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남한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대선주자들과 물밑 접촉설차기정부 대북지원을 확약받기 위한 포석인 듯… 미국도 정권교체 대비 서울·평양서 분주한 행보

지난달 29일 북한의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갑작스럽게' 남한을 방문하는 날 베이징의 정통한 북한 소식통은 국내 관계자들에게 '생뚱맞은' 연락을 해왔다. "김양건 부장이 누구를 만나는지 확인해보라"는 것. 특히 대선주자, 그 중에서도 이명박 후보 쪽을 주시하라는 귀띔까지 했다.

김 부장이 방남한 시점은 여야 대선주자들이 후보등록을 마친 직후이고 대선의 마지막 뇌관이라는 BBK 사건을 놓고 후보 간 대립이 최고조에 이른 때였다.

김 부장의 방남에 대해 정부 당국자는 "정상회담과 총리회담을 통해 남북한이 합의한 경협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고, 김 부장 역시 "남북간 경제협력이 한반도 평화와 미래를 만드는 것"이라며 '경협'에 방점을 두었다. 김 부장의 방남에 '정치적 배경'은 전혀 없다는 풀이였다.

그러나 남북관계에 정통한 복수의 전문가들은 "김 부장이 경협 문제로 방남했다는 해석은 남북간에 총리급ㆍ장관급 회담, 실무회담이 계속 이어진 데 비춰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2000년 9월 김용순 통일전선부장의 방문 때는 7개항의 합의서가 발표됐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합의서 발표가 없는 점도 그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접견실에서 김양건(왼쪽) 북한 통일전선부 선전부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김 부장이 2박3일 남한에 머문 동안의 동선은 그가 일정을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간 뒤 국내외 정보통들을 통해 윤곽이 어렴풋이 전해졌다. 우선 김 부장은 이명박 후보를 비롯해 다른 후보와도 접촉했다는 전언이다. 그 자리에는 청와대 최고위 인사와 미국측 고위 관계자가 동석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김 부장과 동행한 북측 인사가 이명박 후보쪽 사람을 따로 만났다는 소식도 덧붙여졌다.

■ 힐 차관보 '부시 친서' 들고 평양으로

김 부장은 남북 당사자들이 만난 자리에서 한나라당이 집권할 경우에도 지난 10월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사항은 지켜져야 한다는 주장을 폈고 대선후보 모두 그에 동의했다는 후문이다. 특히 그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이 컸다는 전언이다.

김 부장 일행이 1일 북한으로 돌아간 뒤 남-북-미 간에 묘한 동선이 이어졌다. 같은 날 3일 미국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평양으로, 백종천 대통령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은 워싱턴으로 각각 떠났다. 힐 차관보는 "핵시설 불능화를 점검하고 핵 프로그램 신고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라고 했고, 백 실장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상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소식통들은 그와는 다른 해석을 전했다. 백 실장의 워싱턴행은 유력 대선주자의 확고한 '약속'을 미국에 전하고 미국으로부터는 남북정상회담을 가능케 한 대북지원 프로젝트, 즉 '한반도 마셜플랜''의 이행을 뒷받침 받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한 힐의 방북은 차기정부의 대북지원 약속을 분명히 전달하고, 북으로부터는 핵프로그램의 이행을 담보 받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힐을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친서를 보낸 것은 미국이 그만큼 임기 내 북핵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강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어서 남한의 대선결과와 상관없이 남북관계는 획기적인 변화가 전망된다.

■ 김영남 상임위원장 서울 방문 유력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내년 1월 서울 방문설은 그러한 남북관계 변화에 마침표적 성격을 띤다. 김만복 국정원장은 "내년 1~2월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남한을 방문할 계획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안다"고 선을 그었지만 북한 소식통들은 김 상임위원장이 내년 초 방남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를 편다.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약속한 남북경협, 대북지원 합의를 확실하게 이행 받으려면 대선 이후 대통령당선자와 결국 공조를 해야 하며 그럴 시기는 내년 1~2월 뿐이라는 계산에서다.

북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방남중에 대선후보들과 접촉했다는 소문의 배후에 미국의‘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9월 호주 시드니의 APEC 정상회의에서 만나 악수를 하는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북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방남중에 대선후보들과 접촉했다는 소문의 배후에 미국의'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9월 호주 시드니의 APEC 정상회의에서 만나 악수를 하는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김 국정원장이 "북측에서 만나자고 제의하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는 새 정부에 북한을 연결시켜주는 일을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한 것은 북측의 방남 여지를 남겨둔 셈이다.

대선을 앞두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복심으로 불리는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남한을 방문하고 대선주자들과의 면담설 등에 미국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면서 그러한 '힘'의 배경을 놓고 해석이 구구하다.

