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키스탄 국가비상사태 선언 그 후…권력분점 약속한 부토전총리 강력 반발로 연정 사실상 무산미국·이슬람 무장세력 향후 행보등정치적 난관 첩첩산중

페르베즈 무샤라프(64) 파키스탄 대통령이 기어이 사고를 쳤다.

3일 설마 했던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헌법효력을 정지시키는 초법적 헌정파괴 행위를 또다시 자행한 것이다. 1999년 육군참모총장 시절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무혈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이후 두번째의 헌정 중단조치다. 이 때문에 이번 비상사태 선포를 그의 ‘제2의 쿠데타’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샤라프 대통령이 비상사태 선포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는 물론 권력 유지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지난달 의회 투표를 통해 대통령에 재차 당선된 무샤라프는 전임 임기가 마무리되는 이달 15일 이전 대통령 후보 자격에 관한 대법원의 판결을 앞두고 있었다. 지난달 6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이 군참모총장과 대통령을 겸임하고 있는 무샤라프의 대통령 자격을 문제삼아 대법원에 위헌 여부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한데 따른 것이었다.

‘1차 쿠데타’ 이후 줄곧 대통령과 군참모총장을 겸임해 온 무샤라프는 ‘민간인은 군 지위를 가질 수 없다’는 헌법상의 규정으로 인해 끊임없이 대통령 자격 시비를 불렀다.

2004년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는 대가로 군참모총장을 포기한다고 약속했으나, 막상 개헌이 국민투표를 통과한 뒤에는 미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필요하다는 이유로 말을 뒤집었다.

이번에도 집권당 의원이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의회의 ‘체육관 선거’를 앞두고 군복을 벗겠다고 공언했으나 그의 말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었던 야당은 대신 법원에 판단을 구했다.

당초 대법원의 판결 내용에 자신했던 무샤라프는 시한이 임박하면서 기류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사전에 대법원을 무력화할 수 있는 비상사태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무샤라프 대통령의 국가비상사태 선언 후 반정부시위에 나선 대학생들.

사실 이번의 군참모총장 포기 약속은 2004년의 그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당시는 통치기반을 더 공고히 하기 위한 욕심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번은 정반대로 권력기반이 밑둥부터 흔들리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타개하려는 고육책의 성격이 짙다.

미국의 대 테러전의 강력한 동맹국이란 관계를 이용해 권력을 유지해 온 무샤라프는 올해 들어 온갖 실정과 악재를 거듭하면서 정권이 무너질 수 있는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3월 이프티카르 무하마드 초드리 대법원장을 해임했다 국민의 강력한 저항에 굴복해 복직을 허용한 사건은 권력 붕괴의 시발점이었다.

초드리 대법원장은 그간 대법원 판결을 통해 무샤라프 권력의 불법성을 집요하게 문제삼아 왔다. 이 때문에 무샤라프에게는 눈엣가시로, 국민에게는 민주화의 상징으로 부각됐다.

무샤라프가 초드리 대법원장을 제거하려 한 것은 인권과 헌법의 보루인 대법원을 장악해 권력의 마지막 장애물을 없애버리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변호사들이 일제히 거리로 뛰쳐나오고 일반 시민까지 가세하는 전국적 파업으로 사태가 확산되자 무샤라프도 어쩔 수 없이 대법원의 초드리 복직 판결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정권의 도덕성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7월에는 국제테러조직 알 카에다와 이슬람 급진세력의 본거지인 ‘랄 마스지드(붉은 사원)’를 무력진압하면서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 이슬람 무장세력의 준동을 촉발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잖아도 미국의 대 테러전을 추종하는 정권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이슬람 세력은 붉은 사원 사건을 계기로 무샤라프 정권과 완전히 등을 돌렸다.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서쪽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수중에 넘어가 정권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할 정도이다.

대법원장 해임 파문, 붉은 사원 유혈 진압이 국내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무샤라프의 정적인 나와즈 샤리프 전 총리가 자신의 귀국을 ‘침해될 수 없는 권리’라고 한 8월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지난달 입국을 시도한 것은 무샤라프가 예상치 못한 뜻하지 않은 외부 악재였다.

샤리프 전 총리는 무샤라프가 비행기 안에서 무혈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당시의 총리로, 쿠데타로 권력을 빼앗긴 이후 자신에게 씌워진 부패와 내란 혐의 등으로 강제 추방돼 지금까지 7년여 동안 사우디 아라비아와 영국 등에서 망명생활을 해 왔다.

베나지르 부토(오른쪽) 파키스탄 전 총리가 파키스탄 인민당(PPP) 마크툼 아민 파힘 부의장과 향후 정국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더욱이 샤리프 전 총리는 무샤라프 정권과 척을 진 이슬람 세력에 강한 지지기반을 갖고 있어 그의 귀국은 무샤라프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지난달 10일 이슬라마바드 공항에 내린 그를 4시간 만에 다시 망명지인 사우디로 다시 강제 출국시키는 것으로 일단락을 지었지만 샤리프는 언제든 다시 입국을 강행한다는 입장이어서 불씨는 여전하다.

앞으로의 초점은 비상사태 선포에 항의해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는 들끓는 여론이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에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뇌관에 불을 당길 수 있는 변수가 도처에 널려 있어 무샤라프의 앞으로의 정치생명을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조지 W 부시 미국 정부가 무샤라프 카드를 계속 밀고 나갈 것인지, 비상사태로 해산된 대법원을 입맛에 맞는 판사들로 다시 구성할 수 있을지, 발호하는 이슬람 무장세력을 통제할 수 있을지, 샤리프 전 총리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가 이번 비상사태 선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또 미국 정부의 강력한 중재 하에 밀실에서 무샤라프와 부토가 합의한 권력분점 약속이 유효한 지 여부이다.

무샤라프 군부정권이 등장하면서 샤리프 전 총리와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역시 지난달 귀국한 부토 전 총리는 무샤라프의 권력기반이 심각히 위협 받자 콘돌리사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요청으로 무샤라프와 권력분점에 합의했다.

무샤라프가 대통령에 다시 당선되고, 내년 1월 실시 예정인 총선에서 부토가 이끄는 파키스탄인민당(PPP)이 승리하면 부토가 총리직을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여전히 파키스탄 국민의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는 부토의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해 무샤라프의 취약해진 권력기반을 봉합해보자는 미국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시나리오는 무샤라프의 전격적인 비상사태 선포로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사태 초기 변호사들의 반정부 시위에 거리를 유지하면 신중한 입장을 취하던 부토 전 총리가 닷새째인 7일 무샤라프를 강력 비난하면서 봉기를 촉구해 아슬아슬하게 이어오던 무샤라프와 부토의 연정 끈은 사실상 끊겼다고 할 수 있다.

부토의 반정부 투쟁 가담으로 반정부 시위는 앞으로 규모와 강도면에서 한층 격화될 것으로 보여 어떤 식이든 사태는 충격적인 방법으로 종결될 가능성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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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석 한국일보 국제부 차장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