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다르고 빈부격차 두드러져 플랑드르-왈롱 지역 끝없는 반목교부금 문제로 총선 후 5개월 넘게 내각구성도 못해 '무정부상태'

벨기에가 두쪽으로 쪼개진다면.

우리의 경상남ㆍ북도를 합친 면적에 불과한 유럽의 소국 벨기에가 극심한 국론분열을 겪고 있다. 지난 6월 10일 총선이 치러졌지만, 5개월이 훨씬 넘도록 아직 내각을 구성하지 못하는 ‘무정부’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물론 1998년에도 선거 후 148일이 지나서야 연정을 구성한 예가 있었다. 하지만 각 정당의 지역 이기주의가 이처럼 첨예하게 부닥친 경우는 없었다. 보다 못한 국민이 거리로 나와 ‘벨기에의 통합’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까지 벌이고 있으나 혼미한 국정은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예 총선을 다시 실시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사정은 이렇다. 벨기에는 네덜란드말을 쓰는 북부 플랑드르 지역과 프랑스말을 쓰는 남부 왈롱 지역으로 구성돼 있다.

인구로는 전체 1,060만명 중 플랑드르가 60%, 왈롱이 40%를 차지한다. 플랑드르 지역은 1990년대 이후 물류, 화학 등 지식기반 산업으로의 전환에 성공하면서 영국 독일을 앞지르는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

반면, 광산 철강 석탄 등 ‘굴뚝산업’이 중심인 왈롱 지역은 이들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플랑드르 쪽에서 떼어주는 교부금에 의존해 살아야 하는 불쌍한 처지로 전락했다. 한때 지배계급을 독차지할 정도로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쥐었던 옛날과는 격세지감이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벨기에 분리 반대 시위를 펼치고 있는 군중들.

문제는 플랑드르 지역의 주민들이 “왜 우리가 왈롱 지역을 먹여 살려야 하느냐”며 왈롱 지역에 교부금을 주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불거졌다.

급기야 주민들은 조세 등 경제정책에서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철저히 지역에 기반을 두는 정당들이 이에 휩쓸리면서 연일 날선 공방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자치권을 확대한다는 것은 교부금을 축소하거나 중단하겠다는 뜻이어서 왈롱 지역 정당이 이에 강하게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한 대학 보고서에 따르면 2005년 플랑드르에서 왈롱에 준 교부금은 56억 유로(6조 5,000억원). 플랑드르 주민 한 사람이 매일 2.5 유로를 왈롱 지역 주민들에게 떼주는 셈이다.

플랑드르에서 오는 교부금은 왈롱 지역 전체 예산의 15%를 차지한다. 알베르 2세 국왕은 헌법개정이 필요한 자치권 확대문제는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현자위원회(Committee of Wise Men)’에 맡기고 조속히 새 정부를 출범시키자는 중재안을 내놓았지만, 정당들은 마이동풍이다.

이번 총선에서 제1당에 오른 중도우파의 플랑드르 기독민주당의 이브 레테름 당수는 심지어 “왈롱 주민들은 네덜란드어를 배울 지적 능력이 모자란다”라고 독설을 퍼붓는 등 민족주의 감정을 부추기는 발언도 서슴지 않고 있다.

레테름 당수는 지난 8월 국경일에 프랑스 국가를 부르는가 하면, 건국기념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국가도 제대로 부르지 못한다고 실토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사실 벨기에 만큼 국가라는 관념이 드문 나라도 드물다.

1830년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매개로 합쳐 독립한 벨기에는 독립 당시 프랑스 언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자 네덜란드어권이 반발해 1차 대전 후 오늘날과 같은 언어권으로 분리됐는데, 이런 구원으로 인해 줄곧 지역감정의 반목이 끊이지 않았다.

의회에 진출해 있는 11개 정당도 모두 지역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번에 승리한 기독민주당도 플랑드리 지역 기독민주당이 있고, 왈롱 지역 기독민주당이 있다. 같은 이념과 정책을 표방하지만 지역별로 나눠진 ‘동지 정당’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 다른 중도우파 정당인 자유당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언어권 별로 같은 이름의 정당이 나란히 존재한다.

극우파 정당인 ‘블람스 벨랑’의 필립 드윈터 당수는 “벨기에는 강대국 사이의 완충지대로 건립된 인공 국가이기 때문에 사실 2개의 다른 국가”라며 “공유하는 것이라고는 국왕과 초콜릿, 맥주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럽의 수도’라 불리는 브뤼셀만 없었다면 양쪽은 벌써 갈라졌을 것이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양측의 갈등을 부추기는 또 하나의 요인은 수도 브뤼셀의 선거구 획정 문제다.

벨기에의 한 꼬마 아가씨가 벨기에 분리 반대시위에서 대형국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인구 100만명의 브뤼셀은 지역적으로는 플랑드르에 속해 있지만 주민의 90%는 왈롱계인데, 선거구는 외곽 플랑드르권인 할레_빌보르데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이 때문에 플랑드르 쪽은 선거구를 나눠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왈롱은 반대하고 있다.

이달 초 하원 내무위원회에서 네덜란드어권 의원들은 프랑스어권 의원들이 전원 퇴장한 가운데 선거구 분리안을 사상 처음으로 단독 통과시켜 양측의 대립에 기름을 부었다.

벨기에의 분리주의 움직임은 유럽연합(EU) 차원에서도 큰 골칫거리이다. 올해 27개국으로 회원국이 늘어난 EU에는 몰타, 키프로스와 발트해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인구가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불과한 소국이 적지 않다.

네덜란드어권 분리주의자들은 이런 소국들을 거론하며 벨기에가 남북으로 갈라지더라도 인구 600만명의 플랑드르는 EU에서 얼마든지 입지를 다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벨기에가 이미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로권 13개국에 가입해 있기 때문에 분리되더라도 통화를 다시 만들 필요가 없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벨기에의 분리가 스페인의 카탈로니아 지방이나 영국의 스코틀랜드 등에 독립운동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게 문제이다.

현지 언론들은 1993년 1월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평화적으로 갈라선 체코슬로바키아의 사례를 특집으로 다루면서 가까운 ‘이웃’으로 사는 게 불행한 ‘결혼’보다는 낫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면서 EU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본부 외에 2,000여개의 다국적 기업의 유럽 본부ㆍ지사가 있는 브뤼셀은 양쪽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는 ‘EU 특별시’로 하자는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교부금 문제로 남북이 대립하고, 정치가 마비되는 심각한 상황이지만, 벨기에가 실제 둘로 쪼개질 것이라고 보는 국민은 아직까지는 소수이다.

최근 블람스 벨랑이 제출한 독립실시 국민투표 동의안이 플랑드르 지역의회에서 부결된 것은 ‘분리보다는 공존이 벨기에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여론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국내총생산(GDP)의 87%에 달하는 공공부채를 당장 해결할 뾰족한 방안이 없다는 것도 분리를 어렵게 하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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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석 국제부 차장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