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지도자로 64년 만에 이란 방문한 푸틴의 핵개발 옹호 발언에 발끈'자원의 보고' 카스피해 연안 5개국 정상회담서 나온 공동성명도 심기 긁어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수 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17일 백악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나는 세계 지도자들에게 3차 세계대전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란이 핵무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기술을 얻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말해왔다”고 밝혔다.

부시 대통령의 상식 이하의 발언은 어제 오늘 문제가 된 것이 아니어서 굳이 논평할 가치가 없지만, 이번 발언은 그 수위나 비뚤어진 인식의 정도에서 과거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이란이 핵기술을 갖는 것이 3차 세계대전을 불러올 만큼 절체절명의 것인지는 차치하고라도, 인류의 공멸을 뜻하는 세계 전쟁을 동네 싸움 얘기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의 정신세계가 의심스럽다는 의미에서다.

다른 나라 지도자가 한 말이면 ‘개 짖는 소리’라고 일소에 붙이면 그만이지만, 세계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의 대통령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심각하다. 이런 정신상태라면 정말 다른 모든 나라가 반대하든 말든 미사일과 탱크로 이란을 뭉개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부시 대통령의 발언은 최근 미국의 군사 독주에 강력히 제동을 걸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이란을 공식 방문한 직후 나왔다.

푸틴 대통령이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이란의 평화적 핵 개발 권리를 옹호하고, 더 나아가 이란에 대한 무력사용을 반대한다고 천명한 지 불과 하루만이다.

부시 대통령의 3차 세계대전 발언은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이란에 대한 강력한 협박이겠으나, 내심은 푸틴 대통령에 대한 경고와 견제에 더 무게를 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푸틴 대통령에게 한 노골적인 발언은 이 뿐만이 아니다. 부시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의 일련의 정치 행보에 대해 “비밀로 가득하며 교활하다”고 말했다.

또 “구 소련이 붕괴한 이후 러시아 민주화에 대해 기대감을 품었지만 지금은 러시아가 민주화의 궤도를 이탈했다”며 “중앙집권체제가 박혀있는 러시아인들의 DNA 구조를 재입력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도 했다. 이것 역시 한 나라의 국가원수와 국민에게 하기에는 예의와 격식에서 한참 벗어난 말이다.

불과 3개월 전 부시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을 “테러와 맞서는데 있어 신뢰할만한 지도자”라고 추켜세웠다. 7월 부시 가문의 별장이 있는 미국 메인주 케네벙크포트에서였다.

부시 대통령은 당시 미국을 방문한 푸틴 대통령과 바다낚시를 하고, 랍스터 요리를 함께 먹으며 ‘돈독한 우의’를 과시했다.

그 때도 국제적 현안에서 푸틴 대통령과 이견이 적지 않았으나 최소한 공개석상에서는 대화와 타협의 모양새를 취하는 절제된 모습을 모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이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카스피해 연안 5개국 정상회담에 앞서 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AP 연합뉴스)

그럼 3개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부시 대통령이 이런 격한 발언을 한 것일까. 부시 대통령의 돈키호테식 사고방식은 일단 제쳐두고 푸틴의 최근 행보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역시 하이라이트는 러시아 지도자로서는 요지프 스탈린 이후 64년 만에 처음이었던 이란 방문이었다. 이란의 핵 개발을 놓고 미국을 위시한 서방이 군사대응을 포함한 온갖 제재를 궁리하는 마당에 나온 푸틴 대통령의 이란 방문은 그 자체가 부시 대통령의 자존심을 긁는 것이었다.

더욱이 ‘러시아가 이란의 방패가 될 수 없다’는 식의 회담 결과를 기대한 것과는 정반대로 보란 듯이 이란을 공개 두둔하자 속된 말로 ‘뚜껑’이 열린 것이다. 푸틴 대통령의 이란 방문 하루 뒤에 전격적으로 기자회견을 연 것은 푸틴 대통령에게 쌓인 불만을 작심하고 털어놓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은 테헤란에서 이란 지도자들과 만남을 가진 것 말고도 카스피해 연안 5개국과도 정상회담을 가졌다. 카스피해는 엄청난 석유와 천연가스가 묻혀있는 자원의 보고이자 정치, 군사적으로도 국제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지정학적 요충지이다. 미국도 이런 전략적 가치를 감안해 송유관 건설이나 군사기지 확보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열린 카스피해 정상회담에서 나온 공동성명은 미국에는 또 하나의 충격이었다. 러시아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등 5개국은 카스피해의 항해권과 자원이용권은 5개국에만 국한된 배타적 권리라는 점과 역외국가가 군사적 목적으로 카스피해 영역을 이용하는 것을 불허한다는 것을 명시했다.

푸틴 대통령이 국방동맹 체결을 제안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성명은 또 5개국의 경제협력 기구를 창설하는데 합의한 뒤 내년 러시아에서 첫 회의를 열기로 했다. 카스피해에 가장 눈독을 들이고 있는 미국을 겨냥한 것임은 물론이다.

특히 이 정상회의를 최근 사사건건 미국의 발목을 잡는 러시아가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 미국으로서는 꺼림직하다.

물론 과거 소련연방이었던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등 세 나라가 독립하면서 러시아의 ‘말발’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합의사항만큼이나 불협화음과 이견도 많았다.

이란과 투르크메니스탄은 카스피해를 호수로 보고 5개국이 균등 분할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나머지 세 나라는 이를 바다로 보고 각국의 연안 길이에 비례해 배분해야 한다고 해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카스피해는 호수나 바다도 아니기 때문에 1982년 채택된 유엔해양법 협약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연안국들은 10여년 전 카스피해의 모든 자원이 5개 연안국에 귀속되고 카스피해의 법적 지위는 연안국의 합의에 의해서만 채택될 수 있다는 두 가지 중요한 원칙만 합의하고 1992년부터 실무협상을 벌여왔다.

그러나 정치, 경제, 환경적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합의를 보지 못했고 이번에도 ‘카스피해 협약 서명’은 불발됐다. 그러나 이란에 대한 군사적 압박 필요성에다 (대 이란 군사작전을 위해서는 아제르바이잔의 군사기지 확보가 필수적이다), 자원확보가 21세기 국가간 경쟁의 최대화두가 된 현 시점에서 카스피해의 독점적 권리를 선언한 것은 과거와는 의미가 다르다.

푸틴 대통령은 이란 핵 문제 외에도 동유럽 미사일방어(MD) 기지 건설, 코소보 독립 문제 등에서 미국의 반대편에 서면서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응전의 의지를 보이고 있다.

미국의 동유럽 MD 계획 강행에 반발해 유럽재래식무기감축협정(CFE) 이행을 유예했고, 유럽의 앞마당인 칼리닌그라드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겠다고 위협했다.

코소보 독립을 유엔 테두리 밖에서 강행한다면 그루지아나 우크라이나의 친 러시아 세력권을 분리독립하도록 하겠다고 맞불을 놓았다.‘강한 러시아의 부활’을 꿈꾸는 푸틴 대통령이 미국 대외정책의 ‘안방’에까지 비수를 들이대는 상황이다.

미국이 푸틴의 도전을 지금까지처럼 망한 소련의 연장선상에서 평가절하할지, 아니면 달라진 힘의 역학구도를 받아들이는 계기로 삼을지에 따라 국제정세의 향배가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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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