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냉전 이후 최악의 힘겨루기런던서 벌어진 방사성 물질 암살사건 놓고 '외교관 4명 추방' 맞불 공세앵글로색슨 우위 유지 vs 슬라브 영광 재현… 경제협력 중단 등 으름장

영국과 러시아가 한판 붙었다. 살인용의자 인도를 둘러싼 자존심 싸움이 이 외교전의 표면적인 이유이지만,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국제무대에서의 주도권을 노린 힘겨루기 성격이 강하다.

미국과 함께 앵글로색슨의 우위를 점하려는 영국에 대항해 슬라브족 러시아가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도전장을 내민 형국이다.

데이비드 밀리반드 영국 외무장관이 16일 의회에서 살인 용의자 안드레이 루고보이의 신병인도를 러시아 정부가 거부하고 있다는 이유로 런던 주재 러시아 외교관 4명을 추방하겠다고 밝히면서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밀리반드 장관은 외교관 추방 외에도 러시아 정부 관리들의 비자취득 절차를 포함한 여러 이슈에 대해 러시아와의 협력범위를 재검토할 것이며, 러시아 국민에 대한 비자 취득 단축을 위한 노력은 이미 중단됐다고 엄포를 놓았다.

인도를 계속 거부할 경우 교육 무역 반테러 분야에서의 협력을 중단한다는 경고도 잇따랐다. 이 같은 조치의 내용을 담은 보고서가 곧 의회에 제출될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정부도 19일 러시아 주재 영국 외교관 4명에게 똑같이 10일 내 러시아를 떠나라는 ‘맞불 추방’을 통보하는 등 한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앞서 안드레이 코코신 국가두마(하원) 독립국가연합(CIS) 위원장은 한발 더 나아가 “영국은 러시아 이상으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며 특히 경제적으로 상당한 손실을 입을 것”이라는 협박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지난 18일 모스크바 소재 영국 영사관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있는 사람들.

10여년 전인 1996년에도 양국은 첩보 논란으로 외교관을 추방하는 외교 충돌을 벌인 적이 있으나 최근의 양국관계는 여러 면에서 1970년대 냉전 이후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자국 사법권이 외국 정보당국에 유린됐다" 발끈

영국 정부가 인도를 요구한 루고보이는 러시아 연방보안부(FSB)의 전직 요원으로, 지난해 11월 런던에서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전 FSB 요원을 방사성 물질을 이용해 독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영국 정부는 5월부터 러시아 정부에 루고보이의 인도를 줄기차게 요구해 왔으나, 러시아는 자국 법정에서 그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겠다며 영국의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영국은 런던 한복판에서 벌어진 암살극이 외국 정부의 사주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점에 충격과 함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자국의 사법권이 외국 정보당국에 의해 유린됐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살해된 리트비넨코는 영국으로 망명해 반 푸틴 활동을 벌여온 반체제 인사였다는 점에서 이 같은 심증을 더욱 짙게 하고 있다.

그는 런던의 한 호텔에서 루고보이를 만난 뒤 방사성 물질인 폴로늄 210에 중독돼 사망했는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암살극에 개입했다는 의심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지난 19일 모스크바에 있는 영국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러시아 민족주의 자유당 당원들. 이들은 런던주재 러시아 외교관 4명을 추방하겠다고 밝힌 영국 정부에 항의하기위해 집회를 열었다.

영국과 러시아가 이번 사건을 두고 정면충돌 하는 데는 지금까지 쌓인 앙금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우선 러시아는 반체제 인사들이 대부분 영국 런던을 망명지를 택하고 있다는 점을 상당히 불쾌해 했다. 영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반 푸틴 세력 결집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불만이었다.

이들 중 21명에 대한 신병 인도 요구를 거부당한 적도 있었다. 러시아 정부가 이런 의심을 하는 것이 무리가 아닐 정도로 런던에는 러시아가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반체제 인사들이 대거 망명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사가 쿠데타를 일으켜서라도 푸틴 대통령을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억만장자 석유재벌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이다.

구 소련 해체 후 국유재산의 사유화 과정에서 이를 헐???불하받아 엄청난 부를 축적한 그는 2000년 대선에서 푸틴 대통령의 당선을 도운 일등공신이었으나 푸틴 정부가 그의 정치적 야심을 견제하기 위해 세무조사를 하자 2001년 영국으로 망명했다.

러시아 정부는 1990년대 초 국가자산의 매각 과정에서 거액을 횡령, 돈세탁한 혐의로 그에 대한 신병요구를 계속 요구해 왔으나 영국 정부는 이를 거부해 왔다.

베레조프스키는 여기서 한 술 더 떠 러시아 야당 인사들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지원하는가 하면 기회 있을 때마다 “푸틴 체제는 무력에 의해서만 전복될 수 있다, 나와 뜻을 같이하는 크렘린 낸 인사와 접촉하고 있다”는 등의 민감한 발언을 계속해 왔다.

영국 정부조차 이 발언에 대한 국내법 위반여부를 조사했을 정도였다.

■ 러시아 반체제 인사 런던에 대거 망명

러시아로부터 분리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는 무력투쟁을 벌이고 있는 체첸 공화국 반군 대변인인 아흐메드 자카예프도 러시아의 신경을 긁는 인물이다.

러시아 정부가 “국제테러범”이라고 비난하는 그는 90년대 중반 러시아_체첸 전쟁 때 야전사령관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2002년 200여명이 희생되는 대참사를 낳은 모스크바 극장 인질극의 배후 조종 혐의로 러시아 사법기관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밖에 반체제 활동으로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던 망명작가 블라디미르 부코프스키, FSB의 전신인 구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대령 출신 올레그 고르디에프스키, 반체제 여기자 옐레나 트레구보바 등 마치 런던이 러시아 반체제 인사들의 주무대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영국 역시 푸틴 대통령이 막대한 자원을 앞세워 패권을 추구하려는 데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다. 원유 생산량 세계 2위, 천연가스 생산량은 압도적으로 가장 많은 에너지를 무기로 유럽의 경제안보를 쥐락펴락 하려는데 대한 위기감이다.

러시아 정부가 추진하는 대대적인 에너지 국유화 과정에서 최대 투자국이던 영국의 기업들이 막대한 손실을 입는 사례도 잇따랐다. 코코신 위원장이 “영국이 이번 일로 상당한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될 것”이라고 한 것도 러시아에 의존하는 영국 에너지 산업의 취약성을 겨냥한 발언이라 할 수 있다.

양국의 외교관 맞추방 사태는 상호간에 쌓인 깊은 불신이 암살사건을 계기로 터져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당장 러시아 정부는 영국의 아킬레스건인 천연가스와 석유 등 에너지 분야에서의 협력을 제한하는 등 경제 제재를 가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럴 경우 러시아에서 대규모로 유전ㆍ가스 개발 사업을 하고 있는 영국계 석유 메이저인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이 경제전쟁으로 비화한 양국 간 충돌의 최대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미사일방어(MD) 기지 설치 문제로 미국과 대립하다 유럽 재래식무기감축조약(CFE) 이행 중단이라는 카드까지 꺼낸 푸틴 대통령의 강경한 대 서방 정책기조로 볼 때 국제무대에서의 러시아발(發) 갈등과 대립구도는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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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