 갤런당 0.54달러의 미국 수입관세를 인하해 달라는 브라질 정부의 요구에 대해 미국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가 이번 정상회담의 최대 관심사다.

두 번째 방문국인 우루과이에서는 무역ㆍ투자 협정에 서명하는 등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위한 기초작업이 진행됐고, 과테말라에서는 2005년 비준된 중미자유무역협정(CAFTA)의 성과를 자축하는 자리가 마련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베네수엘라가 합류하면서 다시 탄력을 받고 있는 남미공동시장(MERCOSUR)을 의식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부시 대통령은 전통적 친미 우방인 콜롬비아와 멕시코에서는 각각 마약근절 방안과 불법이민 문제 등을 논의할 것으로 전해졌다.

아르헨티나 등 반 부시 움직임 가세

부시의 이번 순방이 다분히 정치적인 것인 만큼 반(反)부시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차베스 대통령의 든든한 지지자 중 하나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부시가 우루과이를 방문하는 시점에 맞춰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한 축구장에서 대규모 반미, 반세계화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

이 집회에는 차베스 대통령도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아르헨티나의 이런 대응의 이면에는 아르헨티나가 숙명의 라이벌로 여기고 있는 브라질을 미국 정부가 편파적, 일방적으로 구애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발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브라질도 미국이 우루과이와 체결하려고 하는 FTA에 대해서는 메르코수르가 무력화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고 있다. 이 때문에 룰라 대통령은 지난달 말 급히 우루과이를 방문해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는 등 사전 집안단속을 하기도 했다.

최근 BBC 여론조사에 따르면 비교적 미국에 우호적인 브라질과 멕시코에서의 대미인식조차도 각각 57%와 51%가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뉴욕타임스는 “부시 대통령이 남미국가들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약속하겠지만 맹렬한 석유외교를 펼쳐온 차베스 대통령의 입김을 뿌리칠 정도는 되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부시 대통령은 순방 전 미국 상공인회 연설에서 “남미지역에 해군 의료선을 보내 해상에서 8만5,000명의 환자를 진료해 주겠다” “파나마에 의료전문인 양성소를 세우겠다”는 등의 당근을 제안했다. 니컬러스 번스 국무부 차관은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를 축으로 볼리비아와 에콰도르를 직ㆍ간접적으로 지원하는 ‘21세기 판아메리카주의’를 표방했다.

스티븐 해들리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남미의 빈곤계층, 원주민들이 민주주의와 자유경제의 혜택을 받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주된 관심사”라고 밝혔다.

미국 정부의 약속이나 한 듯한 잇단 ‘남미 찬가’가 얼마나 약발이 먹힐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지난 몇 년 새 뿌리 내린 남미의 반미 바람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다니엘 오르테가(왼쪽) 니카라과 대통령과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중남미 국가 반미 선봉장이다.

황유석 국제부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