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만에 좌파 정부 탄생… 친미서 친중으로 외교노선 바뀔 듯러드 차기 총리의 '특별한 중국사랑'… '미국과의 밀월' 청산될 수도입헌군주제 폐지·원주민과 적대관계 청산 등 국내정치도 변화 예고

호주의 차기총리로 선출된 케빈 러드 노동당당수와 그의 아내 테레스 레인이 손을 흔들어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례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호주가 11년 만에 변화를 선택했다. 지난달 24일 치러진 총선에서 야당인 노동당이 11년 동안 권력을 장악해 온 보수파 자유당-국민당 연합을 누르고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노동당의 권력 탈환은 총선 전 일찌감치 예견된 것이었으나, 막상 좌파정부의 탄생으로 결과가 나타나자 다양한 각도에서 호주 총선을 조망하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는 고립주의라는 호주의 전통적인 외교 독트린을 깨고 지난 10여년간 아시아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충실히 수행한 존 하워드 현 총리의 적극적인 개입정책과 관계가 깊다.

노동당의 승리는 물론 2차 대전 이전의 고립주의로의 회귀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방적으로 미국에 치우쳤던 외교 불균형을 바로잡고 미국 못지않게 아시아를 중시하는 등거리 외교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특히 아시아 무대에서 많은 변화를 예상할 수 있다.

가장 관심의 초점은 미국과의 관계 변화이다. 물러나는 하워드 총리는 일본과 함께 아시아에서 미국의 외교 군사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을 자임해 왔다.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에도 불구하고 ‘의지의 동맹’ 일원으로 이라크에 전투병을 파견했고, 중국의 패권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일본-호주-인도로 이어지는 해양동맹의 한 축을 담당했다. 전세계가 초국가적 문제라는 인식에서 도출해낸 기후협약의 비준을 거부, 역시 이에 반대해 온 미국의 홍위병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런 구도는 이라크전 반대와 기후협약 비준을 공약으로 내건 노동당의 등장으로 일순 뒤바뀌게 됐다. 2050년까지 온실가스의 60%를 감축하겠다고 약속한 노동당은 총선 승리 직후 기후협약 비준을 재차 강조하며 ‘새로운 호주’를 알리는 포문을 열었다.

차기 총리에 오를 케빈 러드(50) 노동당 당수는 3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리는 유엔 기후변화협약(UNFCCC) 회의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이라크 전투병력 철수, 기후협약 비준 등은 호주 외교정책의 변화를 알리는 상징적인 현안이지만, 지금까지 하워드 호주 정부와 조지 W 부시 미국 정부의 밀월을 가능케 했던 연대의 핵심고리를 끊는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하다.

러드의 노동당 정부가 미국이 이끄는 아시아 3각축에서 이탈을 시도한다면 미국의 아시아 경략은 큰 차질을 빚을 수 밖에 없다. 이는 미국의 해양동맹에 맞선 러시아-이란-중국의 대륙동맹으로 무게추가 옮겨갈 수도 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존 하워드(왼쪽) 현 총리와 케빈 러드 차기 총리.

러드 차기 총리가 다름아닌 대표적인 중국통이라는 점도 미국의 심사를 불편하게 하는 요인이다.

그의 경력을 보면 “중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서방 최초의 지도자”라는 중국 언론들의 기대 섞인 찬사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호주 국립대에서 중국 역사와 중국어를 전공했고, 대만 사범대에서 유학했다. 원어민처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푸통화(普通話)는 이때 닦았다. 1984년부터 3년 간은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다.

‘루커원(陸克文)’이라는 중국 이름도 자신이 직접 지었다. 호주 정계는 물론, 세계 어느 나라 지도자보다 중국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중국과의 이런 인연 때문에 일화도 많다. 지난 9월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 중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 30여분 동안 중국어로 회담하면서 각별한 분위기를 연출했는데, 러드가 하워드 총리보다 더 조명을 받자 총선을 의식한 알렉산더 다우너 외무장관이 “외무부에 들어오면 누구나 외국어 코스를 거친다, 나는 프랑스어를 2개월 만에 마스터했으나 러드는 중국어 반에서 2년 동안이나 중국어와 씨름했다”고 폄하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후 주석이 2003년 호주 의회에서 연설할 때도 통역 이어폰을 쓰지 않은 의원은 그가 유일했다.

러드 차기 총리의 ‘중국 사랑’은 가족들에서도 확인된다. 자녀 2남 1녀 중 변호사로 일하는 장녀는 올해 5월 홍콩 출신 화교은행가와 결혼했다. 장남은 상하이(上海) 푸단(復旦)대에서 공부했고, 고교생인 막내 역시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러드 차기 총리에게 중국은 경력관리 차원 그 이상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러드 총리 정부의 출발을 보는 중국이 달뜬 기대감을 숨기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경제적으로는 중국과 호주는 아시아 최대의 파트너 관계를 유지해 왔다. 호주가 구가하고 있는 장기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중국이 호주에서 사가는 철광석 석탄 우라늄 등 자원의 급격한 수요가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호주가 정치적으로는 중국을 봉쇄하려는 미국에 예속돼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중국과 손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누구보다도 중국을 잘 알고, 아시아 균형외교를 주창하는 러드 총리의 노동당 정부가 들어섰으니 중국으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호재가 아닐 수 없다.

이번 호주 총선은 국내 정치에서도 적잖은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우선 끊임없는 논란을 불렀던 입헌군주제 폐기 문제가 다시 불거질 전망이다.

호주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국가수반으로 하는 영연방 국가이지만 최근 들어 군주제 폐지와 함께 국가수반도 호주인이 맡아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고 있다.

하워드 현 총리가 공개적인 군주제 지지자인데 반해 러드 차기 총리는 군주제 폐지를 위한 국민투표를 공약으로 내세운 확고한 공화주의자여서 조만간 헌정체제에 대한 일대 변화가 올 가능성이 많다.

호주 사회의 두통거리였던 원주민(애보리진)과의 적대적 관계도 노동당 정부의 등장과 함께 개선의 여지를 마련했다.

호주 정부는 원주민들이 백인문화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자 1916~69년 원주민 어린이들을 부모에게서 강제로 빼앗아 백인가정에 입양시키거나 고아원에 넣는 ‘동화정책’을 펴왔다.

하워드 총리의 입장도 “현재 세대가 과거의 실수에 죄의식을 느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러드 차기 총리가 “새 의회 회기가 시작되는 대로 원주민들에게 과거 정부의 가혹행위를 사과하겠다”는 뜻을 밝혀 원주민과 백인사회 간 뿌리깊은 갈등의 역사가 어느 정도 치유될 전망이다.

호주 역사상 두번째 장수 총리인 하워드 총리는 이번 선거에서 권력을 뺏긴 것은 물론, 33년간 13번 연속 당선됐던 자신의 지역구에서마저 정치신인에 패해 의원 자리마저 잃는 굴욕적인 패배를 맛봤다. 현직 총리가 의석을 놓친 것은 1929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하워드 뿐 아니라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스페인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등 ‘부시의 푸들’을 자처했던 세계 지도자들이 부시 실정의 유탄을 맞고 잇따라 낙마했다. 부시 미국 정부가 1년여 밖에 남지 않은 즈음에 출범한 호주 노동당 정부가 더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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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석 한국일보 국제부 차장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