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페론의 환생인가 새로운 여걸 탄생인가남미의 힐러리 '보톡스의 여왕' '남미의 이멜다'등 별명포퓰리즘 탈피와 성장 위주 경제정책 내실화가 최대 과제

아르헨티나 영부인으로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선거운동 본부에서 승리를 축하하고 있다.
에바의 환생인가, 새로운 여걸의 탄생인가.

현 상원의원이자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의 부인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54)가 지난달 28일 실시된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차기 대통령에 선출됐다.

예상했던 결과임에도 그의 당선이 갖는 정치적 상징성의 무게는 여전하다. 19세기 초 아르헨티나에 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선거로 당선된 최초의 여성 대통령, 남편에게서 정권을 넘겨받는 첫 선출직 부부대통령의 탄생이란 외형적인 기록도 무시할 수 없는 ‘사건’이지만, 무엇보다 페르난데스 당선자가 세간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여성 대통령, 여성 지도자와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1952년 33세 젊은 나이에 자궁암으로 숨진 에바 페론은 그때나 지금이나 아르헨티나 국민의 성녀(聖女)로 남아 있다. 후안 도밍고 페론 대통령(1974년 사망)의 퍼스트레이디로서 도시 노동자, 빈민들을 위한 유토피아적 정책을 쏟아내면서 일약 국민의 영웅이 된 에바는 한편으로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의 종말이 얼마나 비참하고 속절없는 것인가를 보여준 비운의 여성이기도 하다.

페르난데스의 당선을 놓고 60여 년 전의 에바를 떠올리는 것은 그가 에바와 비슷하게 여성으로서 좌파 민족주의에 기반한 포퓰리즘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다.

출신배경이나 정치적 역정 등에서 페르난데스와 에바는 하늘과 땅 차이지만 아르헨티나 국민은 에바의 얼굴이 오버랩된 페르난데스의 모습에 열광했다.

에바가 죽고 난 뒤 몰아친 재앙과도 같은 정치적 경제적 몰락을 목격한 유권자들이 에바를 꿈꾸며 페르난데스를 지지했다는 것은 역설 중에서도 지독한 역설이다.

에바는 시골 농장주인 아버지와 요리사였던 어머니 사이의 사생아였다. 15세 때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무작정 상경했지만 원하던 배우의 삶과 현실은 거리가 멀었다. 돈벌이를 위해 밤마다 나이트클럽을 전전했다.

이런 에바의 삶은 지진 난민 구제모금 행사에서 당시 군사정권의 실세 육군 대령이자 노동장관이었던 페론과 만나면서 극적으로 바뀌었다. 둘은 결혼했고, 페론은 1946년 2월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 사상 첫 선출직 부부 대통령 탄생

에바의 진가는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타고난 미모에 언변까지 갖춘 그녀는 정치세력화의 한 방편으로 노동자 농민 등 대중을 의식한 임기응변식 정책을 쏟아내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대통령인 남편보다 더 인기있고 더 강력했던 에바는 친권과 혼인에서의 남녀평등과 여성의 참정권 보장, 의료보험 제정, 고아원 같은 사회시설 건립 등 어느 국가보다도 선진적인 복지정책을 내놓았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는 논리에서였다.

페론 대통령 부부를 칭송하는 글짓기가 매주 초등학교의 숙제였다는 것은 에바의 인기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죽기 직전 대통령궁 광장에 나와 울부짖는 군중들에게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마오(Don’t cry for me, Argentina)”라고 한 절규는 남미 포퓰리즘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아있다.

페르난데스 당선자에게서 에바 이미지가 남아있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약이자 독이다. 국정을 강력히 펼쳐나갈 수 있는 정통성의 원천이지만, 유권자들의 헛된 이상을 불식하고 현실을 냉철히 정치에 접목시켜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부담이자 한계이다.

더욱이 페르난데스 당선자는 남편인 키르치네르 정부가 이룬 외형적 경제성장을 내실로 이끌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고 있다. 2003년 권력을 잡은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집권 중 연 평균 8% 이상의 높은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2001년 12월 금융위기 이후 채무불이행(디폴트)를 겪으면서 2002년 경제성장이 마이너스 10%대로 추락한 것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다. 페르난데스가 당선된 데는 경제적으로는 키르치네르 정부의 이 같은 경제적 성과가 크게 작용했다. 남편의 후광을 본 것이다.

그러나 키르치네르 정부의 성장일변도 정책으로 인한 폐해 역시 시한폭탄과 같은 뇌관으로 경제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가장 큰 문제가 인플레이션이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올해 인플레를 7.5%로 공식 발표했지만, 실제 인플레는 25%가 넘을 것이라는 게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부인의 당선을 돕기 위해 인플레율을 조작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고용을 늘리고 경제를 확장하는 것이 키르치네르 정부의 제1의 경제정책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인플레가 최소한 정부 발표치보다는 높을 것이라는 추정이 무리는 아니다.

문제는 안정을 희생시키면서 쌓아온 성장 정책을 페르난데스 당선자가 계속 견지해 나갈 수 있느냐 이다. 지금까지 대통령 당선에 남편의 후광이 절대적이었다면 앞으로 국정을 펼칠 대통령으로서의 성공 여부는 남편의 그늘을 어떻게 벗어나느냐에 달렸다는 분석은 이런 배경에서다.

남편을 계승하면서 한편으로 남편을 부정해야 하는 묘한 상황이다. 친기업적 시장경제를 중시하면서 이를 위해 실용적인 외교노선을 추구한다는 게 페르난데스 당선자의 구상이지만, 지속가능한 성장으로 경제 체질을 바꾸기 위해서는 전임 정권과 다른 차원의 고통은 불가피하다.

동화 ‘엄마 찾아 삼만리’의 주인공인 이탈리아 소년의 어머니가 가정부로 일하러 떠난 곳이 19세기 후반의 아르헨티나였다.

이탈리아 여성이 3D 업종의 외국인 노동자로 취업할 정도로 아르헨티나는 한때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던 잘나가던 부국이었다. 20세기 중반 아르헨티나가 끝없는 몰락의 길로 들어선 것은 에바로 상징되는 포퓰리즘이 광기를 부린 20세기 중반 페론 정부가 시발점이다.

페르난데스 당선자에게는 여성 정치인의 표상으로 떠오른 미국 대선의 유력주자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을 비유해 ‘남미의 힐러리’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그러나 얼굴 곳곳에 성형수술을 해 ‘보톡스의 여왕’이라든가, 저택의 방 하나를 고급신발로 가득 채워놓을 정도로 신발 수집광이라고 해서 ‘남미의 이멜다’라고 불리기도 한다.

반드시 해외 브랜드 생수만 마시고, 보석과 패션에도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악몽과도 같은 페론 정부의 과시적 취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가 정치적 이익을 좇아 에바가 했던 것 같은 ‘국가적 쇼’를 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페르난데스 당선자의 등장으로 여성 지도자들의 시대가 만개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이웃 칠레의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 등 여성 대통령이나 여성 총리는 10여명에 달한다.

내년에는 미국에서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초대형 여성 대통령의 탄생이 조심스럽게 점쳐진다. 페르난데스 당선자가 여성지도자의 또 하나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할지, 제2의 에바로 전락할지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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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석 한국일보 국제부 차장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