부시 정부의 한반도에서의 1차 관심사는 북핵이고, 북한이 미국의 핵프로그램을 순수히 받아들인 직접적인 배경은 '경제지원'이다. 미국은 북한의 자금줄인 마카오 BDA에 대한 압박을 풀면서 경제 제재를 완화하고, 남한은 노무현 대통령이 제시한 한반도 마셜플랜으로 불리는 대북지원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 北인사-MB 접촉 뒤엔 미국 역할론도

이러한 남-북-미 3국 간 상호 프로젝트와 이행에 대한 밑그림은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9월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공동체(APEC) 정상회의에서 가진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과 이에 따른 실무진들의 회의를 통해 상당부분 구체화되었다는 후문이다. 이어 10월 남북정상회담에서 남한의 대북지원에 대해 구체적인 진척을 보았다고 한다.

정부 고위관계자에 따르면 북한은 남북경협 및 NLL 문제 해결, 서해유전개발 등을 논의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확실한 보장책, 즉 '재원'에 대해 자주 묻곤 했다고 한다.

결국 김양건 통전부장의 방남은 한반도 마셜플랜의 이행 가능성과 이것을 뒷받침할 '재원'을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미국은 북측에 '재원'의 안전성을 확인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차기 주자들에게도 재원의 이행에 대한 약속을 받아낸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 실력자가 유력한 대선주자인 이명박 후보와 접촉했다는 소문의 배경에는 미국의 역할론도 제기된다. 미국이 이 후보의 당선을 기정사실화하고 북측 관계자를 연결했다는 추정이다. 일부에선 북한이 미국의 북핵 프로그램을 이행하는 조건으로 미국은 이 후보에게 대북지원 약속을 확약 받았다는 애기도 들린다.

북미 관계가 순항 중이고 차기 정부의 대북 지원이 절실한 지금의 복합적인 상황을 감안할 때 과거 대선판을 뒤흔들던 북풍 같은 것은 이번 대선에서는 물러나 있을 듯하다. 내년 초에야 북한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방남 가능성과 함께 과거와는 다른 각도에서 북풍이 거세게 불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대선 지형에서 북풍은 미풍(美風, 미국 영향력))에 가려 맥을 못 추는 형국이다. 북미 관계가 어긋나 광풍으로 돌변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동력을 갖출 시간이 부족하고 김양건 통일전선 부장의 방남이 말해주듯 북한은 대선 후의 훈훈한 남풍(南風)을 기대하고 있다. 대선판을 휘돌고 있는 미풍의 위력을 통제하고 북풍을 맞을 차기주자는 1주일 후에 가려진다.

대선을 전후해 북한 고위 인사의 방남이 가속화하면서 남북경협이 차기 정부의 주요 과제가 될 전망이다. 4일 홍은동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 제1차 회의.

■ BBK카드, 아직도 미국이 쥐고 있나

이번 대선의 최대 변수였던 BBK사건의 뇌관이 사실상 제거되면서 이명박 대세론이 탄력을 받고 있다. 한국일보-미디어리서치의 5~6일 여론조사 결과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은 40.7%로 정동영ㆍ이회창 후보와 20%포인트 이상의 지지율 격차를 보였다. 앞으로 남은 대선 1주일 동안 이변이 없는 한 이 후보의 당선이 유력하다. BBK사건 수사 종결의 명암이 극명하게 갈린 셈이다.

그렇다고 BBK사건의 의혹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BBK 사건의 실질적인 뇌관을 여전히 미국이 쥐고 있다는 얘기도 현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김경준 BBK 전 대표를 조기에 한국에 송환한 것이나 김씨의 누나 에리카 김의 검찰 수사에 대한 반박 기자회견이 갑자기 취소된 배후에 미국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김경준씨와 에리카 김 모두 미국의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미국에 좌우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지난 3월 BBK사건에 대한 미국 내 재판과는 별개로 연방수사국(FBI)을 통해 김경준씨를 극비리에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통해 국내 검찰이 밝힌 것과 다른 이명박 후보의 아킬레스건을 확보했다는 소문이 뒤따랐다. BBK 자금과 관련된 것이라는 그럴듯한 얘기도 나돌았다.

김경준 씨를 조기에 송환한 것은 유력한 대선주자인 이 후보를 컨트롤 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즉 대권에 근접한 이 후보에게 슬쩍 위협적인 카드를 보여주어 대선 후 한미, 남ㆍ북ㆍ미 관계에서 유효한 카드로 활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북한 김양건 통일전선 부장이 남한을 방문했을 때 미국이 이 후보 측과의 연결을 주선하고 BBK 카드를 앞세워 집권 후 대북지원 등 관계 설정의 가이드라인을 선보였다는 소문도 있다.

반면, 미국이 BBK 사건과 관련해 별개의 카드를 확보하고 있다는 얘기는 터무니없는 낭설이라는 반론도 있다. 설령 그런 카드가 있더라도 이 후보가 집권할 경우엔 별 효력이 없다는 추론이 상당하다. 더구나 BBK 문제가 한미 관계 자체를 흔들 만큼 파괴력이 있는가에 대해선 회의론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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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차장 jjpark@hk.co.kr