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3번 연임 금지하는 헌법조항 따라 총리직 수용 시사정치적 배경 없는 주브코프 현 총리와 자리 맞바꿀 가능성

블라디미르 푸틴(55) 러시아 대통령의 퇴임 후 총리직 수용 시사 발언으로 러시아 정계가 요동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퇴임 후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2012년 실시되는 차차기 대선에 다시 출마할 것이라는 것은 기정사실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대통령 퇴임 후 바로 총리로 자리를 바꿔 전면에서 권력을 행사하겠다면 이는 지금까지의 전망과는 완전히 다른 얘기가 된다. 푸틴이라는 실세총리가 야기할 정계 개편의 파장을 짐작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차기, 차차기 대권 후보군에도 지각변동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달 초 집권 여당인 ‘통합러시아당’ 8차 당대회에서 “당이 비례대표 후보자 상위권에 나를 포함시켜 주겠다고 제의한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인다”고 말한 뒤 당원들이 자신의 총리 취임 문제를 제기한데 대해 “총리 자격으로 러시아를 이끄는 것은 현실적인 아이디어”라고 화답했다.

2001년 4월 창당 당시 푸틴 대통령도 참여한 통합러시아당은 푸틴 대통령의 절대적인 지지세를 볼 때 12월 2일 실시되는 총선에서 하원(국가두마) 전체 의석(450석)의 절반 이상을 휩쓸 것이 확실시된다.

이렇게 될 경우 푸틴 대통령은 의원직 당선이 100% 확실해 당수나 총리로서 2선 후퇴 없이 실질적인 정권 연장이 가능하게 된다.

2000년 대통령에 처음 당선된 뒤 2004년 재선에 성공한 푸틴 대통령은 연속 3번 연임을 금지하는 헌법 규정에 묶여 내년 3월 실시되는 대선에 출마할 수 없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의 입법기관 출마를 막는 법규정은 없기 때문에 총리로 취임하는데 외부적 제약 요인은 없다.

문제는 푸틴 대통령 스스로 의중을 밝힌 총리직 취임이 낳을 정계 파장이다. 러시아는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중앙집권체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푸틴 대통령이 총리가 되면 총리로 권력이 급속히 이동하는 것은 불보듯 뻔하다. 대통령과 총리의 권력 양분 차원을 넘어 대통령이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

총리 푸틴의 향후 러시아 정계를 점치는 다양한 시나리오는 이 같은 ‘실세 총리, 바지 대통령’ 구도에서 비롯된다.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는 총리로 권력을 유지하면서 꼭두각시 대통령을 앞세워 4년 뒤인 2012년 다시 대통령직에 오른다는 구상이다.

이런 계획이라면 대통령직에는 총리 푸틴이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만만한 인사가 오를 것이라는 점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빅토르 주브코프(66) 총리 지명자가 주목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주브코프 총리 지명자는 지난달 예상을 깨고 전격적으로 총리에 지명됐다. 총리 자리가 관례적으로 대통령의 후계자를 사실상 공식화하는 직위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정치적 배경이 전혀 없는 전문관료인 주브코프가 낙점된데 대해 당시 온갖 억측이 나돌았다.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아서 눈치채지 못했울 뿐 그가 푸틴의 복심(腹心)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푸틴 총리’라는 첫 단추를 꿰면 주브코프가 총리로 지명된 이유도 자연스레 풀린다. 정치적으로 푸틴에 맞설 가능성이 거의 없는 주브코프와 총리, 대통령직을 맞바꾼 뒤 2012년 대선을 준비하겠다는 것이다.

10월 2일 모스크바 크레믈린궁에서 열린 연례회의에서 빅토르 주브코프(왼쪽) 총리와 밀담을 나누는 푸틴 대통령.

■ 포스트 푸틴 주자들 '발등의 불'

발등의 불이 떨어진 것은 포스트 푸틴을 노리던 세르게이 이바노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등 2명의 제1부총리이다. 푸틴 이후의 가장 강력한 대선 주자로 자타가 공인해 온 이들은 이런 시나리오라면 완전히 ‘닭 쫓던 개’ 신세에 다름 아니다.

정치세력이 만만치 않고, 특히 대권욕을 숨기지 않은 이들에게 푸틴이 대선 출마의 기회를 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의 총리직 수용 시사 발언을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이 1990년대 초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에 도전한 이래 가장 급진적인 변화’라고 평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더 급진적인 시나리오는 총리에 취임한 뒤 강력한 의회 권력을 앞세워 헌법개정을 시도하는 경우다. 통합러시아당은 우호 정당의 지분을 합친다면 이번 총선에서 개헌 가능선인 3분의 2 이상의 의석 확보가 가능하다.

총리에게 권한을 대폭 이양하는, 이를테면 정보기관인 연방보안국(FSB)과 같은 주요 권력기관을 대통령이 아닌 총리 산하에 둔다든가, 3선 연임금지 규정을 삭제한다든가, 총리 지명권을 대통령이 아닌 의회가 갖도록 한다는 것 등의 권력 개편도 가시권내에 들어와 있다.

이렇게 된다면 총리 푸틴은 대통령 푸틴 못지 않은 권력을 장악하게 돼 차차기 대선 승리는 떼논 당상이다.

주브코프가 자신보다 11살이나 더 많기 때문에 조기 선거를 통해 더 일찍 대통령에 오를 가능성도 있다.

■ 강력한 의회 권력 앞세워 개헌 가능성도

푸틴의 권력 장기화는 그가 ‘강한 러시아의 부활’을 꿈꾼다는 점에서 미국 유럽 등에는 큰 부담이다. 특히 동유럽을 무대로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와 유럽의 갈등은 유럽 확장의 결정적인 장애로 작용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미 징후는 나타났다. 발칸의 코소보 독립 문제가 대표적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코소보를 세르비아에서 분리, 독립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러시아가 예상외로 강력히 반대하면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러시아가 코소보에 지렛대를 둘 만한 실질적인 정치적 이해관계가 크지 않다는 점에서 러시아의 코소보 독립 반대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것이란 해석이 많다.

미국에 맞설 수 있는 초강대국의 하나로서 국제현안에서 발언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데, 이런 러시아가 동유럽으로 팽창을 꾀하는 유럽연합(EU)을 가만 두고 볼 리가 없다. 2년전만 해도 러시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東進)과 EU의 동진은 명확히 구별했다.

나토는 군사적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보았지만, EU의 동진은 러시아의 경제적 이익과 통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 최대규모의 천연가스와 원유로 무장한 러시아 경제가 급부상하면서 이마저도 더 이상 러시아의 매력을 끌지 못하게 된 것이다.

발트해의 에스토니아에 대한 사이버 테러, 미사일방어(MD) 기지 설치 논란, 세계 최대 천연가스 회사인 가즈프럼의 유럽 가스시장 통제 야욕, 영국과의 스파이 논쟁, 러시아 폭격기의 노르웨이 영공 침범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최근의 유럽과의 갈등은 동유럽에서 벌어질 러시아와 유럽의 다음 전쟁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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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