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금융·재정 지원하는 '중앙은행' 역할… 경제독립 의미역내 단일 통화 도입도 거론… 브라질 참여가 성패의 열쇠

실체없는 희망사항으로만 여겨졌던 ‘남미은행’ 창설 문제가 최근 언론에 오르내리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이제는 더 이상 먼 얘기가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세계 유력 언론들과 전문가들은 남미은행 창설의 현실성, 파괴력 등을 세밀히 분석하면서 남미 각국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미국의 입김을 배제한 남미은행 설립이 구체화하고 있으며 은행이 설립되면 상당한 변화를 유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남미은행이란 한마디로 중남미 대륙의 금융, 재정을 지원하는 중남미의 ‘중앙은행’을 뜻하는 것으로, 남미 스스로 역내 은행을 만들어 경제주권을 되찾자는 것이 남미은행 창설의 취지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 미주개발은행(IDB) 등이 까다롭고 엄격한 차관 조건을 내걸어 결과적으로 남미 경제의 서방으로의 예속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남미은행 창설은 곧 중남미 대륙의 ‘경제 독립선언서’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지난달 31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는 남미은행 창설을 논의하기 위해 주최국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파라과이 등 5개국 재무장관(파라과이는 재무차관)들이 모였다.

아르헨티나와 함께 남미은행 설립을 주도하고 있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도 직접 회의장에 나타나 은행 창설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날 회의는 남미은행 설립의 필요성을 재차 확인하고 오는 16, 17일 역시 카라카스에서 열리는 중남미 국가공동체 에너지 정상회담에서 남미은행 창설을 공식 의제로 채택키로 하고 폐막했다.

2004년 창설된 중남미 국가공동체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등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 5개 회원국과 볼리비아,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등 안데스공동체 4개 회원국, 그리고 칠레, 가이아나, 수리남 등 모두 12개국으로 구성돼 있다.

따라서 관심은 국가공동체 정상회담에서 남미은행 창설 문제가 어느 단계까지 논의되고, 얼마나 구체성 있는 이행플랜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베네수엘라와 아르헨티나가 투자하는 70억 달러를 자본금으로 해서 출범한 뒤 빠르면 내년 초부터 중남미 각국 정부에 대한 대출이 가능토록 한다는 것, 구체적으로는 볼리비아의 교육 및 보건 분야에 우선 대출을 해준다는 게 지금까지 알려진 구상이지만 중남미 각국 정부가 미국이 강력히 반대할 것이 뻔한 남미은행 창설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인가가 최대 관건이다.

중남미 반미 좌파의 선봉장인 차베스(오른쪽)베네수엘라 대통령이 2006년 9월 베네수엘라를 방문한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과 환영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여기다 정권의 민주화, 경제력 등에서 남미 각국의 편차가 워낙 크다는 점, 남미은행 구상 자체가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노골적인 외세배격이라는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됐다는 점 등이 남미은행 창설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실제 몇몇 회원국들은 남미은행 창설의 경제적 의미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으면서도 은행 창설이 반미 좌파의 맹주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차베스 대통령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을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남미은행 성패의 열쇠는 일단 브라질이 쥐고 있다. 정치, 경제적으로 남미 최대의 패권국인 브라질의 참여가 필수적임은 불문가지이나 브라질 정부는 남미은행에 대해 아직 확실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지난달 31일의 재무장관 회의에도 대표단을 보내지 않았다. 당시는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이 미국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목전에 둔 시기였기 때문에 미국의 체면을 생각해 회의를 피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그러나 브라질과 미국이 사탕수수나 옥수수를 원료로 하는 에탄올을 대체에너지로 개발하는 방안을 놓고 전에 없이 밀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또 남미은행이 브라질에 맞설 수 있는 역내 라이벌인 아르헨티나와 베네수엘라가 주도하고 있다는 점 등이 브라질의 적극적인 참여를 꺼리게 하는 요인일 것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좌파지만 경제적으로는 실용주의를 추구하는 유연한 입장인 룰라 대통령으로서는 모든 것을 반미의 잣대로 재려는 전형적인 좌파 포퓰리즘 지도자인 차베스 대통령이 접근해 오는 것을 마냥 달가워할 입장도 아니다.

이달 중 예정된 룰라 대통령의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방문에서 브라질 정부 입장의 일단이 나타날 것으로 보이지만, 대체적인 관측은 브라질이 남미은행 창설에 참여하더라도 베네수엘라와 아르헨티나를 견제하기 위해 속도조절에 나설 것이라는 데 모아지고 있다.

남미은행과 함께 중남미 재정통합의 방안으로 거론되고 있는 다른 하나는 남미통화의 도입이다. 유로화 같은 역내 단일통화를 만들어 달러 경제권에서 독립하자는 것이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7월 1일부터 양국간 통상 거래에서 무역대금을 달러가 아닌 자국통화로 결제하기로 합의해 달러화를 대체하기 위한 움직임은 이미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 차베스 대통령도 “국제금융시장에서 미국 달러화의 헤게모니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남미통화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남미통화 이름을 ‘수크레(Sucre)’로 하자는 아이디어까지 제시했다.

차베스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남미통화 역시 정치적인 복선이 깔린 것이라는 추측을 갖게 하지만, 사실 남미통화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 차베스 대통령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12월 초 에콰도르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브라질을 방문한 라파엘 코레아는 중남미 화폐 단일화를 역설하면서 “화폐통합이 이뤄진다면 현재 에콰도르가 채택하고 있는 미국 달러화 공식화폐 정책을 폐기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에콰도르는 최악의 금융위기를 겪을 당시인 2000년 9월 1884년 이래 116년간 사용해 온 고유 화폐 수크레를 포기하고 달러화를 공식화폐로 채택했다.

시장통합의 가장 높은 단계라 할 수 있는 단일통화 채택은 물론, 남미은행 설립도 현재 중남미의 정치력을 감안하면 실현되기 벅찬 과제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남미은행 창설이 미주개발은행(IDB)에게는 80년대 남미국가들의 디폴트(채무불이행) 사태 이후 최대의 위기일 수 있다”고 경고한 IDB 관계자의 우려에서 역으로 중남미 경제통합의 현실감을 느낄 수 있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